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yeohwi.egloos.com/v/1398143


고구려의 남북도에 대한 토론

· 제목 - 2011년 동국사학회 제1차 정기 학술대회
· 주최 - 동국대학교 동국사학회
· 발표자 및 토론자 - 정원철(서해문화재연구원) / 신광철(한국고고환경연구소), 이유진(숭실대학교)
                            / 박남수(국사편찬위원회), 김성희(동국대학교) / 차인배(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 사회자 - 김병곤(동국대학교)
· 일시 - 2011년 2월 26일(토)
· 장소 - 동국대학교 명진관 103호(A103)
· 批評

처음으로 학회 토론을 맡았다.

일단 메이져 학회도 아니었고, 사람도 많지 않아서 큰 부담없이 학회 토론에 임할 수 있었다. 정원철 선생님이 전화하셔서 토론을 맡아달라고 했을 때는 나이도 어리고 그래서 좀 부담이 된다고 했는데, 지도교수님도 OK 하시고, 마침 개인적으로 관심이 가는 주제였기 때문에 승락했다(실제로 가 보니 나이가 가장 적으신 분이 필자보다 6살 많으신 정원철 선생님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40대 이상이었다).

일단 정원철 선생님은 기존에 여러가지 견해로 나뉘었던 고구려 남북도에 대해 새로운 자료를 근거로 접근하셨다. 기본적으로 '혼하-소자하-부이강-신개하-집안'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남도로 보느냐(다수설), 북도로 보느냐(소수설)에 따라 목저성이 목기진 일대에 있느냐(다수설), 혹은 고검지산성이나 오룡산성으로 보느냐(소수설)로 나눠지고 있다. 이에 대해 선생님은 신성이 342년 이전에 전연에게 함락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연군이 신성을 그냥 지나쳐 목기진 일대로 나아간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점, 고구려 산성의 분포 상황을 봤을때 기존의 북도가 아닌 남도로 지목된 교통로가 오히려 신성-집안을 잇는 최단거리이며, 이곳에 신성(혼하), 오룡산성과 온가보산성(소자하), 흑구산성과 전수호산성(부이하), 패왕조산성(신개하) 등 고구려 성곽이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점, 전연의 군 전략상 기존의 견해와는 맞지 않는 부분이 있는 점 등을 근거로 새로운 얘기를 하셨다. 즉, 기존에 남도로 알려진 길이 사실은 북도이며, 태자하 연안을 따라 남도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필자 역시 신성이 342년 고구려의 지배 아래 있었기 때문에, 그 곳을 남도가 아닌 북도로 보는 입장이었다. 당시 요동 지역 대부분이 전연의 지배 아래 있었지만, 신성을 기점으로 그 이동은 분명한 고구려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만약 남도 초입부에 신성이 있었다면, 모용황이 4만 대군으로 그리 쉽게 남도를 따라 고국원왕의 허약한 군대를 깨부수고 환도성까지 진격하지 못 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성이 위치한 데다가 산성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경로가 남도가 아닌, 북도가 되어야 적절할 것 같다. 암튼, 기본적으로는 필자 역시 정원철 선생님의 생각과 비슷했기에 몇가지 궁금한 부분에 대해서 6개의 질문을 드렸다.


1. 북도 루트의 성격

田中俊明은 고구려 남북도에 대해 당시 현도군 및 요동군과 고구려를 연결하는 교통로는 단 2개밖에 없었으며, 그 2개가 바로 고구려‘에로의’ 남북도라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과 같이 혼하-태자하-부이강에 연접하는 루트를 북도로 이해하고, 태자하-육도하에 연접했던 루트를 남도로 이해한 바 있습니다. 단, 북도는 무순시에 위치한 제3현도군으로 향하는 교통로였으므로 이를 두고 ‘현도군 루트’, 남도는 요동군이 위치했던 요령성 조양시 방향으로 향하는 교통로였기 때문에 ‘요동군 루트’라고 명명하였습니다(1999: 219-221).

