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2KKR_A9999_1_0005328&isEQ=true&kristalSearchArea=P, http://db.history.go.kr/url.jsp?ID=tc
http://ko.wikipedia.org/wiki/%EC%82%B0%EC%83%81%EC%99%95
산상왕(山上王)
고구려 제10대왕. 신대왕의 아들, 고국천왕의 동생
생몰 : 미상∼227년(산상왕 31).
재위 : 197∼227년.
이름 : 연우(延優), 이이모(伊夷模)
왕비는 형수였으며 즉위에 공이 많았던 제나부(堤那部, 椽那部·絶奴部?)출신의 우씨인데, 그와 우씨의 결합은 형이 죽으면 형수를 취하여 산다는 취수혼(娶嫂婚, levirate)의 구체적 실례로서 유명하다. 소후(小后)는 관노부(灌奴部) 주촌통(酒村桶)출신으로서, 209년(산상왕 13)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자교체(郊彘: 뒤의 東川王)를 낳았다.
즉위하던 해인 197년 형인 발기(發岐, 또는 拔奇)가 형이면서도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소노부(消奴部)세력과 더불어 모반하였을 뿐만 아니라, 요동지방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여 위세를 떨치고 있던 공손씨(公孫氏)의 군대까지 끌어들여 수도를 공격하자, 동생 계수(罽須)를 시켜 이를 물리쳤다. 이렇듯 발기를 도와 고구려의 분열을 조장하는 등 고구려의 성장을 저지하고자 하던 공손씨와의 긴장관계가 재위기간 계속되어, 공손씨의 영역인 현도군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또, 217년 중국 평주(平州: 요동·요서지방) 출신의 하요(夏瑤) 등 1,000여호의 투항을 받아들여 책성(栅城: 지금의 琿春)에 안치하였다고 하는데, 당시 중국에 평주라는 지방단위가 아직 설치되어 있지 않았던 만큼 여기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으나, 하요 등을 공손씨 세력권내의 주민이라 볼 경우 이를 통하여 공손씨와의 대립관계의 일면을 짐작해볼 수도 있다.
한편, 198년 환도성(丸都城: 지금의 輯安)을 쌓고 209년 이곳으로 천도하였다고 하는데, 이에 따라 고구려의 집안천도를 산상왕대의 사실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이를 부인하는 견해도 있다.
227년 5월에 죽어 산상릉(山上陵)에 장사하였다. 〈徐永大〉
《삼국사기》 권16 고구려본기 제4에 수록되어 전하는 〈산상왕설화〉는 정사(正史)의 산상왕에 대한 기록 속에 포함되어 있는데, 즉위설화(卽位說話)와 후사설화(後嗣說話)로 나누어진다. 즉위설화는 산상왕의 왕위획득에 따르는 왕실 내의 정치적 갈등을, 후사설화는 왕후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주통촌(酒桶村)의 미녀와 관계하여 후사를 얻는 과정을 각각 보여주고 있다. 이 두 설화는 고구려 초기 왕위와 후사를 둘러싼 왕실의 이야기가 후대에 전승되면서 설화화한 것이다.
http://ko.wikipedia.org/wiki/%EC%82%B0%EC%83%81%EC%99%95
산상왕(山上王)
고구려 제10대왕. 신대왕의 아들, 고국천왕의 동생
생몰 : 미상∼227년(산상왕 31).
재위 : 197∼227년.
이름 : 연우(延優), 이이모(伊夷模)
197년 음5월 [산상왕 1년 5월] 고국천왕 죽음, 산상왕 즉위함.
197년 [산상왕 1년] 산상왕, 고국천왕의 왕비 우씨(于氏)를 왕후로 삼음
198년 음2월 [산상왕 2년 2월] 환도성(丸都城) 쌓음.
