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민독립당(韓民獨立黨)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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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과 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중국군민구국군(中國國民救國軍)의 연합 항일
조선혁명군이 요녕민중자위군과 연합전선을 묶어 요녕성 동변도지구에서 혈전을 벌일 때 조선민족주의자로서 다른 한 비교적 큰 독립운동단체인 한국독립당이 영도하는 한국독립군도 길림·흑룡강 두성의 동부지구(즉 소위 동만과 북만의 부분지구임)에서 점차적으로 각 해당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항일부대, 주요하게는 이두(李杜) 註 044 등이 이끄는 길림성자위군(吉林自衛軍)註 045과 왕더린/왕덕림(王德林)註 046을 총사령으로 하는 중국국민구국군과 연합전선을 묶고 공동히 왜놈을 무찔러 사람들이 주목할 만한 전과를 거두었다.
1. 한민독립당(韓民獨立黨)의 활동
원 길림성 동부의 송화강유역, 목단강유역, 연변지구, 중동로 합수선연선과 흑룡강성의 칭청/경성(庆城/慶城), 동싱/동흥(东兴/東興), 바옌/바언(巴彥), 통허/통하(通河) 등 지구는 조선교민이 비교적 많은 지구로서 조선민족주의자들은 이런 지구에 각양각색의 독립운동단체를 건립하였는데 9·18 사변 전야까지 세력이 가장 큰 것이 한국독립당이었다. 이 당은 1930년 7월에 한족(韓族)총연합회의 기초위에서 건립된 것인데 중앙위원회 위원장은 홍진(洪震)註 047이고 신숙(申肅), 남대관(南大觀), 안훈(安勛), 이청천(李靑天)註 048 등이 영도골간이었다. 한국독립당은 일정한 수량의 무장을 갖추고 있었으며 한국독립군이라 불렸으며 총사령은 이청천이고 아래에 26개 군구를 두었다. 하지만 이들은 당시 주요로는 일본과 중국 군경들을 대처하였을 뿐 귀국하여 전투를 벌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 중동로 = 중동선(中東線) = 중국동방철도 = 동청철도 = 북만주지역 만주횡단철도
* 중동로 = 중동선(中東線) = 중국동방철도 = 동청철도 = 북만주지역 만주횡단철도
한비(韓備) 및 독립운동단체들이 길림성 경내에서의 생활안정과 활동편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한국독립당인은 길림성정부 주석이며 동북변방군 길림주둔군 부사령인 장쭤샹/장조상(张作相/張作相)과 비밀협상을 진행하고 한교(韓僑)관리국과 한교(韓僑)자치연합회를 성립하는 등 협의를 달성하였다. 그러나 상술한 협의를 미처 실시하기 전에 9·18 사변이 폭발하였다.
* 한비(韓備) ?
