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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한 산세 이용한 고구려 뛰어난 축성기술 보여줘

역사의 숨결어린 요동- 고구려 유적 답사기행<52>

중부일보 2011.02.14  남도일보 2013.01.16  18:17:05


<고구려 내륙 근거지 태자성②>

험한 산세 이용한 고구려 뛰어난 축성기술 ‘탄복’

북쪽·동쪽 측면 낭떠러지…남쪽 측면 가파른 산등성이

내·외성으로 나뉜 태자성 둘레 1,425m· 면적 13만2천㎡

생활·방어용 시설 두루 갖춰…기와 등 각종 유물 사라져

태자하 기슭에 정박해 있는 선박같은 산성, 고구려의 높은 축성기술 구현


태자성은 신빈현 하협하향 쌍하촌(雙河村) 태자성마을 뒷산(북쪽)인 태자하 강기슭에 우뚝 솟아있는 해발 70~80m가 넘는 산등성마루에 자리하고 있다.


이 산성의 북쪽과 동쪽 측면은 모두 낭떠러지고 남쪽 측면은 가파른 산등성이다. 바깥쪽 비탈의 경사도가 상대적으로 완만한 산성의 서쪽 산등성이는 북에서 남으로 점점 높아지는데 그 남쪽 끄트머리는 남잡목에서 관전으로 가는 성도를 사이에 두고 서쪽의 노모저강(老母猪崗: 늙은 어미돼지 고개라는 뜻) 주봉에서 뻗어 나온 그리 높지 않은 언덕과 이어졌다. 그리고 산성 북쪽에는 동북쪽에서 흘러온 태자하가 서남쪽으로 흘러가고 있고, 동남쪽에서 흘러온 태자하의 지류 소북하(小北河)는 산성 동쪽 벼랑 밑을 지나 산성 동북쪽 모서리 아래서 태자하에 흘러든다. 이렇게 3면이 벼랑과 가파른 산등성이로 된 강물이 감도는 이 산성은 난공이수의 천혜의 요새가 분명했다.


태자성 서남쪽 모서리 밑에 남잡목에서 관전으로 가는 성도 옆에 ‘무순시 문화재 태자성(고구려)’이라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 옆의 성도는 그곳에서 태자성마을 서쪽을 지나 서남방향으로 나있다. 이 길을 따라 태자성마을 서남쪽에 이르러 되돌아서서 태자성을 바라보면 산성의 절벽 같은 남쪽 측면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동서 양쪽이 높고 중간이 오목하게 내려앉은 모양세가 태자하 기슭에 정박해 있는 거대한 선박과 흡사했다.


태자성 밑에 있는 태자성마을 한복판에 동서로 가로나있는 골목길에서 초희영(肖喜榮·62세)이란 이 지역주민을 만났다. 인사를 나누고 한담을 한 다음, 필자가 온 뜻을 이야기하자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이 노인은 열정적으로 태자성에 대하여 아는 만큼 소개해 주었다. 이 노인이 어릴 적에 마을 노인한테 들었는데, 우리가 서 있는 골목길이 바로 옛날 태자성의 해자자리라고 하면서 본인도 50여년 전에 이 길 끄트머리에 남아있던 우묵하게 파인 긴 홈을 보았다고 말하였다.



