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1.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
1) 한국독립당의 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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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중경(重庆/重慶)에 정착하면서 정부의 조직과 체제를 정비하는 한편, 한국광복군을 창설하며 전시태세를 갖추어 나갔다. 1932년 상해를 떠난 이래 임시정부는 중국대륙 각지로 소재지를 옮겨다녀야 했다. 특히 중일전쟁 이후에는 피난길이나 다름없었다. 임시정부가 전란으로부터 비교적 안정된 지역에 정착한 곳이 중경이었다. 중경은 당시 중국 국민당정부의 임시수도였다. 이곳에 정착하면서 임시정부는 조직과 체제를 정비하기 시작하였다.
임시정부가 서둘러 추진하였던 대표적인 사업의 하나는 민족주의 세력을 통일하여 한국독립당을 창당한 일이다. 1930년대 중반 이후 민족주의 세력은 크게 3당으로 나뉘어 있었다. 김구(金九)의 한국국민당, 조소앙(趙素昻)·홍진(洪震) 등이 주도하고 있던 한국독립당(재건), 이청천(李靑天)·최동오(崔東旿) 등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던 인사들이 중심을 이룬 조선혁명당이 그것이다. 이들 3당은 1937년 8월 임시정부를 옹호, 유지한다는 전제하에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여 연합을 이루고 있었지만, 각기 독자적인 조직과 세력을 유지하며 활동하고 있었다.897)
임시정부는 이들 3당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3당 사이에 통합에 대한 문제는 이미 장샤/장사(長沙/长沙)에 있을 때 논의된 적이 있었다. 1938년 5월 난무팅/남목청에서 3당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통합을 위한 회의가 개최된 것이다. 그러나 조선혁명당 당원인 이운환(李雲煥)이 회의장에 들어와 김구·이청천·현익철(玄益哲) 등을 권총으로 저격한 이른바 장사사건(長沙事件)이 발생하면서,898) 3당 통합을 위한 시도는 중단되고 말았다.
* 난무팅/남목청(楠木厅/楠木廳)
중단되었던 3당 통합이 다시 추진된 것은 기강에서 개최된 7당 통일회의가 결렬된 후였다. 7당 통일회의는 좌우익 독립운동 세력들이 1939년 치장/기강(綦江)에 집결하게 되면서, 우익진영의 3당과 좌익진영의 4당 사이에 개최된 통일운동이었다. 1939년 5월 김구와 김원봉(金元鳳)이<동지동포(同志同胞)에게 보내는 공개신(公開信)>을 통해, 좌우익진영의 정당·단체들을 해소하고 단일당(單一黨)을 조직할 것에 합의하였다.899) 이에 따라 8월 27일부터 좌우익 진영의 7개 정당·단체의 대표가 참석하여 통일회의를 개최한 것이다. 그러나 통일의 방법과 독립운동 최고기구 문제, 즉 임시정부냐 아니면 새로이 결성될 단일당을 최고기구로 할 것이냐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대립,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좌우익 세력의 통일운동이 결렬되자, 임시정부는 우익진영 3당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3당의 통합분위기는 어느 정도 성숙되어 있었다. 7당 통일회의가 결렬된 직후인 1939년 10월 2일 3당은 대표를 선정하여 통합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한국국민당의 조완구(趙琬九)·김붕준(金朋濬)·엄항섭(嚴恒燮), 재건한국독립당의 홍진·조소앙·조시원(趙時元), 조선혁명당의 이청천·최동오·안훈(安勳) 등이 대표로 참가한 가운데, 기강에서 광복진선원동3당통일대표회의(光復陣線遠東三黨統一代表會議)를 개최한 것이다.900)
임시정부는 3당 통합에 대해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었다. 1939년 11월 국무회의에서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한다는 방침하에 이를 위한 구체적 계획으로<독립운동방략(獨立運動方略)>을 발표하면서, 3당 통합에 대한 기대와 통합의 연내 실현을 다음과 같이 촉구하고 있다.
광복진선 소속단체는 대한민국의 기본세력이 되어 있고 수3년래로 통일운동을 위시하여 일체 행동에 분투하여 왔으므로 자당(自黨)을 해소하고 신당(新黨)을 창립함에 하등 지절(支節)이 없을 뿐만 아니라, 3당의 대립국면(對立局面)을 통일국면(統一局面)으로 전환하게 함은 당(黨)·정(政)·군(軍)·외(外)·선(宣)·재(財) 등 각종 활동에 중대한 영향을 줄 것이므로 임시정부는 있는 역량을 기울여 금년 이내로 3당 통일의 숙제를 해결하도록 할 것이며 … (삼균학회/三均學會,≪소앙선생문집(素昻先生文集)≫상, 횃불사, 1979, 136쪽;김정명(金正明),≪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2, 1967, 700쪽).
