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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한 재주로 신라의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인 사내, 공주의 식견으로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사내, 그리하여 한 나라의 왕이 되었다는 이 사내가 백제의 무왕(武王)이다. 설화적인 이 이야기는 백제의 특징과 가능성을 말한다. 재주 있는 자가 왕이 될 수 있다는 백제의 열린 구조를 말한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은 백제 편이 아니었다. 이 와중에 왕 노릇한 무왕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역사상 가장 극적인 등극
나라를 세운 첫 왕에게는 신분의 고하나 경중이 따로 없다. 제 하나의 재주로 건국하여 왕이라 부르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미천한 신분의 사람이 건국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느냐는 문제는 차치하고 말이다. 그러나 다음 왕은 정해져 있다. 왕족이 아니고서야 등극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지 않은가. 이 같은 상식으로 따져본다면 백제 제30대 무왕의 이야기는 아무래도 믿기 어렵다. [삼국유사]가 전해주는 서동(薯童)과 선화공주의 결혼이다.
무왕의 어려서 이름이 서동이다. 재주와 도량이 헤아리기 어려웠다는데, 마[薯(서)]를 캐서 팔아다 생활했으므로, 사람들이 이름을 그렇게 부른 것이다. 서동은 어느 날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인 선화가 세상에서 둘도 없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는 머리를 깎고 신라의 서울로 갔다. 동네 여러 아이들에게 마를 나눠주며 꼬이고는, 자신이 지은 노래를 따라 부르게 했다. 선화공주가 남모르게 서동을 만나 정분을 통한다는 내용이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신라 향가 14수 가운데 한 편인 ‘서동요’이다.
노래는 경주 일대에 쫙 퍼지고 대궐까지 들리게 되었다. 신하들이 먼저 길길이 날뛰었다. 용납하지 못할 ‘스캔들’의 주인공이 된 선화공주는 결국 유배 길에 올랐다. 비통에 빠진 어머니만이 서둘러 순금 한 말을 마련하였다. 그것으로 먹고 사는 걱정이나 덜라는 뜻이었다. 유배지에 도착할 즈음, 서동은 공주의 앞을 가로 막는다. 이 모든 불행을 꾸민 장본인이 서동이지만, 공주로서야 아직 알 리 없다. 그저 듬직한 사내의 등장에 안심할 뿐이다. 서로 정도 통하였다. 그런 후에야 공주는 서동이라는 이름을 알게 되고, 노래대로 이루어진 기묘한 체험에 흠칫했다.
그들은 함께 백제로 갔다. 공주가 금을 꺼내 살아갈 길을 의논하려 하자, 서동은 크게 웃고 말았다. 이런 것은 자기가 일하는 산에 가면 흙처럼 쌓여 있다 말한다. 서동은 금의 가치를 몰랐던 것이다. 이쯤 해서 공주는 가치를 알게 해 주는 조력자로서 역할이 바뀌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보물이며, 자신의 부모에게도 좀 실어 보내자고 하였다. 서동은 순순히 따랐다.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금을 신통력으로 실어 보낸 이는 용화산(龍華山)의 사자사(師子寺)에 있는 지명법사(知命法師)였다. 백제에서 신라 궁궐까지 하룻밤에 배달 완료, 매우 민첩한 ‘택배’가 아닐 수 없다. 진평왕은 신통한 조화를 기이하게 여기고 높이 받들어 주면서, 자주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이 이로 말미암아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왕족도 아닌 자가 왕이 된 특이한 경우이다.
무왕이 정말 서동이었을까
무왕의 전력을 말해 주는 [삼국유사]의 이야기에는 여러 가지 허점이 있다. 이름은 장(璋)이며 어머니는 과부였는데, 서울의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다 그 못의 용과 정을 통해 아들을 낳았다고 하였다. ‘못의 용’이 은근히 왕족의 냄새를 피우지만 분명하지 않다. [삼국사기]가 확정적으로 법왕의 아들이라 한 것과 다르다.
선화가 진평왕의 셋째 딸이라는 설정도 어색하다. 진평왕에게는 나중에 선덕여왕이 되는 덕만과, 용춘에게 시집 가 김춘추를 낳는 천명공주가 있을 따름이었다. 선화는 가공인물이다. 서동이 금을 장인에게 보내주고 나아가 인심을 얻어 왕이 되었다는 대목은 더욱 앞뒤가 안 맞는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살피건대, 무왕의 재위 시 백제와 신라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간헐적으로 벌였다. 무왕 3년의 아막산성 싸움을 필두로, 6년(동쪽 변경), 12년(가잠성), 17년(모산성), 19년(가잠성), 24년(늑노현), 25년(신라의 6성 차지), 27년(왕재성의 싸움)으로 이어져 있다. 장인과 사위의 나라 사이가 이렇듯 나쁠 수 있을까.