이에 반해 선생님은 북도를 ‘요동지역을 잇는 가장 주요 도로’라고 하셨는데(17쪽), 일반적으로 요동지역의 중심지로 꼽히는 곳은 요동성이 위치했던 ‘요양’-요동군이 위치했던 ‘조양’ 방면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 田中俊明과 달리 북도를 포괄적으로 ‘요동군 루트’로 이해하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혹시 선생님께서 북도와 남도의 루트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디와 연결됐는지, 더 나아가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 생각하시는 바가 있다면, 간략하게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답변 : 당시 남-북도는 고구려측 용어라기 보다는 전연측에서 인식한 용어이기 때문에 당시에도 그렇게 사용했을지는 잘 모르겠다. 요동의 중심지라 하면 이후 고구려가 차지해 요동성을 축조할 '양평'을 일컫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田中俊明은 굳이 남-북도를 현도군 루트, 요동군 루트로 구분하고 있는데, 어차피 2개의 루트 모두 요동 지역의 중심지인 양평을 종착지로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양자의 성격을 나누지 않고 '요동 지역을 잇는 가장 주요 도로'로 북도를 설명해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2. 선행 연구의 ‘북도’에 대한 성격

선생님께서는 기존의 다수설에서 ‘북도’로 비정된 루트를 ‘고구려와 부여를 잇는 주요 루트’로 이해한 余昊奎의 견해(1995: 18-22)에는 동의하지만 이를 북도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余昊奎는 345년 전연의 慕容恪이 남소성을 침공한 것은 부여를 정벌하고 길림 방면의 옛 부여지역까지 점령하기 위한 전연 측의 사전 포석으로 이해하고, 342년 전연의 고구려 침공 역시 이러한 계획의 일환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전연의 고구려 정벌 계획은 부여에 대한 영향력 회복이라는 단기적 전략이 아니라 고구려라는 후방의 위험요소를 차단한 다음 요서 및 중원으로 진출한다는 장기적 전략 아래 수립되었다는 의미인데, 그렇다고 했을 때 기존에 ‘북도’로 비정된 루트는 전연 뿐만 아니라 고구려에도 상당히 중요한 루트임이 분명합니다.

요동 지역으로 향하는 주요 도로인 북도와 그 이남에 위치한 남도 이외에, 부여 방면으로 향하는 기존의 ‘북도’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은 어떠한지 궁금합니다.

답변 : 신성을 중심으로 혼하 중류와 상류를 지나, 휘발하를 따라 길림쪽으로 향하는 것이 전연의 부여 공격로였다고 생각한다. 아마 고구려 역시 부여로 진출했을때 이 경로를 이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길이 고구려 수도와 바로 이어지는 루트는 아니다. 그런 루트가 반드시 존재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나는 나통산성을 주목한다. 축조기법이나 규모 면에서 고구려 성인 이 곳이 아마 고구려의 부여 진출했을 당시 전초기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에 알려진 북도가 부여 방면으로 향하는 루트 중 하나인 것은 인정하지만, 전연의 고구려 공격시 이용되지는 않은 것 같다.


3. 남소성으로 비정할 수 있는 성

그간 신성과 목저성 사이에 위치한 남소성은 현재까지 ‘철배산성’과 ‘오룡산성’이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와 달리 田中俊明은 제2현도군치를 고구려가 탈취하고 그 근방에 세웠다고 보는 ‘구노성(舊老城)’을 지목하기도 했는데(1999: 221-224), 선생님은 철배산성이 청나라 시기의 산성이라고 하면서 오룡산성이 남소성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셨습니다(17쪽).

田中俊明의 주장과 기존의 철배산성이라고 보는 주장의 오류가 있다면, 그 부분을 간략하게 소개해 주셨으면 합니다.

답변 : 오룡산성과 철배산성, 구노성 모두 입지가 상당히 좋은 곳에 위치한다. 하지만 철배산성의 경우 하부에서 고구려 유물이 나왔다고 알려져 왔지만,『무순지구 고구려 고고의 회고』2007년 제2기에 소개된 바에 의하면, 상당히 많은 조사가 진행됐지만 고구려 시대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결론내리고 있다. 또한 평지성과 산성이 결합된 평산성인 구노성 역시 고구려 성곽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니며, 고구려 유물이 확인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에 비해 오룡산성은 신성에서 환도성까지 오는 길목에 위치한 성곽 중 가장 중요하지 않았나 싶다. 일단 포곡식 산성이라는 점, 유물이 풍부하다는 점, 주변의 봉수대 및 차단성(관애)과 함께 잘 짜여진 방어체계를 이루고 있다는 점 등을 이유로 꼽고자 한다.


