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98>후고려기(後高麗記)(11) 

발해 초기 대일본 외교의 특징은, 대부분 장군직을 가진 무관이 사신으로 파견되었다는 데에 있다.(보낼 사람이 무관밖에 없어 그랬던 것은 아니겠지만 발해와 일본의 외교를 설명할 때면 꼭 한 번씩 짚고 넘어가는 부분이기도 하다.) 《발해고》에서 발해의 관직에 대해 설명해놓은 직관고(職官考)에는 발해의 무관직에 10위(衛)가 있었다고 했는데, 중국의 《당서》에서 보고 인용한 내용으로 보통 당의 16위제를 본떠 설치한 것으로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원래 무왕편에서 설명해야 옳겠지만 마땅히 집어넣을 곳이 없더라) 좌·우맹분위(猛賁衛), 좌·우웅위(熊衛), 좌·우비위(羆衛), 남좌·우위, 북좌·우위가 있었고, 각 위마다 대장군과 장군 한 명씩을 두어 통솔하게 했다고 《발해고》에서는 말하고 있는데, 일본의 사서에 나오는 발해 사신들 중에는 실제 좌웅위 낭장(郎將)이니 우맹분위 소장(小將) 같은 관직을 가진 사람도 나온다. 대장군과 장군 말고도 낭장이나 소장도 각 위에 소속되어 있었던 듯 한데, 어쩌면 중랑장도 있지 않았을까 한다. 혹자는 남좌우위와 북좌우위를 따로 보지 않고 하나로 묶어서 '남북좌우위'로 보고 8위제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밖에 《발해고》에서는 영원장군, 충무장군, 운휘장군, 보국장군, 귀덕장군 등의 장군호도 실려 있는데 일본측 자료를 참조한 것이다.(그리고 모두 당조의 장군호를 모방한 것임을 《신당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런 류의 칭호들은 대부분은 '작호'로 일종의 '등급'을 매겨논 거라서 실제 업무를 의미하는 '직호'와는 다르다. 아마 그들이 행한 공적에 따라서 받은 영원장군이니 충무장군이니 하는 작호를 받았을 것이고, '장군'이 있으면 당연히 '대장군(상장군)'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 마치 '낭장'이 있으면 '중랑장'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들 10위(8위?)는 맹분위, 웅위, 비위가 궁성 숙위를 맡고, 남좌우위와 북좌우위가 각각 남쪽과 북쪽 지역의 방호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군대가 있으면 당연히 경찰도 있었을 텐데, 발해에는 '경찰'이란 것을 따로 두지 않고 군대가 경찰의 일을 맡게 시켰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당조가 그랬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으니까. 네모진 수도를 주작대로를 기점으로 동서로 나누고 서쪽은 서경(좌경), 동쪽은 동경(우경)으로 보고 각기 치안을 맡겼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방위가 안 맞는다. 일본에서는 수도 평안경(平安京)을 사조(四條)대로 (왕궁 바로 앞을 가로지르는 길에서 두 줄 내려가서 좌우로 뻗은 길)를 기준으로 이남은 하경(下京), 이북은 상경(上京)이라고 불렀다던데, 어땠을까. 발해에서는.
 
[丁夘, 渤海使輔國大將軍慕施蒙等著于越後國佐渡嶋.]
정묘(24일)에 발해의 사신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모시몽(慕施蒙) 등이 월전국(越後國, 에치고노쿠니)의 사도도(佐渡嶋, 사토노시마)에 도착했다.
《속일본기(續日本紀, 쇼쿠니혼키)》권제18, 천평승보(天平勝寶, 덴표쇼호) 4년(752) 9월
 
서기 752년. 흠무왕이 보낸 사신단이 월후(에치고)에 도착했다.(보국대장군은 당의 무산계 정2품에 해당) 다음달 7일, 일본 조정은 좌대사(左大史) 정6위상 판상기촌(坂上忌寸, 사카노우에노이미키) 노인(老人, 로우히토) 등을 월후국(에치고노쿠니)로 보내 발해에서 왔다는 소위 '발해객'들의 소식을 묻게 했는데, 이들이 정말 발해의 사신인지를 확인하고 아울러 월후(에치고)의 호족들이 무단으로 왜황을 사칭하면서 수교하는 일이 없게 하려는 방비가 아니었을까.
 