그뿐만 아니다. 무왕 28년에는 왕이 신라가 침탈해 간 땅을 회복하고자 하여 크게 군사를 일으켜 웅진으로 나가 주둔하였다. 진평왕은 이를 듣고 급히 당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도저히 감당 못 할 상황에 대국의 힘이라도 빌려보자는 심산이었다. 이 사실을 안 무왕은 주둔을 풀지만, 싸움은 29년(가봉성), 34년(서곡성), 37년(독산성)으로 이어졌다. ‘자주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물었다’는 [삼국유사] 쪽의 기록이 무색하기만 하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곤란한 증거가 나왔다. 전북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의 창건 내력을 담은 금판에 적힌 글이었다. 2009년의 일이다. ‘좌평 사택적덕의 딸인 무왕의 왕후가 기해년(639)에 지은 것’이라는 기록이다. [삼국유사]에서 미륵사는 무왕과 선화공주가 지은 것으로 나와 있다. 용화산 밑에 있는 큰 연못가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나자, 공주가 왕에게 큰 가람을 세우자고 제안하였다. 지명법사가 이번에도 신통력으로 못을 메웠고, 미륵상 셋과 회전(會殿), 탑, 낭무(廊廡)를 각기 세 군데에 세운 미륵사가 완성되었다. 심지어 진평왕이 온갖 기술자들을 보내 도왔다고도 했다.
아무래도 믿자면 탑에서 발굴된 금판의 기록이다. 639년은 무왕 40년, 그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이다. 사택적덕은 미륵사 주변의 유력한 호족이고, 서동이 왕위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이로 보인다. ‘못의 용’의 아들인 서동은 법왕의 서자 정도로 본다면, 재주와 도량이 헤아리기 어려운 데다, 처가의 강력한 후원까지 더해져 왕위에 올랐으며, 40년 통치에 이제 마지막으로 부인의 소원을 들어준 이야기로 이해할 만하다.
그런데도 [삼국유사]가 전하는 설화는 일정 부분 진실을 담고 있다. 이는 백제 사회가 능력 있는 자의 무한한 도전 가능성에 열린 구조였음을 말한다. 그러기에 무왕의 이야기는 오랜 세월 동안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더 드라마틱하게도 사택적덕의 딸이 드디어 선화공주로 바뀌어 있다.
무왕의 시대 무왕의 공과
역사적으로 가장 극적인 등극담을 가진 무왕은 왕으로서 과히 나쁘지 않은 업적을 남겼다. 무왕의 증조할아버지인 성왕이 죽고, 큰할아버지인 위덕왕이 뒤를 이어 45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성왕의 부여 천도 이후 안정적으로 정착되는 분위기였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위덕왕에게 아들이 없어, 동생인 혜왕이 왕위에 올랐다. 무왕의 할아버지이다. 그런데 혜왕은 1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왕위에 오르기는 너무 늦은 나이였을 것이다. 그러자 아들인 법왕이 뒤를 이었는데, 법왕 또한 1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무왕의 아버지이다. 이렇듯 무왕은 2년여 사이에 두 명의 왕이 급서하는 불안한 상태에서 왕위에 올랐다. 다만 빠른 시간 안에 다시 안정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신라와의 대결에서 무왕은 결코 밀리지 않았다. 앞서 여러 전투를 소개하였거니와, 승패에서 무왕의 백제 쪽이 다소 우위를 점하고 있다. 그러나 무왕 8년에 택한 수나라와의 사대 외교는 약간의 문제를 남겼다. 3월,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고 고구려 토벌을 요청하였다. 수양제는 이를 허락하였다. 그러자 5월에 고구려는 송산성을 공격하고, 석두성을 습격해 남녀 3천여 명을 사로잡아 돌아갔다. 그러나 무왕의 ‘친 양제 정책’은 계속되었다. 12년에는 수양제가 드디어 고구려를 정벌하리라는 소식을 들었다. 무왕은 곧 사신을 보내 군사의 일정을 묻게 하였다. 양제는 무척 기뻐하였다.