* 한교(韓僑) : 중국의 교민
사변이 폭발한 후 한국독립당은 중일관계가 급격히 악화됨에 따라 길림성 정부와 한교(韓僑)항일역량이 진일보 합작하여 공동히 항일하는 가능성이 곧 현실로 되리라 인식하고 길림성군정 양서(吉林省軍政 兩署)에 대표를 파견하여 쟝쭤샹/장작상 주석註 049을 만날 것을 요구하였다. 만약 연합항일한다면 성소재지를 보위함에서 한국독립군은 선구적 역할을 할 것이라 표시하였으며註 050 항일을 위해 무기를 해결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때 장쭤샹/장작상은 아버지의 상사(喪事)를 치르기 위해 진현/금현(锦县/錦縣)에 가고 없고 군서참모장(軍署參謀長)인 시챠/희협(熙冾)註 051이란 사람이 사무를 대체하여 보았다. 시챠(熙冾)은 친일파 인물로서 일본군 제2사단장 다몬 지로(多門二郞) 중장과 사생(師生)간이었다. 당시 한창 일본군과 ‛평화적으로 길림문제를 해결’할 것을 임양(臨釀)하고 있던 시챠(熙冾)은 한국독립당 대표가 만나볼 것을 요구했을 때 겉으로는 환영하는 체 하면서 암암리에는 사람을 장춘(张春/長春)에 파견하여 다몬 지로(多門二郞)을 영접하게 하였다. 9월 21일 다몬(多門)은 군대를 거느리고 길림에 당도하여 항일분자와 한국독립당인을 대대적으로 체포하였다. 다몬(多門)은 또 공안국(公安局)에 군대를 파견하여 공안국에서 함께 체포활동에 참가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시기의 대부분 애국관원들은 한교(韓僑)의 항일활동을 동정하고 있기에 재빨리 일본군대가 입성한 소식을 한국독립당 대표에게 알려 그들이 급속히 이곳을 떠나도록 권하였다. 그러나 성성(省城)은 이미 계엄(戒嚴)되고 빠져나가기 곤란하였다. 이때 성서(省署)비서장인 왕바오샨/왕보선(王宝善/王寶善) 등이 비밀리 한국독립당 대표에게 호조(護照)를 발급하여, 그들로 하여금 분장하여 철거하도록 하였는데, 이와 같이 애국인사들의 방조밑에 72명 한인이 안전히 위험에서 벗어났다.註 052
* 사생(師生) : 스승과 제자
* 임양(臨釀) : 임할 림(임), 술 빚을 양 (양조하다)
* 호조(護照) : 여행권
시챠(熙冾)이 승냥이를 끌어들인 후 길림성의 항일파와 투항파는 계선(界線)이 날로 분명하여졌다. 9월 26일, 일본인들의 조종하에 위(僞)길림성 장관공서(長官公署)가 성립되었다. 이어 지장/길장진(吉长镇/吉長鎭) 수사(守使) 리꾸이린/이계림(李桂林), 옌지/연길진(延吉镇/延吉鎭) 수사(守使) 지싱/길흥(吉兴/吉興), 환닝/완녕진(缓宁镇/緩寧鎭) 수사(守使) 자오즈샹/조지향(赵芷香/趙芷香) 등이 일본인들에게 붙었다. 하지만 이란/의란진(依兰镇/依蘭鎭) 수사(守使) 리두(李杜), 길림군서 위대단(衛隊團) 단장 등은 시챠(熙冾)을 위수로 하는 위정부(僞政府)를 반대한다고 선포하고 군대를 이끌고 항일할 준비를 하였다. 11월 12일 애국인사 청윈/성윤(诚允/誠允)註 053 등은 쟝쭤샹/장작상의 위탁을 받고 빈현(宾县/賓縣)에 항일하는 길림성정부를 세웠다. 이와 같이 길림성 경내에 서로 대치되는 두 정권이 세워졌다. 청윈/성윤을 지지하는 항일무장과 시챠(熙冾)이 긁어모은 한간무장(漢奸武裝)사이에는 길림 각지에서 격렬하게 싸웠다.
* 위(僞) 비합법적인, 괴뢰의
1931년 11월 12일(음력 10월 초 3일), 한국독립당인 300여 명은 아청/아성현(阿城县/阿城縣) 3구 샤오스/소석하(小石河)에서 집회를 가지고 한국시조 단군(檀君)의 탄신을 기념하였다. 회의참가자들은 선조들의 개국업적을 회고하는 한편 오늘날의 망국의 처지를 생각하며 비분에 차넘쳤다. 여기저기서 울음소리들이 들렸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중국관병 600여 명이 들이닥쳐 회장(會場)을 포위하였다. 그들은 독립당인들을 일본군의 선견대(先遣隊)라고 하며 불문곡직하고 매질을 하였다. 후에 다행히 당지 백성들이 변호해 나서는 바람에 크게 중상을 입은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당본부의 중요한 문건과 기타 모든 것을 몰수당하였다.註 054
* 선견대(先遣隊) : 본대, 주력부대에 앞서 파견하는 부대
회장을 포위한 관병들은 원래 28려 딩차오/정초(丁超)의 부하들이었는데 일본인들의 이간에 넘어가 진상을 모르고 그러한 행동을 하였던 것이다. 이 일을 갓 성립된 빈현 성윈/성윤정부에서 알게 되었다. 그들은 즉시 아청/아성현정부 및 공안국에 지시를 내려 한국항일동지들에게 사과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되어 일장풍파는 가라앉게 되었다.
