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아래
* 내용이 짧고 비슷한지라 문서 네개를 하나로 합쳤습니다. 
 
황금서당, 적금서당, 벽금서당, 흑금서당
집필자 : 이기동
 
 
황금서당 (黃衿誓幢) - 민족문화대백과
 
통일기에 왕경(王京)을 지키는 핵심적 군단인 이른바 9서당(九誓幢)의 한 부대로 683년(신문왕 3)에 고구려사람으로써만 편성하였다. 고구려 멸망 직전 신라에 투항한 사람과 평양성 함락 때 신라군의 포로가 된 사람들이 주체를 이루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금(衿)의 빛깔은 황적(黃赤)이다. 
 
 
벽금서당 (碧衿誓幢) - 민족문화대백과
 
통일기 왕경(王京)을 지키는 핵심적 군단인 이른바 구서당(九誓幢)의 한 부대로, 686년(신문왕 6)에 적금서당(赤衿誓幢)과 함께 보덕성(報德城:전북특별자치도 익산 소재)의 고구려 유민으로써 편성되었다.
 
이들은 고구려 멸망 후 신라에 의해서 보덕왕(報德王)에 봉해진 부흥운동군의 수령 안승(安勝)을 따라서 금마저(金馬渚)에서 집단으로 거주하다가 675년(문무왕 15) 11월안승의 족자(族子)인 장군 대문(大文)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로 돌아간 뒤에 남쪽 주군(州郡)에 옮겨 살았는데, 10년 뒤인 686년에 구서당에 편입되었다.
 
옷깃[衿]의 빛깔은 벽황(碧黃)색이다.
 
 
적금서당 (赤衿誓幢) - 민족문화대백과
 
통일기 왕경(王京)을 지키는 핵심적 군대인 이른바 9서당(九誓幢)의 한 부대로, 686년(신문왕 6)에 벽금서당(碧衿誓幢)과 함께 보덕성(報德城 : 지금의 익산 소재)의 고구려 유민으로써 편성하였다.
 
이들은 고구려 멸망 이후 신라에 의하여 보덕왕(報德王)에 봉하여진 부흥운동군의 우두머리 안승(安勝)을 따라서 금마저(金馬渚)에서 집단으로 거주하였다. 이후 684년 11월 안승의 족자(族子)인 장군 대문(大文)이 일으킨 반란이 실패로 돌아간 뒤에 남쪽 주군(州郡)에 옮겨 살았는데, 2년 뒤인 686년 9서당에 편입되었다.
 
금(衿)의 빛깔은 적흑(赤黑)이었다. 
 
 
흑금서당 (黑衿誓幢) - 민족문화대백과
 
통일기에 왕경(王京)을 지키는 핵심적 군단인 이른바 9서당(九誓幢)의 한 부대로 683년(신문왕 3)에 말갈사람으로 편성하였다.
 
금(衿)의 빛깔은 흑적(黑赤)이다. 
 
 
구서당 - 민족문화대백과
* 위 문서들 끝에 공통적으로 수록
 
통일신라시대의 군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군부대.
 
소속군관으로서는 최고지휘관인 장군 2인을 비롯하여 대관대감(大官大監) 4인, 대대감(隊大監) 5인(그 중 보병을 지휘하는 자가 2인, 기병을 지휘하는 자가 3인), 제감(弟監) 4인, 감사지(監舍知) 1인, 소감(少監) 23인(그 중 보병을 지휘하는 자가 4인, 기병을 지휘하는 자가 6인, 나머지는 알 수 없음), 대척(大尺) 23인(그 중 10인은 대관에 속하고, 보병을 지휘하는 자가 4인, 기병을 지휘하는 자가 6인, 나머지는 알 수 없음), 군사당주(軍師幢主) 1인, 대장척당주(大匠尺幢主) 1인, 보기당주(步騎幢主) 4인, 착금기당주(著衿騎幢主) 18인, 흑의장창말보당주(黑衣長槍末步幢主) 20인, 군사감(軍師監) 2인, 대장대감(大匠大監) 1인, 보기감(步騎監) 4인, 착금감(著衿監) 18인을 두었다. →구서당
 
 
참고문헌
 
『삼국사기』
「한국의 전통사회와 병제」(이기백, 『한국학보』 6, 1977)
「신라당정고(新羅幢停考)」(쓰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 『신라사의제문제(新羅史の諸問題)』, 도요문고東洋文庫, 1954)
「신라병제고(新羅兵制考)」(이노우에 히데오/井上秀雄, 『신라사기초연구(新羅史基礎硏究)』, 동출판/東出版, 1974)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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