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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평 이순신이야기, 해설 난중일기 45] 칼을 든 승려들

일요서울 입력 2016-05-09 09:45 승인 2016.05.09 09:45 호수 1149 49면 


- 나랏일에는 종교인도 앞장서다!

- 목숨 의지할 수 있는 탁월한 리더십


<이순신 초상화, 동아대 박물관 소장>


인간의 삶을 보다 아름답고, 성스럽게 만드는 종교가 피를 부르고 있다. 어느 시대나 주류가 아닌 종교는 늘 거부되고, 탄압을 받기 마련이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유대교에 의한 기독교 탄압, 로마에서의 가톨릭 탄압, 그 이후 개신교 탄압 등등 셀 수 없는 사례들이 있다. 최근에는 상업화된 집단광기에 사로잡힌 이슬람국가(IS)같은 극단주의자가 유령처럼 횡행하며 세계인을 공포에 몰아넣고 있다.


종교란 무엇인가. 왜 종교가 존재하는가. 신의 존재를 믿건 혹은 불교처럼 궁극의 지혜를 추구하건, 종교는 결국 이성적 인간이 다가갈 수 없고, 알 수 없는 그 무엇, 그 어떤 존재, 영원불변의 진리에 관한 것이다. 종교의 창시자들은 언제나 그 시대를 반영한 담론을 펼쳤고, 다른 한편으로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진리를 설파했다.


그래서 어떤 종교의 경전을 보든,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많다. 창시자들은 탄압을 받을지언정 복수를 가르치지 않았다. 눈에는 눈, 칼에는 칼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려놓고, 얻어맞으라고 한다. 그들은 고통 속에서 자신들의 신념과 신앙을 확인했고, 단련의 기회를 삼았다. 창시자들은 말한다. 나와 모두를 위해 지금의 나를 바꾸고, 다른 이와 함께 내가 사는 세상의 부조리를 개혁하고, 조금 더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새로운 세계를 꿈꾸라고.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승려들


우리 역사에서도 새로운 종교는 언제나 탄압을 받았다. 불교에서는 이차돈의 순교가 있었고, 가톨릭은 엄청난 순교자를 낳았다. 동학도, 대종교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역사를 보면, 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나라 종교는 큰 특징이 있다. 배타적이지 않다. 다른 종교를 인정한다. 서구나 아랍세계 혹은 인도의 종교들과 달리 공존한다. 결정적으로 공동체가, 국가가 위태로울 때는 언제나 앞장을 섰다. 침략을 위해서가 아니라 침략자를 무찌르기 위해 자신들의 종교 교리에서 금지하는 살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 1592년 3월 2일. 흐렸고, 바람도 불었다. 나라 제삿날(중종비인 장경왕후 윤씨 제사)이라 좌기하지 않았다. 승군(僧軍) 100명이 돌을 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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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2년 3월 4일. 맑았다. 아침에 조이립의 이별잔치를 했다. 객사 대청에서 공무를 처리한 뒤, 서문 해자와 성(城)을 추가로 쌓는 곳을 순시했다. 승군들이 돌 줍는 일을 성실하게 하지 않기에, 승려 우두머리를 장(杖)에 처했다. 아산으로 안부를 여쭙기 위해 갔던 나장이 들어왔다.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했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경국대전》의 규정에 따르면, 병마절도사는 매년 연말에 성이 무너진 곳을 임금에게 보고하고, 보수해야 한다. 보수를 하지 않거나 제대로 보수하지 않은 경우는 파면사유가 되었다. 2일과 4일 일기는 승려들이 동원되어 돌을 날라 성을 쌓고, 해자를 파는 모습이다.


칼을 든 승려를 만든 리더십


오희문의 <임진남행일록>에는 1592년 3월 18일, 전라도 장수현에서 군대가 진법 훈련하는 모습이 나온다. 또 그가 장수를 거쳐 강진에 갔을 때는 순찰사의 순시를 대비해 갑작스럽게 성을 쌓고, 해자를 파며, 군사 훈련을 해서 백성들이 괴로워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이 때 주로 동원된 사람들은 《난중일기》의 기록처럼 승병이었다.