4. 성 내에서 출토된 기와

선생님께서는 환도산성, 태자성, 오룡산성 등의 포곡형산성(혹은 마안형산성)의 상대고도가 높지 않아 평지에서 접근성이 뛰어난데다가 공통적으로 기와가 발견되고 있어 이들 산성이 군사적인 기능뿐 만 아니라 도성 또는 지방통치를 위한 거점성으로서의 역할도 겸하였다고 보고 계십니다(29쪽). 논문 상으로는 선생님께서 그 근거로 ‘기와’를 중요하게 취급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와 비교할 수 있는 자료가 한반도 중부의 고구려 보루 중 연화문와당 및 기와가 출토된 홍련봉 1보루가 아닐까 합니다. 기존에는 고구려에서 기와는 궁궐과 관청, 불려(佛廬)에만 쓰인다는 문헌 기록을 토대로 홍련봉 1보루가 아차산 보루군의 중심지이자 지휘소 역할을 했을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본 토론자는 홍련봉 1보루의 규모 및 내부시설이 대형급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 홍련봉 1보루만 고구려 시기에도 2~3차례 수축되고, 신라시대를 거쳐 통일신라시대까지 꾸준히 사용되었다는 점, 와당 및 기와가 출토된 건물지가 모두 지하식이라는 점 등을 이유로 오히려 홍련봉 1보루가 단순히 군사적 지휘소라기보다는 불려(佛廬) 및 사당 등이 위치한 곳일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습니다(신광철 2010: 30-32).

와당도 아니고, 단순히 기와가 출토되었을 뿐인데 이를 두고 행정적 기능을 했던 지방 거점성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아닐까 합니다. 혹시 이에 대해 기와 이외의 다른 부분을 고려하신 바가 있다면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답변 : 맞다. 그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중국 내지의 발굴성과와 관련해서 유물들을 정교하게 확인할 수 없기에 그보다는 산성의 규모, 축성법 등을 주로 다루고 유물에서는 기와를 언급한 것이다. 이는 앞으로 자료를 더 확보해야 할 것이다.


5. 고구려 초기 산성의 특징

선생님은 고구려 초기 산성의 특징으로 석성이라는 점, 성벽을 쌓을 때 쐐기형돌(楔形石)을 사용한 점, 성벽 상부에 돌구멍(石洞)이 공통적으로 확인된다는 점, 산성의 입지가 산정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고, 산성을 둘러싼 바위와 같은 자연적인 조건을 최대한 이용한 산성이라는 점 등을 꼽으셨고, 이는 중국과 한국 학자들이 일반적으로 갖는 견해입니다.

그런데 제가 삼송산성을 답사했을 때, 성벽 일부 구간에 트렌치를 설치한 것처럼 성벽을 절개한 흔적을 확인할 수가 있었는데, 규모나 절개 방식으로 봤을 때 주민이 성돌을 파가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기보다는 성벽 조사를 위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동안 삼송산성은 수직 절벽 사이의 트인 부분 4군데에 인공 성벽을 설치했다고 알려져 왔는데(王禹浪 · 王宏北 1994: 155), 그 지점은 인공 성벽이 설치된 부분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흑구산성에서도 천연절벽 위의 너비 1m도 돼지 않는 구간에 1~2단의 성벽이 쌓인 것도 확인한 바 있습니다. 이는 기존에 인공성벽이 축조되었다고 알려진 구간이 아니었는데, 절벽의 틈 뿐만 아니라 바위 윗면에도 성벽이 축조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중국에 있는 고구려 산성에 대한 전면적인 발굴조사가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간 잘못 알려진 사항들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추후 연구가 진행된다면 고구려 초기 산성의 특징이라고 알려진 부분에 대해서 수정이 불가피하다고 생각됩니다. 선생님 역시 초기 산성의 특징이라고 알려진 것들이 반드시 초기만의 특징은 아니라고 하시면서, 그중 돌구덩이만 초기 산성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현재 산성 내부에 대한 발굴조사가 전면적으로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혹시 답사 과정에 기존에 알려진 것과 다른 사실이 확인된 점이 있다거나, 앞으로 고구려 초기 산성 연구에 있어 고려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6. 고구려 초기 산성과 중․후기 산성과의 차이점

