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4173


곤지(昆支) 


삼국시대 백제 제11대 비류왕의 아들인 왕자.


비류왕의 아들이며, 개로왕과 문주왕의 아우이다. 『일본서기』와 이 역사서에 인용되어 있는 「백제신찬(百濟新撰)」을 근거로 동성왕과 무령왕의 아버지가 된다는 설도 있다. 개로왕 즉위 때 왕권 강화에 공헌해 458년(개로왕 4) 유송(劉宋)이 왕족을 포함한 11명의 귀족 중 최고위인 정로장군 좌현왕(征虜將軍左賢王)을 제수하였다.


좌현왕의 직책과 군군(軍君)이라는 또 다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그는 조정의 병권을 장악한 세력가였다. 461년 고구려의 남진 압박에 왜와 공동 대처하기 위한 군사 협약 관계로 일본에 건너간 이후, 가와치[河內]·지카쓰아스카[近飛鳥] 지역을 개척해 근거지로 삼았다.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 실린 가와치 아스카베노미야스코조[河內飛鳥戶造]의 선조와 가와치 아스카베노미야스코조신사[河內飛鳥戶造神社]의 제신(祭神)이 곤지인 점이나, 왜에서 여러 명의 자녀가 태어났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곤지를 선조로 하는 후예 씨족들이 지금의 가와치 아스카군[河內安宿郡] 일대에서 번성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백제인이 일본에 건너가 만든 앞트기식돌덧널[橫口式石槨]이 주종을 이루는 가와치평야 고분군의 분포에서도 입증이 된다. 곤지는 일본에서 구축한 세력 기반과 대외 교역을 통해 경제적인 부를 착실히 쌓아 갔다. 이와 같은 정치적·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훗날 곤지계인 동성왕이나 무령왕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런데 475년에 백제는 고구려군의 침공을 받아 한성이 함락되고 도읍을 웅진으로 옮기는 국가적 일대 시련을 겪게 되었다. 그러자 곤지는 급히 귀국해 내신좌평에 임명되어 왕권의 회복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웅진 초기 왕권의 약화와 정국의 불안정에 편승해 왕위를 넘보던 병관좌평(兵官佐平) 해구(解仇)에게 피살된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송서(宋書)일본서기(日本書紀)「한성말·웅진시대 백제왕위계승과 왕권의 성격」(이도학,『한국사연구』50·51합집,1985)「한성말·웅진시대 백제왕계의 검토」(이도학,『한국사연구』45,1984)

          

집필자

(1996년) 성주탁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