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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시사포커스], 역사 바로 지키기, 오공훈
고구려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시사포커스], 역사 바로 지키기, 오공훈
놀이의 달인 고구려사람들
고구려인은 춤과 노래를 매우 즐겨하는 사람들이었다. 매우 엄한 법질서를 갖고 있고 수시로 전쟁을 치러야 하는 긴장된 사회에 사는 고구려인들에게는, 밤늦도록 마을 사람들과 모여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는 것이 삶의 피로와 긴장을 풀어주는 가장 좋은 오락이 될 수 있었다.
매년 10월 하늘과 조상신에게 제사지내는 동맹(東盟)은 물론, 크고 작은 축제가 열려 신분의 높고 낮음, 부유한 정도의 차이를 떠나 서로 어울려 축제를 즐겼다. 고구려의 동맹 행사는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엄격하게 예(禮)를 따지며 장중한 분위기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신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해주는 중국의 제사풍습과는 크게 달랐다.
신이 강림할 때에 함께 어울려서 신을 맞이하고 서로 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며 함께 신의 기운을 받아 함께 즐기는 축제의 장이 동맹이었다.
매년 초에는 강가에 사람들이 나와 노는데, 왕도 여기에 참관하여 구경을 했다. 사람들은 서로 돌을 던지며 싸우는 돌싸움을 하기도 했는데, 이 풍습은 20세기 중반까지도 한국에 계승되기도 했다.
이 외에도 바둑, 장기, 축구와 유사한 '축국'이라 불리는 공차기놀이, 주사위놀이, 윷놀이와 투호 같은 놀이도 즐겼다. 또 씨름과 수박도 있다. 수박은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한국의 대표적 무예인 태권도 등으로 발전하는 겨루기 놀이였다.
씨름은 현재까지 전해오는 놀이로서 두 사람이 각자 허리에 샅바를 맨 후, 상대편 샅바를 잡고서 손과 발을 이용해 서로를 먼저 땅에 닿게 하는 경기다. 고구려 사람들은 서역에서 전해온 서커스를 관람하거나,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듣거나, 자신이 직접 거문고, 완함, 피리를 비롯한 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즐겼다.
사냥 역시 고구려인에게는 중요한 오락이었다. 산과 들에 나가 대규모로 사냥을 하기도 했지만, 표적을 설정해놓고 서로의 활쏘기 솜씨를 겨루는 것도 중요한 놀이였다. 활을 잘 쏘는 사람은 '주몽'이라 부르며 존중해주었는데,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왕의 별명이 곧 주몽이었다.
고구려 청소년들은 교육기관인 경당에 가서 글공부와 함께 활쏘기 등을 배웠는데, 이런 평소 훈련 탓에 고구려의 강한 군대가 만들어 질 수 있었다.
고구려인의 러브하우스 '사위의 집'
고구려사람들이 결혼을 할 때면 먼저 신부의 집에서 사위가 머물 수 있는 작은집인 서옥을 짓고, 이곳에서 부부가 아이를 낳아 성장할 때까지 살게 하는 서옥제라는 풍습이 있었다.
그런데 이 풍습은 점차 고구려 후기로 갈수록 사라지게 되며, 남녀가 모두 서로 사랑하면 바로 결혼할 만큼 자유로운 결혼 풍습이 생겼다.
고구려에서는 양가 부모의 승낙을 받아 약혼이 성립되면 다른 나라와는 달리 신부집의 본채 뒤에 작은 별채 '사위의 집'을 지어 두고 기다린다.
드디어 결혼 날이 되면 해 질 무렵에 신랑은 신부집 문 앞에 이르러 자기의 이름을 밝히고 절을 한 후, 아무쪼록 신부와 더불어 잘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한다. 이 때 동네 사람들은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되는 듯 신부집 앞에 모여든다.
마을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신랑이 이렇게 두 번, 세 번 신부와 잠자게 해 달라는 청을 하면, 신부의 부모는 신랑의 요청을 허락하고 마침내 신랑은 신부집에서 마련해 '사위의 집'에 들어가 신부와 첫날밤을 지내게 된다.
신랑이 가져온 돈과 폐백을 '사위의 집' 곁에 쌓아 둔다. 결혼한 부부는 이 '사위의 집'에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다 자란 후에야 함께 남편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고구려 사회에서는 형이 죽으면 형수를 동생이 취하여 아내로 삼아 '형사취수혼'이 널리 행해지고 있다. 이러한 결혼 형식은 고구려뿐만 아니라 부여, 흉노 등 북방 민족 사이에서도 널리 나타나고 있다.