그런데 오희문이 본 장면과 《난중일기》의 장면에는 차이가 있다. “(성을 보수하는 책임자의) 뜻에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당장 때리고 쳤다. 모두들 원망하고 고통스러워했다.” 강진에 동원된 승군들이 무자비하게 처벌 당하는 모습이다. 반면, 일기에 썼듯 이순신은 승군 우두머리만 처벌했다. 리더십의 차이를 볼 수 있다. 무차별하게 괴롭히는 리더와 분명한 이유 속에서 대상을 한정해 책임을 추궁하는 리더의 차이다. 그것이 이순신에게 승병이, 승장이 모여든 이유다.


《난중일기》와 이순신의 장계에는 칼을 뽑고 전쟁터에서 활약했던 승장 삼혜·의능·수인·혜희·성휘·신해·지원이 나온다. 불교의 계율 중에서 불살생계(不殺生械), 즉 생명을 죽이는 것을 금지하는 것은 가장 비중이 크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순신과 함께 침략자를 격퇴하기 위해 칼과 활을 들었다. 게다가 때때로 심지어는 돌격장으로도 활약했다.


이순신이 백의종군을 할 때 정혜사 승려 덕수는 이순신을 위해 미투리를 바쳤고, 수인은 이순신의 식사를 도울 승려 두우를 데려다 놓기도 했다. 명량해전 직전, 이순신이 조선 수군을 수습할 때는 승려 혜희가 찾아와 이순신에게 종군했다. 이순신의 장계에 따르면, 승려들은 국가에서 군량을 받으며 전투를 하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 군량을 마련해 전선에 탔다.


▲ 의병장인 순천 교생 성응지와 승장 수인·의능 등은 이토록 힘든 전쟁에 임해 자기의 편안 대신 의로운 기운을 발휘해 군사를 모집해 각각 300여 명을 거느리고 나라의 치욕을 씻으려고 했으니 진실로 칭찬할 일입니다. 더구나 수군에 있으면서 2년 동안 스스로 군량을 준비해 여기저기 나누어 주면서 간신히 양식을 공급해왔는데, 그들의 부지런함과 힘든 모습은 군관들보다 곱절이나 더했습니다.… 전쟁터에서 적을 무찌를 때에는 공로가 뛰어났고, 나라를 위한 의로운 마음은 언제나 한결같았습니다. (1594년 3월 10일 장계)


승려들은 전투는 물론이고, 탁발로  자급을 위한 군량을 모았다. 또 때로는 조선 수군을 위해 화포를 만들 쇠를 탁발로 모아 바치기도 했다. 그런 공로를 이순신은 잊지 않고, 기록했다. 임금에게도 보고해 포상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순신 스스로도 직접 승려를 배려했다. 전남일보 1972년 11월 20일에 소개된 이순신이 썼다는 <완문흥국사(完文興國寺, 1593년 11월)>에 따르면, 이순신은 전남 여수 흥국사 승려들이 좌수영 소속이라며 세금을 면제케 했고, 흥국사 승려에게 공양하는 사람이나, 공양하는 승려도 세금을 면제시켰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칼과 활을 든 승려와 장수 이순신은 각자 서로 존중하며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 이순신이 종교를 떠나 참된 사람이었기에, 또 목숨을 의지할 수 있을 만큼 탁월한 리더였기에 승려들이 이순신 막하에서 종군했을 것이다.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뒤에도 승려들은 이순신을 잊지 않았다. 흥국사 승려 자운은 노량에서 쌀 600석으로 수륙제를 지내 이순신의 혼령을 위로했다. 순천 승려 옥형은 이순신이 전사한 뒤 여수 충민사에서 수십 년 동안 이순신을 추모하는 제사를 지냈다.


현재 동아대 박물관에 소장된 조선 후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순신 초상화>도 이순신 막하 승려가 그린 것이라고 한다. 사실이든 아니든, 이순신 막하 승병들이 얼마나 이순신을 존경했는지 보여주는 가장 단적인 증거가 아닐까. 종교가 문제가 아니라, 종교인이 문제인 시대다. 모두들 초심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박종평 이순신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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