[乙丑, 渤海使輔國大將軍慕施蒙等拜朝. 幷貢信物, 奏稱 "渤海王言 '日本照臨聖天皇朝, 不賜使命, 已經十餘歲, 是以, 遣慕施蒙等七十五人, 齎國信物, 奉獻闕庭.'"]
을축(25일)에 발해의 사신 보국대장군 모시몽 등이 배조하였다. 아울러 신물(信物)을 바쳤다. 아뢰어 칭하기를,
"발해왕께서 말씀하시기를 '일본의 조림성천황(照臨聖天皇, 쇼무 덴노) 때에 사명(使命)을 받지 못한지 이미 10여 년이 지났기로 이에 모시몽 등 75인을 보내어 나라의 신물을 가지고 궐정(闕庭)에 봉헌한다'고 하셨습니다."
《속일본기(續日本紀)》권제19, 천평승보(天平勝寶) 5년(753) 정월
 
《발해고》에 보면, 대흥 3년(740) 서요덕과 기진몽을 비롯한 발해 사신이 일본으로 간 뒤 10년 동안 발해와 일본 사이에 어떻다 할 교류가 없었다고 한다. 우리 역사에서 백제만큼이나 일본과의 교류에 신경을 썼던 나라로 발해만한 나라가 또 없지만, 두 나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10년 동안이나 서로 사신을 주고 받지 않았던 것일까.
 
[丁卯, 饗慕施蒙等於朝堂, 授位賜祿各有差.]
정묘(27일)에 모시몽 등에게 조당에서 연회를 열어주고 관위와 녹을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속일본기(續日本紀)》권제19, 천평승보(天平勝寶) 5년(753) 5월
 
이 무렵 일본을 다스리고 있던 것은 효겸(孝謙, 고켄) 여제.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던 성무 천황은 광명(光明, 고묘) 황후 소생의 황녀였던 그녀를 일본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성 황태자'로 봉했고, 성무 천황의 양위로 그녀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천황의 지위에 오른 것.
 
[六月丁丑, 慕施蒙等還國, 賜璽書曰 "天皇敬問渤海國王. 朕以寡徳虔奉寳圖, 亭毒黎民, 照臨八極. 王僻居海外, 遠使入朝. 丹心至明, 深可嘉尚. 但省來啓, 無稱臣名. 仍尋高麗舊記, 國平之日, 上表文云, 族惟兄弟, 義則君臣. 或乞援兵, 或賀踐祚, 修朝聘之恒式, 効忠款之懇誠. 故先朝善其貞節. 待以殊恩, 榮命之隆, 日新無絶. 想所知之, 何假一二言也. 由是, 先廻之後, 既賜勅書. 何其今歳之朝, 重無上表, 以礼進退, 彼此共同. 王熟思之. 季夏甚熱, 比無恙也. 使人今還, 指宣往意. 并賜物如別.]
 
6월 정축(8일)에 모시몽 등이 환국하였다. 새서를 내려 말하였다.
"천황(天皇, 미카도)은 공경히 발해 국왕께 묻소이다. 짐은 부덕하나마 보도(寶圖)를 받들어 백성을 어루만져 기르고 천하에 군림하고 있소. 왕께서는 후미진 곳에 살면서 바다 멀리서 사신을 보내 입조하였소. 붉은 마음이 밝게 비추어 몹시 가상히 여길만 했소. 다만 보내온 계(啓)를 살피니 신하를 칭하지 않았더구료. 거듭 《고려구기(高麗舊記)》를 살폈으나 나라가 평안하던 날에 올리던 표문에서 족(族)은 형제라 운운했지만 의(義)는 곧 군신(君臣)이었소. 원병을 청하기도 하고, 천조(踐祚)를 축하하기도 하며 조빙의 항식(恒式)을 닦아 충심과 성의가 간절하고도 성실했소. 때문에 선조(先朝)께서는 그 정절을 아름답게 여겼소. 특별한 은혜를 갖고 영명지륭(榮命之隆)하여 일신(日新)이 끊이지 않았소. 이를 생각한다면 어찌 한두마디라도 거짓을 흘리겠는가. 이런 이유로 먼젓번 뒤로 이미 칙서를 주었었소. 이렇게 지금의 조정에 거듭 표문을 올리지 않으니 예의 진퇴(進退)는 피차 마찬가지요. 왕께서는 이를 깊이 생각해주시오. 계하(季夏)가 점점 더워지는데 별탈 없으시기를. 사신이 지금 돌아가면 그 간 뜻을 마땅히 밝히리니. 아울러 내리는 물건은 별지와 같소."
《속일본기(續日本紀)》권제19, 천평승보(天平勝寶) 5년(753)
 
《고려구기》. 왜에서 편찬한 고려관련 사행기록인지 아니면 왜로 망명한 고려인들이 갖고 있던 옛 고려의 역사책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이 책을 가지고 효겸 여제가 발해에 항의한 내용은 흠무왕이 자신을 향해 신하라고 칭하지도 않고 형제라고 불렀다는 것이었다. 발해왕이 형으로서 아우인 일본 천황에게 국서를 보낸다ㅡ 기분상할 일이긴 하다. 
 
