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key=20081219.22015203227
강인욱의 북방 역사 기행 <37> 이태백이 풀어낸 발해문자
"발해 국서를 해독하라" 당나라 현종 때 일화 책으로 전해
한자와 닮았으리라 추측할 뿐 실증 유물 없으니 답답한 노릇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국제신문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2008-12-18 20:33:05/ 본지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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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크라스키노 성지에서 발견된 主자가 새겨진 토기.
중국은 지난 수천년간 주변의 이민족들에 시달렸다. 하지만 중국을 정복했던 이민족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기록을 남기지 못했기에 그들의 이야기는 적대적이었던 중국의 기록에 남아있을 뿐이다. 철저하게 한족 중심의 역사기록을 남겼으니 중국 중심의 역사만 남아있게 되었다. 역사를 보면 승자가 기록을 남긴다기 보다는 기록이 남아있기에 승자라는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고대사에 대한 기록들은 중국과 일본에 주로 남아있다보니 어쩔수 없이 주변국가의 눈에 보이는 우리 모습에 주로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극동에서 발흥했던 수많은 민족들은 자신들의 글자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극동 여러 주민들의 생활상은 러시아인들이 18세기 이후 이 지역을 진출하면서 원주민들의 생활풍습, 구전신화 등을 기록한 게 남아있을 뿐이다. 러시아 진출 이전의 역사는 아주 소략한 중국의 역사서와 고고학적 유물이 전부일 뿐이다.
극동에서 처음 글자를 썼던 사람들은 누구일까? 당연히 발해인들이다. 발해가 이 지역에 국가를 만들면서 고구려에서 이미 일반화된 한문으로 의사소통을 했으며, 또 자신들의 문자를 만들어썼다고 한다. 하지만 발해 문자의 실질적인 자료가 나오지 않아서 과연 발해 문자는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지난 몇 십년간 논쟁의 대상이었다. 발해인들이 상당히 높은 수준의 한문을 구사했음은 역사나 고고학적 자료(정효공주 무덤)에서 잘 드러나 있다. 반면에 발해의 문자는 정작 드러난 바가 없다.
발해의 문자로 의심되는 것이 실제로 가끔씩 발견된다. 발해의 토기나 기와에 새겨진 명문 중에는 한문과 비슷하게 만들어진 글자들이 있으며, 연해주의 발해유적에서 투르크 계통의 룬 문자가 새겨진 석판이 발견된 적도 있다. 하지만 토기 위의 명문은 마치 상표를 찍듯이 제작자나 소유자를 표시한 것에 불과해서 일정한 문법체계를 갖춘 문자라고 적극적으로 주장하기 어려우며 투르크 문자라고 주장하는 글자도 어떤 뜻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발해의 문자는 한자를 일정하게 조합해서 만든 이두와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일본으로 파견된 발해사신에 대한 기록에서 그 실마리가 있다. 발해인이 자신을 소개하면서 우물 정(井)에 돌 석(石)이요, 우물 정(井)에 나무 목(木)이요 했다고 한다. 마치 조선이 자신들의 이름을 쓰기 위해 돌(乭)이나 걱()자를 만든 식일 것이다. 우물 井이면 고구려 계통의 유물에 흔히 보이는 기호이니, 혹시 고구려-발해 계통의 사람들이 흔히 붙였던 이름은 아닌지 모르겠다. 또 중국의 '영고기관(今古奇觀)'이라는 책에는 이태백이 발해 글자를 해독했다고 한다. 당나라 현종(서기 713~755년)에 발해가 보낸 국서를 아무도 해독 못하자 이를 수치스럽게 여긴 현종이 이 문제를 풀지 못하면 문무백관들을 해임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결국 과거 시험에서 떨어진 이태백에게 그 번역을 맡겼고, 이태백은 자신을 떨어뜨린 대신이 먹을 갈고 신을 벗기게 하는 등 통쾌한 복수(?)를 했다고 한다. 물론, 후대의 이야기책에 나온 것이니 신빙성은 조금 떨어진다고 해도 이태백이 발해문자를 풀어냈다는 기록은 참 재미있다. 실제로 발해 이후 거란, 서하국 들도 한문의 획을 조합해서 자신들의 글자를 만들었으니, 결국 발해의 문자와도 연관되었을 것 같다.
글자를 좋아했던 것은 비단 발해뿐 아니라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구한말 조선이 이미 일본에 넘어가기 직전에 한국을 여행했던 서양사람들의 기록들은 공통적으로 조선의 높은 교육열과 문자체득률에 놀랐다. 화란인 하멜은 초서 언문 한자 등 세 가지 언어를 쓴다고 했으며, 영국출신의 여행가 엘리자베스 비숍, 러시아 사람인 가린 등 모든 서양인 여행자들은 촌부들도 글을 알고 있음에 감탄해마지 않았다. 나라가 넘어가고 옆집에서 굶어죽는 사람이 실려나가도 서당은 글 읽는 아이들로 넘쳐났었다. 발해의 문자도 우리의 높은 문자문화가 발현된 것이다.
발해도 비교적 소수였던 고구려계통의 사람들만으로는 광활한 발해영역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말갈계를 비롯한 다른 이민족들도 발해의 관리로 살기 위해서 발해의 문자와 중국어를 배웠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 아쉽게도 그 글자자료는 지금 거의 남아있지 않다. 매년 크라스키노 성지를 발굴할 때마다 목간자료가 한 다발 나오기를 꿈꾸고 있지만, 아직은 성과가 없다. 내년 발굴에서는 발해의 글자가 쏟아져서 중국이나 일본의 기록에 의한 발해사가 아니라 발해인이 보았던 진정한 발해의 모습을 드러내보고 싶다. 부경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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