그런데 그후 또 한국독립당인 이충형(李忠炯)이 중동루 얼다오허즈/중동로 이도하자(中东路/中東路 二道河子)역전에서 28려 관병들에게 붙들린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씨의 몸에서 사변발생 전에 시챠(熙冾) 등과 협상한 문건이 나오자 그들은 이씨가 일본인과 내통한다고 단정한 것이었다. 비록 독립군의 증명과 서함을 제시해도 무효로 여기고 이로하여 한국독립군의 많은 군구(軍區)의 무기들이 해제당했으며 이충형은 빈저우/빈주(滨州/賓州)로 압송되갔다. 감옥에 갇힌 이씨는 불복하여 청윈/성윤주석에게 편지를 써 한국독립군의 항일의 뜻을 진술한 후 오해를 해거할 것을 요구하였다. 청윈/성윤은 편지를 본후 인차 한국독립군 이청천 총사령과 신숙 참모장을 불러 합작항일의 대계를 상담하였다. 이번 상담은 사변 이후 중한항일군대 영도자들간의 첫번째 정식 연락이었다. 이때가 1931년 12월 상순이었다.
* 인차 : 바로
빈저우/빈주상담 이후 이청천은 아청(阿城), 우창/오상(五常), 슈란/서란(舒兰/舒蘭) 등지로 가서 당인들과 연락을 짓고 항일준비를 하였다. 신숙은 닝안/영안(宁安/寧安)으로 갔다. 그때 각지에 널려있던 한국독립군들은 교통장애로 일시 집중하지 못해 위의 정황을 아래로 전달할 수 없었다. 각 군구의 무기는 대부분 토비(土匪)나 중국항일군들이 걷어가버려 항일하려는 마음뿐 어떻게 해볼래야 방법이 없었다.
* 토비(土匪) : 지방에서 일어나는 도둑떼
이청천 등이 중한상담의 결의를 각지에 전달하자 가문날의 단비처럼 합작 항일의 형세가 신속히 발전하였다. 12월 12일, 한국독립군 참모 이우정(李宇精)은 옌쇼/연수현(延寿县/延壽縣) 3구 순관(巡官) 위안송성/원송성(袁松声/袁松聲)의 방조로 당인들과 연락을 맺고 한 항일대오를 조직하였다. 같은달 17일, 한국독립군 대대장 오광선(吳光善)註 055은 이청천의 위탁을 받고 닝안/영안현 모지(某地)에서 한국독립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만호(晚湖) 홍진(洪震)을 만나 빈저우/빈주상담과, 랴오예/로야령(老爷岭/老爺嶺) 이동(以東)지구 한국독립군의 활동정황을 보고하였다. 이무럽 신숙도 홍진(洪震)을 만났다. 홍씨는 보고를 들은 후에 말하기를 “지금이야 말로 우리 활동하는 시기가 왔다”註 056고 하였다. 인차 중한항일군합작을 촉진하기 위한 4가지 조치를 확정하였다.註 057 그런 후 1932년 1월 28일, 닝안/영안현 한국독립당 당부와 항일군 류완퀘이/유만귀(刘万魁/劉萬魁) 부대가 합작할 것을 지시하고 이청천 등은 펑잔하이/풍점해(冯占海/馮占海), 양야오쥔/양요균(杨耀钧/楊耀鈞) 등 항일군과 합작하도록 지시하여 항일국면을 발전하도록 하였다. 한국독립군 총사령 이청천은 부대를 정돈개편하여 로야령을 계선으로 로야령 서쪽 각 군구를 제1대대로 하고 대대장에 오광선을 임명 하였으며, 랴오예/로야령 동쪽 각 군구를 제2대대로 하고 미샨/밀산현(密山县/密山縣)의 오상세(吳相世)를 대대장으로 임명하였다. 