* 지절(支節) : 중요하지 않은 일, 지엽적인 일
3당의 통합이 임시정부가 향후 추진해 나갈 독립운동 전반에 걸쳐 중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3당이 연내에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임시정부는 3당 통합의지를 강력하게 표명하였지만, 3당 통합은 연내에 실현되지 못하였다.
3당 통합을 위한 대표회의는 해를 넘겨, 1940년에 들어와 다시 개최되었다. 1940년 3월 24일 3당의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3당 통합을 위한 제2차 대표대회가 소집된 것이다. 이 회의는 5월 8일까지 계속되었고, 여기서 당명은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으로, 그리고 당의(黨義)·당강(黨綱)·당책(黨策)·당헌(黨憲) 등에 대한 합의를 이루었다. 신당창립에 필요한 준비가 완료되면서, 5월 8일 3당의 해체와 신당의 창립을 알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3당해체선언>을 발표하였다.
신당(新黨)의 전신(前身)이었던 3당은 이제부터 다시 존재할 조건이 소멸되었을 뿐 아니라 각기 解消될 것을 전제로 하고 신당 창립에 착수하였다. 과거 3당의 모든 사업과 혁혁한 역사를 이로 쫒아 신당이 완전히 계승회합(繼承匯合)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당은 보다 큰 권위와 보다 많은 인원, 보다 광대한 성세(聲勢), 보다 고급적(高級的) 지위를 가지고 우리 독립운동을 보다 유력하게 추진케 할 것을 확실히 믿고 바라며 3당 자신은 이에 해소를 선언한다(삼균학회,<삼당해체선언(三黨解體宣言)>,≪소앙선생문집(素昻先生文集)≫상, 264쪽).
* 회합(匯合) : 합치다, 모으다
* 성세(聲勢) : 명성과 위세
3당을 완전히 해체하고, 신당을 창당한다는 것이었다. 3당의 세력들이 신당에 결집됨으로써 신당은 큰 권위, 많은 인원, 광대한 성세, 고급적 지위를 갖게 되었고, 이를 배경으로 보다 유력한 독립운동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였다.
우익세력 3당의 통합과 신당의 창당이 선언되었다. 5월 9일 한국독립당 창당대회를 개최하고,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3당의 과거 조직을 공동 해소하고 통일을 이룬 새로운 한국독립당을 창당한다”는 내용의<한국독립당창립선언(韓國獨立黨創立宣言)>을 발표한 것이다.901) 이로써 우익진영 3당의 세력이 통일을 이룬 새로운 한국독립당이 창당되었다. 당의 조직은 중앙집행위원장제를 채택하였고, 다음과 같은 간부를 선출하여 당의 조직을 갖추었다.
중앙집행위원장:김구(金九)
중앙집행위원:홍진(洪震)·조소앙(趙素昻)·조시원(趙時元)·이청천(李靑天)·김학규(金學奎)·유동열(柳東說)·안훈(安勳)·송병조(宋秉祚)·엄항섭(嚴恒燮)·김붕준(金朋濬)·양묵(楊墨)·조성환(曺成煥)·차리석(車利錫)·이복원(李復源)
중앙감찰위원장:이동녕(李東寧)
중앙감찰위원:이시영(李始榮)·공진원(公震遠)·김의한(金毅漢)
(김구/金九 저, 도진순 주해,≪백범일지≫, 돌베개, 1997, 381쪽).
한국독립당이 창당되면서 우익세력의 통일이 이루어졌고, 또한 임시정부로 결집하게 되었다.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의 여당으로서 임시정부를 옹호, 유지하는 기초세력이었던 것이다. 이로써 1930년대 중반 이래 한국국민당을 기초세력으로 유지, 운영되었던 임시정부는 한국독립당(재건)과 조선혁명당 세력을 결집시켜 보다 확대된 세력기반을 갖게 되었다.
주
897) 한시준(韓詩俊),<중경한국독립당(重慶韓國獨立黨)의 성립배경 및 과정>(≪윤병석교수화갑기념(尹炳奭敎授華甲紀念) 한국근대사논총(韓國近代史論叢)≫, 지식산업사, 1990), 954쪽.
89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4(1975), 682∼683쪽.
899) 대한매일신보사,≪백범김국전집(白凡金九全集)≫6(1999), 25∼40쪽.
900)<광복진선원동3당통일대표회의경과대략(光復陣線遠東三黨統一代表會議經過大略)>(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한국독립운동사자료(韓國獨立運動史資料)≫조소앙 편/趙素昻篇 4, 1997), 15∼30쪽.
901) 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자료(資料) 3(1968), 404∼406쪽.
추헌수(秋憲樹),≪자료한국독립운동(資料韓國獨立運動)≫2(연세대 출판부, 1972), 136∼1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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