본고에서 적극적으로 논의된 부분은 아니지만, 고구려 산성을 다년간 연구하셨기에 이에 대해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고구려 초기 산성의 특징 중 돌구덩이는 초기만의 특징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고구려 중․후기에도 독특한 고구려 산성만의 특징이 확인되는지 궁금합니다. 더불어 산성의 규모나 입지, 내부시설, 산성을 통한 방어전설에 있어서도 변화가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혹시 이에 대해서도 정리하신 내용이 있으시다면 간략하게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선생님께서는 3세기 말을 대외적으로 요동지역의 지배력이 느슨해지고, 대내적으로는 개별적이고 반자치적인 정치체제인 나부체제가 해체되어 고구려에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확립된 시기로 보셨습니다. 그리하여 이 시기를 고구려 산성의 기본 모델이 형성되어 본격적으로 축성되는 시기로 보고 계신데(28쪽), 고구려 중․후기에 대해서도 이러한 분기 설정이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그 원인은 무엇으로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밖에 시기에 따라 고구려의 성곽 축조 현황이 달랐으며, 그에 발맞춰 성곽 방어체계 역시 변화가 있었다는 점, 그에 따라 시기별 침공세력에 대한 대응방식이 달라졌다는 점, 3세기 말 이후 4세기 중반까지 혼하 중류와 태자하 상류, 그리고 지금의 관전 지역을 잇는 선이 고구려의 서쪽 변경이었다는 점 등은 모두 동의하는 바, 전체적으로 토론자에게도 많은 공부가 되었기에 이번 기회에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5~6번 답변 : 고구려 산성 편년과 관련된 부분은 추후 논고를 통해 자세히 밝힐 예정이다. 일단, 개인적으로 고구려 산성의 편년을 총 4시기로 나누고 있다는 것 정도만 언급하겠다.

1기는 건국 이후 3세기 말까지로 이 시기의 고고자료는 거의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문헌에서 산성의 종류(산정식인지, 포곡식인지)와 규모를 추측할만한 단초가 확인될 뿐이다.

2기는 3세기 말~4세기로 오늘 논고에서 다룬 부분이다(첨언하자면, 이 시기는 고구려 산성이 제대로 축조되기 시작한 때로서 크게 산정식과 포곡식으로 나뉘는데, 포곡식은 지방거점성일 가능성이 높다. 모두 석축산성이며, 모두 설형석을 사용했고, 돌구덩이 및 성가퀴가 같이 확인된다. 규모는 환도산성과 오녀산성을 제외하면 대개 1,000~1,500m 규모의 중소형급이 많아 어느 정도 산성 규모의 선호도가 있었던 것으로 본다. 다양한 형태의 옹성이 확인되었고 이 시기의 치는 많이 축조되지 않아 지형이나 시설 주변에 선별적으로 축조한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3기는 5세기~6세기 중엽으로 고구려가 서쪽으로 요동, 남쪽으로 한강유역까지 진출한 시점이다. 기존의 포곡식 산성이 보다 대형화되었으며, 축조기술이 향상되었다. 반면, 북한 지역(고구려 내지)에서는 평산성이 확인되기 시작한다.

4기는 6세기 중엽~멸망할때까지로 오히려 포곡식 산성의 규모가 작아지며, 토축산성이 많아진다.


참고문헌

신광철, 2010,「고구려 남부전선 주둔부대의 편제와 위계-한강유역의 고구려 보루를 통해서-」『고고학』9-1, 중부고고학회.

余昊奎, 1995,「3세기 후반∼4세기 전반 고구려의 교통로와 지방통치조직-南道와 北道를 중심으로-」『韓國史硏究』 91, 韓國史硏究會.

池培善, 1993,「慕容翰에 대하여」『東方學志』 81, 延世大學校 國學硏究院.

王禹浪 · 王宏北, 1994,『高句麗 · 渤海古城址硏究匯編』(上), 哈爾濱出版社.

田中俊明(金希燦), 1999,「성곽시설로 본 고구려의 방어체계-왕도 및 대중국 방어를 중심으로-」『高句麗硏究』8, 高句麗硏究會.