200년 음9월 10일 [중애천황 9년 9월 10일] 신라정벌
203년 음7월 [산상왕 7년 8월] 국상(國相) 을파소(乙巴素) 죽음
208년 음11월 [산상왕 12년 11월] 교제(郊祭)에 쓸 돼지가 달아나자 쫓아 주통촌
209년 음9월 [산상왕 13년 9월] 주통촌(酒桶村)의 여자 사이에 동천왕을 낳음.
209년 음10월 [산상왕 13년 10월] 도읍을 환도(丸都)로 옮김.
213년 음1월 [산상왕 17년 1월] 교체(郊彘)를 왕태자로 삼음.
217년 음8월 [산상왕 21년 8월] 후한(後漢) 평주(平州)사람 하요(夏瑤) 등
217년 음10월 [산상왕 21년 10월] 혜성 나타남.
219년 음2월 [산상왕 23년 2월] 그믐, 일식.
224년 [산상왕 28년] 왕의 손자 연불(然弗)이 태어남.
227년 음5월 [산상왕 31년 5월 : 동천왕 1년] 산상왕 죽음, 동천왕 즉위함.
《삼국사기》에는 일명 위궁(位宮)이라 한다고 하였으나, 이는 산상왕의 아들인 동천왕의 일명이므로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신대왕의 아들이며 고국천왕의 동생인 그는 고국천왕이 후사 없이 죽자 고국천왕의 왕비 우씨(于氏)를 비롯한 귀족세력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다.왕비는 형수였으며 즉위에 공이 많았던 제나부(堤那部, 椽那部·絶奴部?)출신의 우씨인데, 그와 우씨의 결합은 형이 죽으면 형수를 취하여 산다는 취수혼(娶嫂婚, levirate)의 구체적 실례로서 유명하다. 소후(小后)는 관노부(灌奴部) 주촌통(酒村桶)출신으로서, 209년(산상왕 13)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자교체(郊彘: 뒤의 東川王)를 낳았다.
즉위하던 해인 197년 형인 발기(發岐, 또는 拔奇)가 형이면서도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소노부(消奴部)세력과 더불어 모반하였을 뿐만 아니라, 요동지방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여 위세를 떨치고 있던 공손씨(公孫氏)의 군대까지 끌어들여 수도를 공격하자, 동생 계수(罽須)를 시켜 이를 물리쳤다. 이렇듯 발기를 도와 고구려의 분열을 조장하는 등 고구려의 성장을 저지하고자 하던 공손씨와의 긴장관계가 재위기간 계속되어, 공손씨의 영역인 현도군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또, 217년 중국 평주(平州: 요동·요서지방) 출신의 하요(夏瑤) 등 1,000여호의 투항을 받아들여 책성(栅城: 지금의 琿春)에 안치하였다고 하는데, 당시 중국에 평주라는 지방단위가 아직 설치되어 있지 않았던 만큼 여기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으나, 하요 등을 공손씨 세력권내의 주민이라 볼 경우 이를 통하여 공손씨와의 대립관계의 일면을 짐작해볼 수도 있다.
한편, 198년 환도성(丸都城: 지금의 輯安)을 쌓고 209년 이곳으로 천도하였다고 하는데, 이에 따라 고구려의 집안천도를 산상왕대의 사실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이를 부인하는 견해도 있다.
227년 5월에 죽어 산상릉(山上陵)에 장사하였다. 〈徐永大〉
《삼국사기》 권16 고구려본기 제4에 수록되어 전하는 〈산상왕설화〉는 정사(正史)의 산상왕에 대한 기록 속에 포함되어 있는데, 즉위설화(卽位說話)와 후사설화(後嗣說話)로 나누어진다. 즉위설화는 산상왕의 왕위획득에 따르는 왕실 내의 정치적 갈등을, 후사설화는 왕후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주통촌(酒桶村)의 미녀와 관계하여 후사를 얻는 과정을 각각 보여주고 있다. 이 두 설화는 고구려 초기 왕위와 후사를 둘러싼 왕실의 이야기가 후대에 전승되면서 설화화한 것이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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