고구려의 데릴사위제와 같이 혼전에 미리 가서 사는 습속은 매매혼 내지 교환혼의 흔적이다.
지금도 미개 종족간에는 며느리를 얻을 때 자기집 딸이나 누이를 제공하는 교환혼의 풍습이 남아 있기도 한데, 이 교환혼의 발달된 형태가 노역혼으로 일정 기간 노동력을 제공 한 후 신부에게 접근할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이 데릴사위제다.
딸, 아들이 혼기에 임박했다는 것은 하나의 노동력으로서 경제적인 가치를 갖는 것을 의미하는데 결혼은 곧 노동력을 주는 것이므로,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했던 시기에 남의 집 딸을 며느리로 얻어 올 때 그 대가로써 대개 첫 아들을 낳을 때까지 처가에서 노력 봉사를 먼저 해야만 했던 것이 데릴사위제였다.
요즘도 전통 혼례의 경우 신부집에서 올린다든지, 신부집에서 사흘 간 머물렀다가 친가에 온다든지, 혼전에 신랑집에서 신부집으로 재물을 보낸다든지, 장가(장가는 처가를 의미)간다라고 한다든지 하는 것은 한때 대중화되었던 처가살이의 유습이라 하겠다.
형사취수혼은 씨족 사회에서 다른 씨족원이었던 여자가 자기 남편의 죽음과 함께 다른 씨족의 남자와 재혼하여 전 남편의 재산을 가지고 갈 경우, 씨족의 재산과 인적 손실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인구 증가를 위해, 홀로 된 형수의 부양을 위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계속되는 이동 생활 속에서 배우자를 구하기 어려웠던 시기의 결혼 풍속과도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형사취수혼은 실제로 20세기 초까지도 화전민들을 중심으로 남아있었음이 기록에 보이고 지금도 배우자를 구하기 힘든 미개종족에서 찾아볼 수 있는 풍속이다.
장례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취급되었는데, 장례는 많은 비용을 치르고 크게 행사를 했다. 특히 죽은 자가 살았을 때 쓰던 물건을 무덤에 많이 넣어두기도 했다.
하지만 후기에는 죽은 자의 유품을 무덤 옆에 놓아두어서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가져가게 하는 풍습으로 변하기도 했다. 고구려 사람들은 사람이 죽었을 때에는 눈물을 흘리며 몹시 슬퍼하지만, 장례를 지낼 때에는 오히려 풍악을 울리면서 춤추고 노래하며 죽은 사람을 떠나보냈다.
고구려 종교계의 새로운 돌풍, 불교
고구려 사람들에게 종교는 생활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들은 조상에게 제사를 자주 올렸으며, 때로는 신으로 섬기기도 했다.
특히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왕과 그의 어머니인 유화부인은 각각 고등신과 부여신으로 받들어져 매년 열리는 동맹 축제에서 섬김을 받았다.
고구려 사람들은 추모왕을 '천신의 자손'이라고 믿었다. 천신은 고구려인이 모신 최고의 신이다. 그의 후손이 고구려를 세운 만큼 고구려는 남다른 신성한 나라가 되는 것이고, 그것은 고구려인에게는 자부심이었다.
따라서 그 자부심과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동맹 축제에서 추모왕이 신의 자손으로 이 땅에 태어났음을 확인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고구려 종교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온 것은 AD372년에 국가에서 종교로 인정받은 불교였으며 고구려인들은 거대한 탑과 금으로 만든 불상을 만들었다.
고구려 사람들은 사람이 죽어도 저승에서 계속 살아간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고구려 수도인 국내성에 거대한 무덤들이 만여 개 이상 몰려 있었던 것은 이러한 믿음 때문이다.
고구려인들은 용, 학, 기린 등을 타고 다니며 오래도록 살아가는 신선의 삶을 최고의 이상적인 삶으로 여겼다.
또 천신과 조상신 이외에도 해의 신, 달의 신과 농사의 신, 불의 신 같이 기능을 가진 신들을 비롯해서 다양한 신들을 섬겼다.
종교적 의례를 담당하는 무당이나, 제사장, 그리고 신전이 있었으며, 수시로 신들을 받드는 의식이 치러졌다. 왕들도 천신과 조상신께 바치는 제사와 동맹축제에는 결코 빠지지 않았다.
고구려 종교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온 것은 AD372년에 국가에서 종교로 인정받은 불교였다. 불교는 구체적 신상(神像)을 가진 부처님과 전문 신앙인의 조직체인 교단을 제대로 갖춘 종교였다.