초희영의 조언대로 필자는 산성 서쪽 산비탈 아래에 나있는 길을 따라 북쪽으로 나가다가 경사도가 비교적 완만한 산비탈의 후미진 곳에 있는 산성 북문터로부터 산성을 살펴보기로 했다. 북문은 산성 북쪽 벼랑의 서쪽 끄트머리와 산성서쪽 산등성이 북쪽 끝머리 사이에 오목하게 들어간 언덕 위에 설치되었다. 돌로 쌓아놓은 두 층으로 된 넓은 계단 위에 있는 문터와 그 양 옆에는 지금은 아무 석축물도 없지만 원래 여기에는 길이가 25m고 너비가 5m며 높이가 3m 넘는 높고 큰 석벽이 양옆 산비탈에 쌓아놓은 성벽하고 이어져 있었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원래 이곳에 무너져 있던 담벼락은 언젠가 현지 주민들이 다 뜯어갔다고 한다. 북문터의 지세가 산성에서 제일 낮으므로 방어하는 데 보강하기 위하여 고구려 사람들은 북문 동북쪽 근처에다 현지에서 마면이라고 부르는 치를 하나 설치해 놓았다. 산성 북쪽벼랑 바깥쪽으로 우뚝 서 있는 내민 혀 모양으로 된 큰 바위의 윗면을 평평하게 하여 그 위에 돌로 쌓아올렸다는 이 치는 남북 길이가 18m고, 동서 너비가 10m며 높이가 10m나 된다. 이것은 요동 고구려 산성 중에서 보기 드문 것이다.


북문에 들어서서 북벽터를 따라 올라 가노라니 확 트이고 아득하게 보이는 널따란 성안모습이 눈에 안겨왔다. 동서로 가로놓인 산성의 평면은 불규칙적인 타원형으로 생겼는데 동쪽과 서쪽이 높고 중간이 낮은 말안장 같은 모양이다. 둘레의 길이는 1천425m고 면적은 13만2천㎡다. 산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나누어지는데 산성의 크기를 약 3분의 1로 동쪽부분을 차지한 내성의 지면이 외성보다 좀 더 높다. 온통 밭으로 된 넓은 성안을 덮어버린 흰 눈이 햇빛 아래서 유난히도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성문은 북문을 제외하고도 2개 더 있다. 하나는 남벽 중간쯤에 설치해 놓은 남문인데 너비가 2m로 비교적 은폐되어 있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이 문은 남벽의 가파른 산등성이의 후미진 곳에 설치해 옛날에도 마차는 올라오지 못하고 그저 사람과 말들만 드나들었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옹성형태로 된 내성 문인데 내성 서벽 중간위치에 설치해 놓았다. 그 자리에는 지금까지 돌로 쌓았던 담벼락이 보인다.


산성의 동벽은 내성서 벽 북쪽 끄트머리에서 내성 남단까지 395m인데 활모양의 둥근 형태를 이루고 있고, 성벽은 모두 낭떠러지 위에 밑 두께는 1m, 위 두께는 0.5m로 쌓아놓았다. 서벽은 남문에서 북문까지 490m인데 그 평면 주향(走向)이 반환형과 유사하다. 이 서벽은 두 토막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남문에서 산성의 서남쪽 모서리까지인데 이것은 서벽의 남쪽 토막이고 나머지는 서벽의 서쪽 토막이다. 이 두 토막의 성벽은 모두 흙과 돌을 섞어서 축조한 것이다. 그 축조방법은 먼저 그리 가파르지 않은 산비탈의 허리쯤에 성벽을 쌓을 수 있는 밑바닥을 마련해놓고 그 위에다 돌로서 바깥쪽 외벽을 안팎으로 쌓은 다음 그 사이에 흙과 돌조각을 넣고 다져서 높이가 성 안쪽 비탈과 같아지게 해놓고 그 위에다 또 높이가 1~1.5m 되도록 석벽을 쌓았다. 이런 성벽 아래 부위에 돌로 깔지 않았으면 보호 둑을 쌓아놓았다. 남벽은 동벽과 내성 서벽이 사귀는 곳에서부터 남문까지 260m다. 이 성벽의 축조방법은 동·서 양쪽부분이 다르다. 동쪽 부분은 동쪽 성벽과 같은데, 돌이 많이 섞이었고, 서쪽 부분은 가파른 산비탈이거나 좀 낮은 절벽 위에다 2m되는 담벼락의 기초를 파서 그 위에 안팎으로 바깥쪽 벽면을 쌓은 다음 그 사이에 돌조각을 넣어 다졌다. 그리고 서벽처럼 그 위에다 또 약 1m 높이로 돌 벽을 쌓아놓았다. 북벽은 북문에서부터 동벽북단이 내성서벽 북쪽 끄트머리와 사귀는 곳까지 280m 되는데 동쪽으로 나가면서 점차 높게 솟아오르는 산 능선에 따라 더욱더 높아진다. 이 성벽은 좁고 기다랗게 우뚝 솟은 산 능선을 뼈대로 하고 그 양측에다 다듬은 돌로 조금씩 안으로 들어오게 내·외벽을 쌓았는데 그 내벽의 높이는 6m고 외벽의 높이는 8~10m다. 이 성벽의 밑바닥 너비는 4~6m이고 윗면의 너비는 1m 된다.


