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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김일성 사망설과 2020년 김정은 사망설
[미디어오늘 사설]
미디어오늘 news@mediatoday.co.kr 승인 2020.05.04 20:17
1986년 11월 16일. 조선일보는 “김일성 피살설”이라는 제목의 1면 단신 기사(10판)를 통해 “북한 김일성이 암살되었다는 소문이 15일 나돌아 동경 외교가를 한동안 긴장시켰다”고 보도했다. 다음날 16일 조선일보는 호외를 내어 ‘피살설’을 사망이라고 공식화했다. 호외 보도 첫 문장은 “북괴 김일성이 총맞아 피살됐거나 심각한 사고가 발생, 그의 사망이 확실시된다”였다.
조선일보의 표현대로라면 ‘전세계적 특종’이었다. 김일성 사망설 보도의 근거는 휴전선 이북에서 ‘김일성이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는 대남방송을 했다는 것, 여당의 관계자와 정부 소식통이 사망설 근거를 제기했다는 것 등이었다. 국방부 대변인이 대남방송 사실을 확인시켜주면서 조선일보 보도는 힘을 얻는 듯했다.
그런데 북한 보도기관에서 공식발표 혹은 논평을 하지 않았다는 점, 취소됐다던 몽고 국가주석 바트문흐가 북한을 정상적으로 방문하기로 했다는 점, 몽고 국가주석 북한 방문환영행사 연습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 북경주재 북한대사관이 김일성 사망설에 대해 “전혀 사실 무근”이라고 밝혔다는 점, 북경 유럽 소식통들이 일제히 평양 상황은 정상적이며 긴장 조짐이 없다고 한 점 등 사망설에 이상징후가 나왔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자사의 보도가 ‘특종’이 맞다고 우겼다. 조선은 “본사 김윤곤 특파원은 일본 정보 소식통으로부터 김이 피살된 것 같다는 첩보를 입수, 이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여러 중상이 나타나 이를 긴급 본사에 송고, 세계적인 특종을 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김윤곤 특파원은 ‘김일성의 죽음’이라는 취재 후기 형식의 글에서 16일 일요일 김일성 피살설을 뒷받침한 조짐들이 있었지만 “소문을 확인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스스로 소문을 기사화했다는 걸 시인한 것이다.
조선일보 보도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17일 일본 마이니치 신문을 시작으로 일본 언론이 조선일보 기사를 인용 보도했고, AP통신, UPI통신, 로이터통신, 일본 지지통신 등 통신사도 급전을 때렸다. 조선은 “세계주요지도자들이 사망했을 때 권위있는 신문이나 통신이 공식발표보다 앞질러 보도하는 특종의 경우가 자주 있다”고 자사 보도를 강조했다.
피살설이 공식화되자 북의 조그마한 움직임이라도 상상의 영역이 됐다. 15일 북경주재 평양대사관 건물이 밤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는 것은 “평양정권에 모종의 중대사태가 발생했다는 추측”을 낳았고, 외국 정상들의 방북은 “조문사절의 방북 준비”가 됐다. 정부 소식통 말이라며 “미확인 첩보에 의하면 김일성은 폭탄을 맞아 사망했으며 김정일은 부상한 것으로 전해졌다”라는 내용까지 기사화했다.
▲ 20일만에 공식행사에 모습을 드러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연합뉴스
전세계적 특종이 희대의 오보로 밝혀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72시간이 되지 않았다. 18일 북한 중앙통신은 “김일성 동지가 평양공항에서 몽고인민공화국 국가주석 바트문흐 동지를 따뜻이 영접했다”고 하자, 조선은 “김일성은 살아있었다”고 보도했다. 전세계적으로 망신을 당한 오보였지만 조선은 자신의 보도를 정당화했다. 전문가를 인용해 고도의 대남 심리전에 속았다는 보도를 내놨고, 나아가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이고 가부장적인 국가에서 김일성의 죽음은 어차피 공식 발표가 아닌 비정상적인 정보를 통해 나올 수밖에 없다는 세계언론의 경험적인 판단”이라거나 “동족살상의 전쟁을 일으켰던 장본인이 피격되었다는 것을 어느 나라 신문이나 TV가 우리보다 크게 다룰 수 있을 것인가”라고 항변했다.
조선이 사과 모양새를 취한 것은 닷새가 흐른 11월 20일이었다. 조선은 “동경에서 들어온 김일성 피살설을 일본의 언론이 왜 먼저 보도하지 않았는가. 휴전선 일부 지역에서 흘러나오는 김일성 사망설에 대해 평양에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이었나”라며 “이런 초보적인 의문들에 대해 우리 정부 당국이나 언론이 부주의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솔직히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1986년 김일성 사망설은 2020년 김정은 사망설로 재현됐다. 우리 언론은 여전히 ‘초보적인 의문’을 품지 않았고 확인 없이 기사를 썼다. 데일리NK가 최초 보도한 이후 CNN 보도가 나왔고, 한국 언론은 ‘인용했다’라는 면피를 쓰고 ‘사망설’을 전하기 바빴다. 로이터 통신이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 고위 관리가 이끄는 대표단이 북한으로 향했다는 보도를 내놓자 건강이상설에 무게를 두고 재보도하거나 ‘시술이 잘못돼 급변했다’는 일본발 소문까지 기사화하면서 설을 키웠다.
정치권 인사들이 미확인 정보를 무책임하게 확산시켰다고 비난하지만 언론 스스로 책임이 있다는 말은 들리지 않는다.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기 위한 계획된 전술’이라느니, ‘반체제 세력이 노출되면 이를 일망타진하기 위한 고도의 술책’이었다는 후속 보도 역시 낯뜨겁다. 자신들이 설을 만들어놓고 이를 뒤엎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1986년 김일성 사망설과 2020년 김정은 사망설 사이 수많은 북한 오보에서 확인된 명확한 사실은 언론은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소한 북의 폐쇄성을 들어 설을 사실로 둔갑시킨 일을 정당화하는 ‘레퍼토리’는 그만 듣고 싶다. 언론은 반성문부터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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