이듬 해, 수양제는 고구려 침공을 감행하였다. 무왕은 국경에서 군비를 엄중히 하고서 수를 돕는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두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삼국사기]는 쓰고 있다. 두 마음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다. 수나라를 돕는 척 하면서 고구려와의 관계에 우위를 차지하겠다는 마음 정도로 이해된다.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이 싸움에서 수나라가 졌다. 무왕으로서는 실로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기댈 언덕이 무너진 데다 심히 고구려의 눈치를 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거슬러 올라가보면 성왕 때의 사건 하나가 이와 유사했었다. 549년이었다. 성왕은 양(梁)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사신이 양의 수도 건강성(建康城)에 도착했을 때 성은 반란의 화염 속에 휩싸여 있었다. 후경(侯景, 503~552)이라는 자의 소행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양나라에 왔던 백제의 사신으로서는 낭패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양은 백제가 가장 기대는 나라였다. 양나라로부터 받아들인 문화적 영향은 오늘날 우리가 확인하는 몇 남지 않은 백제의 유산으로도 충분히 확인된다. 사신은 낭패를 넘어 좌절감까지 맛보았다. 망한 나라에 간 사신. 양나라의 멸망은 한반도 내에서 백제의 역학구도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백제는 양나라와 수나라의 멸망으로 연이은 타격을 입었다 할 수 있다. 무왕은 수나라 멸망 이후 중원의 새로운 주인이 된 당나라에 부지런히 조공을 보냈다. 무왕 25년을 출발로, 거의 매년 사신을 보낸 기록이 [삼국사기]에 자세하다. 그러나 왠지 신라가 당나라와 맞추는 호흡에 비하면 엇나가 보인다. 수나라에게 지나치게 가까이 갔던 무왕의 험이 아닐 수 없었다.
멋을 알았던 왕의 쓸쓸한 퇴장
무왕 35년 2월에 왕흥사가 완공되었다. 이 절은 무왕의 아버지 법왕이 원력을 놓아 짓기 시작하였다. 법왕은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삼국유사]의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읽어 보자.
백제 제29대 법왕은 이름이 선(宣)이고, 효순(孝順)이라고도 했다. 왕위에 오른 해 겨울 명령을 내려 살생을 금하고, 집안에서 기르는 매 같은 새를 놓아주며, 천렵하는 도구를 모두 불살라 사냥을 일체 못하게 했다. (중략) 도읍지인 사비성에 왕흥사를 지으려다 기초만 닦고 돌아가셨다. 무왕이 이어, 아버지가 기초를 놓은 곳에 아들이 기둥을 올려, 여러 해 지나 완성을 보았다. 산을 등지고 앞에 물이 흐르며, 꽃나무가 빼어나 네 계절의 아름다움을 두루 갖추었다. 왕은 늘 배를 타고 강물을 따라 절에 들어가자 했으며, 매우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했다.
배를 타고 강물을 따라 절에 들어갔다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무왕은 아버지의 불심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매우 높은 심미안을 갖춘 스타일리스트였다. [삼국사기]에서도, ‘그 절은 강가에 있었는데, 채색으로 화려하고 웅장하게 꾸몄다. 왕은 몇 번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 행향(行香)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절이 완성된 다음 달, 왕은 궁궐 남쪽에 못을 파서 물을 20여 리나 끌어들이고, 사방 언덕에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물 가운데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方丈仙山)에 비겼다. 방장선산은 바다 가운데 신선이 사는 3개의 산 가운데 하나를 말한다. 무왕의 관심이 불교에 그치지 않아 보인다. 파라다이스를 이 세상에 구현해 보고자 한 무왕은 중국 남조의 화려한 도교풍마저 받아들였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사비강 북쪽 포구의 양쪽 언덕에는 기암괴석이 얽혀 서 있고, 그 사이에 기묘한 꽃과 특이한 풀들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왕은 술을 마시고 마음껏 즐겨 거문고를 타면서 직접 노래를 불렀으며, 따라온 이들도 여러 차례 춤을 추었다. 그곳을 일러 대왕포(大王浦)라고 하였다.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이 정도면 아름다움을 넘어서 있다. 주변국의 정세가 그렇듯 한가할 때가 아니었다. 이로 인해 무왕의 말년을 향락에 빠진 군주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이 정도를 향락이라고까지 말하기 어렵지만, 그를 이어 아들 의자왕이 들어서고, 이 왕이야말로 진정 향락에 빠져 나라를 망쳤다는 평가가 내려지는 마당에, 그 원인(遠因)이 무왕에게까지 이어져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글 고운기 /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글쓴이 고운기는 삼국유사를 연구하여 이를 인문교양서로 펴내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필생의 작업으로 [스토리텔링 삼국유사] 시리즈를 계획했는데, 첫 권으로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을 펴낸 데 이어 최근 [삼국유사 글쓰기 감각]을 냈다. 이를 통해 고대의 인문 사상 역사를 아우르는 문화사를 쓰려한다.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백제 > 왕'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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