그후 제3, 제4, 제5대대가 육속 생겼는데, 신철(申澈), 지상기(池相奇), 전북빈(全北賓) 등이 대대장을 담임하였다. 각 대대는 근처에 있는 중국항일부대와 연합작전할 것을 지시하였다. 연합항일을 추동(推動)하기 위하여 이청천 등은 1월에 우창/오상현(五常县/五常縣) 샤오샨즈/소산자(小山子) 부근에서 ‘민족해방운동전위동지회(民族解放運動前衛同志會)’를 조직하였으며 30명 골간회원들이 3월부터 슈란/서란현 샤오청즈/소성자(小城子) 여(呂)씨네 집에서 회의를 하였다. 회의에서 이청천을 군사위원장으로 선거하였으며 펑잔하이/풍점해한테서 모젤권총 60자루를 빌려 3개 편의대(便衣隊)를 조직하기로 하였다.註 058
주
註) 044 : 리두(李杜)(1880∼1956), 자(字) 즈추/식초(植初), 랴오닝 이현/의현인(辽宁义县人/遼寧義縣人).
註) 045 : 리두(李杜)·딩차오(丁超) 연계항일후, 원래 딩차오(丁超)는 소속부대 28여(旅)를 자오이/조의(赵毅/趙毅) 등의 호로군(護路軍)과 함께 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에 가입했다. 딩차오(丁超)가 비록 호로군 총사령(護路軍 總司令)이었으나 이것은 당시 이름뿐이었다.
註) 046 : 왕더린/왕덕림(王德林)(1874∼1938), 원명은 왕린/왕림(王林), 자(字) 휘민/혜민(惠民), 산동성(上东省/山東省) 이난/기남현인(沂南县人/沂南縣人).
註) 047 : 홍진(洪震)(1878∼?), 호 만호(號 晚湖), 또한 만오(晚悟)라고도 한다. 충청도(忠淸道) 사람이다.
註) 048 : 이청천(李靑天)(1888∼?), 자 백산(字 白山), 원래 성은 지(池), 조적(祖籍)은 중국 저장성/절강성(浙江省)이나 그의 출생지는 서울(한성/漢城)이다.
* 조적(祖籍) : 본적, 원적
註) 049 : 장쭤샹/장작상(张作相/張作相)(1877∼1949), 자 푸천/보신(字 辅臣/輔臣), 랴오닝 이현/의현인(辽宁义县人/遼寧義縣人).
註) 050 : 《리얀티얀/리안천담화기록(李雁天談話記録)》(1981년 3월).
註) 051 : 시챠(熙冾)(1884∼1952), 자 거민/격민(字 格民), 랴오닝랴오양/요녕요양인(辽宁辽阳人/遼寧遼陽人), 만족(滿族).
註) 052 : 〈한국독립군여중국의용군연합항일기실(韓國獨立軍與中國義勇軍聯合抗日紀實)〉(《중화잡지(中華雜志)》 제1권 제4기, 1934.4.15).
註) 053 : 청윈/성윤(诚允/誠允)(1881∼1944), 자 즈종/집중(字 執中), 랴오닝랴오양/요녕요양인(辽宁辽阳人/遼寧遼陽人).
註) 054 : 위와 같음.
註) 055 : 오광선(吳光善), 일작 오광선(一作 吳光鮮).
註) 056 : 위와 같음.
註) 057 : 박영석(朴永錫), 《독립운동(獨立運動)의 발자취》(탐구당/探求堂, 1990.4) p. 130.
註) 058 : 천줴/진각(陈觉/陳覺), 《구일팔후국난통사(‘九一八’後國難痛史)》 상(上)책, 제252항(요녕교육출판사(遼寧敎育出版社), 19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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