그런데 이에 대해서 학회에 참가하신 서영교 선생님은 다른 얘기를 하셨다. 일단 발표자에게 '당시 전연의 군대 대부분이 기병이었을텐데, 문헌에 보면 목저(쉽게 목저성으로 이해하는 곳)에서의 한차례 전투 이후 순식간에 환도성까지 진격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문헌에는 고구려 산성의 역할이 거의 없는데, 산성을 통한 남-북도 추정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산성의 역할에 대해서는 왜 일언반구 말씀이 없으십니까?'라는 질문을 했고, 정원철 선생님은 '미처 거기에 대해서는 공부하질 못 했습니다'라고 하셨지만, 조금 당황하신 것 같았다.

학회가 끝나고(이후 2개의 발표가 더 있었지만, 고려~조선시대를 다루는 것이라 생략하도록 하겠다 -.-;), 회식 자리에서 서영교 선생님, 정원철 선생님과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그래서 오늘 발표와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1. 전연의 병종

서영교 선생님이 남도로 간 4만이 기병이라 했을 때, 동원된 말은 3배인 12만필에 달했을 것이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그게 전부 기병일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우문선비나 단선비와 달리 고구려는 3세기 중반에 이미 성곽을 많이 축조한 나라였습니다. 그렇게 국제정세에 밝고 전략적인 능력이 뛰어났던 모용한이 그걸 몰랐을리 없습니다. 다행히 남도에 고구려군이 많이 없었지만, 상황이 어찌 될지 모르는데 무조건 기병만 이끌고 왔을까요?'라고 여쭤봤죠. 그랬더니 '난 그렇게 보지 않는다, 유목민인 걔네들이 답답해서 그렇게 못 온다~'라고 하시더라고요. 뭐 술자리에서 가볍게 하신 얘기셨겠지만, 전 모용황의 본대 4만 중 기병의 비율이 좀 높을 수는 있겠지만(적어도 모용한이 이끈 선봉대는 기병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전부 기병일 가능성은 적다고 봅니다. 그리고 동시에 북도로 출병한 무가 이끌던 고구려군 역시 기병의 비율이 높았겠지만, 전부 기병은 아니었다고 보고요. 암튼, 이 부분에 대한 얘기는 그렇게 끝났습니다.


2. 당시 전쟁 상황

서영교 선생님은 당시 문헌에서 성곽에 대한 언급이 하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저 역시 목저라는 단어가 나오지만, 그것이 목저성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라고 답했죠. 그러자 서영교 선생님은 당시 성이라 해도 우리가 생각하는 큰 성이 아닐 것이다~그냥 작은 토루나 목책일 가능성이 있으며, 목저에서 그러한 차단책이 뚫리니깐 바로 환도성까지 길이 뚫린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산성에 언급이 없는 이유는 솔직히 저도 의문이다, 그리고 목저에서 고국원왕의 군대가 깨진 것도 수성전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환도산성이 함락된 것을 보면 이건 분명히 공성전으로 볼 수 있지 않겠냐, 태자하 연안의 남도 상에 성곽이 많이 없기 때문으로 문헌을 이해하면 될 것 같다~고 했죠. 그러면서 선생님께서는 그럼 남-북도를 어디로 보시냐~고 했더니 그 부분은 잘 모르겠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산성의 역할을 추측할만한 내용이 거의 없다는 것은 문제가 아니냐~고 하시더라고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나중에 논문 작성할때 참고해야 할 부분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 실제 남도의 상황

사회를 맡으신 김병곤 선생님(서영교 선생님 동기라고 하는데 상당히 동안이라서 놀랐음 -.-;)이 같은 자리에 앉으셨는데, 실제로 남도가 그렇게 협소하냐? 고 하시더라고요. 또한 서영교 선생님도 기병이 몇만씩 다닐 길이 아니냐? 고 물으시고요. 정원철 선생님은 이에 대해 북도보다는 협소하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며 아예 못 다닐 길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지역은 저도 가 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대화에 낄 수가 없더군요.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요즘이야 도로가 뚫리고 해서 아무리 나쁜 길이라도 어느 정도 교통이 가능할테니 지금의 지형을 갖고 1700여년전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럼 대체 남도의 협소함은 뭘로 증명해야 하지? 라는 의문과 함께 말이죠.


이상이다. 고구려 남-북도를 두고 여호규 선생님은 고구려의 지방통치체제까지 확대해석하기도 했는데, 그만큼 중요한 주제인지라 이런저런 생각도 많았고, 고민도 많았고, 배운 것도 많은 하루였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학회를 오랜만에 가는 것인지라 삶의 활력소 같았다고나 할까, 좋았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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