중국의 일부 고고학자들은 이런 견해가 있다. ‘맥인(貊人)도 고구려 사람처럼 산성을 잘 쌓고 축성기술도 높다.’ 이들 가운데 태자성 유적 고고학 발굴조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요동에 있는 고구려 초기 산성 중에서 태자성 성벽에 고구려인과 맥인들의 축성기술이 제일 잘 구현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 실증으로서 여기에 험악한 산세를 이용한 벽면이 수직으로 된 동벽이 있는가 하면, 산 능선을 뼈대로 하고 그 양측에다 다듬은 돌로 조금씩 안으로 들어오게 내·외벽을 쌓은 북벽도 있고, 가파른 곳에 담벼락의 기초를 먼저 파서 그 위에 안팎으로 외벽을 쌓고 그 중간에 돌조각을 넣어 채운 다음 그 위에다 비교적 낮은 돌 벽을 쌓아놓은 남벽도 있다. 이뿐만 아니라 이곳에는 양 측면으로 돌로 쌓아올린 전통적인 높고 큰 석벽, 즉 서벽의 북쪽토막 같은 것도 있다.



태자성에는 생활과 방어용 시설도 두루 갖추어졌다. 북문 남쪽으로 54m 되는 곳에 옛 우물이 하나 있는데 우물 안벽은 돌로 쌓았고 지름이 1.5m로서 아직까지 물이 나와 성안의 수원(水源)으로 쓰고 있다. 이밖에 산성에서 제일 높은 서남쪽 산등성이와 동벽 남쪽 불룩 솟아있는 곳에 옛 봉화대가 하나씩 있고 내성 안에 군사들을 호령하고 훈련시키는 장대터도 있다. 성 안에는 또 건물터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초희영의 말에 의하면 이전에 태자성안에 허물어진 성벽과 건축물 부근에 쐐기돌 같은 석자재와 기와조각들이 널러져 있었는데 석자재는 이곳 주민들이 가져다 주로 돼지우리나 기타건물을 짓는 데 썼고 수많은 기와조각은 마차로 실어다 산성의 북쪽 낭떠러지에 버렸다고 한다. 지금도 산성 안의 사다리 모양으로 된 제전(梯田)의 밭머리에 쌓인 돌들을 눈여겨보면 원래 성벽에서 가져왔다는 것이 확연하다.


태자성의 동쪽 봉화대에 올라서면 산성의 전경과 주변의 산천을 굽어볼 수 있다. 거기에 서서 성안의 드넓은 밭과 산성 아래 태자하와 그 지류 소북하의 충적평원에 아득하게 펼쳐진 논과 밭을 바라보면서 1천여년 전에 고구려 사람들이 여기에서 농사지으며 살다가 적이 쳐들어오면 산성을 사수(死守)하는 정경을 상상해 본다. 그러는 순간, 필자는 자신도 모르게 현재와 같이 변해버린 역사에 대한 아쉬움과 어쩔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에 빠져 버렸다. 


장광섭/중국문화전문기자  윤재윤/요령조선문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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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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