고구려 불교는 왕과 그 가족의 적극적 지원을 받으면서 여러 곳에 사찰을 세었고, 거대한 탑과 금으로 만든 불상 등을 만들었다. 고구려의 스님들은 신라에 불교를 전해주고, 왜를 비롯한 주변 나라에 불교 문화를 전해주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벽화는 고구려 예술의 압권
고구려에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화려한 색감과 다양한 소재를 자랑하는 고분벽화, 1,500년이 흘러도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는 높은 성벽(城壁), 그리고 거대한 비석을 들 수 있다.
고구려사람들은 산지에 풍부한 돌을 채취하여 교통과 방어의 요지에 어김없이 튼튼한 성벽을 만들었다. 성은 고구려 건축 기술의 종합체였다. 특히 치(雉)는 성벽에서 돌출하여 나온 시설물로 공격해오는 적을 삼면에서 반격할 수 있어 성의 방어력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성벽의 무너짐을 방지하기 위해 성벽 하단은 튼튼한 큰돌로 쌓고 위로 올라갈수록 작은 돌을 쌓았으며, 성벽의 각도를 조정하여 안정감을 갖게 했다. 또 자연의 절벽이나, 바위 등을 그대로 깎아내기보다는 이를 그대로 활용했으며, 돌과 돌이 서로 맞물리게 쌓아 가장 견고한 방어벽을 만들었다.
고구려의 성벽 축조 기술의 우수성은 주변국에도 널리 알려졌으며, 여러 나라에 영향을 주었다. 여러 강대국들이 고구려와 전쟁을 기피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고구려의 성벽이 워낙 견고하여 섣불리 공격해서는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고구려 옛 터 곳곳에서는 1,500년 전의 고구려 성벽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돌을 잘 다룬 고구려인들은 거대한 돌무덤을 만들기도 했다. 동방의 피라미드라고 흔히 불려지는 장수왕릉은 높이 13미터, 폭 31미터의 피라미드 모양을 하고 있다.
고구려에는 이와 같은 돌로 만든 무덤들과 내부에 돌로 방을 만들고 외부는 흙으로 덮은 무덤들이 1만기 이상 남아있다. 그 가운데는 한 변의 길이가 71m나 되는 거대한 무덤도 있다. 왕과 귀족의 거대한 무덤들은 수묘인(守墓人)에 의해 관리되고, 정기적인 제사가 이루어졌다.
광개토태왕의 무덤 앞에는 거대한 돌로 된 광개토태왕릉비가 있다. 414년 장수왕이 부친의 무덤 앞에 세운 높이 6.39m, 무게 37t에 이르는 거대한 돌의 4면에는 1775자의 한자가 새겨져 있으며, 세계적인 대형 석비로 그 비문의 가치는 대단히 높다.
이 비에는 수묘인에 대한 관리 규정을 비롯해서, 고구려의 간략한 역사와 왕의 계보, 그리고 광개토태왕의 업적이 적혀져 있다.
한편 1979년 충청북도 충주에서 중원고구려비가 발견되었는데 2000자에 가까운 비분 가운데 200자 남짓한 글자만 판독했지만 고구려의 남방 경영에 대한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고구려의 예술을 대표하는 작품은 옛 무덤 안에 그려진 약 100기의 벽화들. 무덤에 묻힌 자의 편안한 안식을 위해 그려진 고분벽화는 다양한 내용이 담긴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무덤 내부를 아름답게 장식하거나 특정한 의미를 나타내는 장식무늬, 무덤 주인의 생전에 기억할 만한 모습과 생활상, 편안한 영혼세계로 가기 위해 악령들을 물리치는 수호신인 사신(四神)과 용맹한 수문장, 도깨비, 천상계의 신들의 모습, 별자리 등이 그것이다.
무덤 안에 그려진 벽화는 고구려사람들의 당시 생활상과 그들의 정신세계를 생생히 보여준다는 점과 뛰어난 그림 솜씨 때문에 세계적 문화유산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뛰어난 색감과 생동감 넘치는 필치가 돋보이는 고분벽화 가운데, 250명이 야외행차하는 모습이 그려진 안악3호분의 대행열도, 무용총 벽화의 수렵도, 강서대묘의 현무도, 강서중묘의 주작도 등은 같은 시대 세계 최고 수준의 예술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또 사신도와 신선도가 많이 그려진 5회분 4호묘 벽화는 당시의 화려한 채색이 지금까지도 거의 손상되지 않고 아름다운 색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보는 이를 감탄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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