허나 발해의 국왕에게 항의하는데 《고려구기》를 인용해 고려와 왜국의 옛 관계를 들먹였다는 《속일본기》의 이 내용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오늘날 발해가 고려 지향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던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먼젓번에 무왕이 보냈던 국서에서 '고려의 옛 땅을 차지했다'고 말했던 그 구절을 아직도 잊지 않은 일본이 발해를 고려의 부흥국으로 인식하고 또 발해측에서도 그렇게 어필을 하려 애썼던 흔적이기에.(필자는 한문 실력이 형편없어 저 정도밖에 번역하지 못하니 용서해주시기를.;;)
 
《책부원귀》에는 대흥 계사(753)부터 갑오(754)까지 일본에 사신을 보내는 동안 당조의 정월하례에도 발해 사신이 참석했다고는 하는데, 정작 발해의 내부사항이 어떠했었는지 적을수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쉽고 안타깝기만 하다. 이런 찌꺼기 같은 기록이나마 주워모아서 역사 이야기를 하는 나 자신이 너무 싫다. 노래 가사처럼 '죽을 만큼 내가 싫다 싫~다~'
......나 근데 뭐하는 거지?
 
[天寶末, 徙上京. 訖玄宗之世, 凡二十九朝唐.]
천보 말년에 수도를 상경(上京)으로 옮겼다. 현종이 다스리는 동안 모두 스물 아홉 번을 당에 조공하였다.
《발해고》 군고(君考), 문왕
 
흠무왕이 수도를 옮긴 것은 천보 말년ㅡ대략 대흥 19년 을미(755년)쯤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흔히 '상경용천부'로 기억하는 상경은 이후 대흥 48년(785)에 잠시 동경으로 옮겼던 것을 빼고는 인선왕 때에 이르러 발해가 거란에게 공격당해 파괴되기까지, 발해 역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기간 동안 수도로서의 역할을 했던 곳이다.
 
지금의 중국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동경성진)에 상경의 옛 터가 있다. 주위로 수백 리 되는 널찍한 분지 한복판에다 고려식의 도성을 만들고, 주위에는 왕릉급 고분군과 대목단둔성 같은 방어성을 두었다. 기분나쁘게도 이곳이 상경 옛 터라고 밝혀낸 것은 일본 학자들이었다. 시라토리 구라키치, 도리야마 기이치, 사이토 진베이 같은 학자들이 이곳을 답사했고, 일본이 만주 지역을 점령해 만주국을 세우고서 한창 대륙침략에 열을 올리던 1933년과 1934년에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졌으며, 1940년과 1942년에 도리야마 기이치가 상경의 절터를 발굴하면서 이곳이 옛 상경 터임이 명확해졌다.
 
고려 때에는 이곳이 다소 미개발지역으로 남아있었던 듯 싶지만, 상경은 발해가 수도로 삼았던 다른 지역들에 비해서 훨씬 수도로서의 입지조건을 유리하게 갖춘 곳이었다. 특히 이곳에는 사방이 탁 트여있는 넓은 평지가 있었고, 중경 못지 않게 질 좋은 곡식이 많이 나오는 곳이었다. 상경 지역은 비교적 추운 지방임에도 불구하고 논밭 수온이 벼의 성장에 알맞단다. 벼농사도 잘되고 벼의 질도 좋고. 만주국 시대에도 황제 부의가 여기서 쌀을 가져다 먹었다던가? 오늘날까지도 만주 지역에서 이곳 쌀은 좋은 품종으로 표창까지 받을 정도의 고품질을 자랑한다.
 
연변 지역 동포들의 구전에 보면, 상경을 수도로 삼게 된 데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옥루하(목단강) 안변에 김씨성을 가진 유명한 풍수가 살고 있었다. 어느 하루 풍수가 아침 노을을 바라보면서 천기를 살펴보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번개불처럼 눈부신 빛이 번쩍하고 비치더니 맑은 하늘에서 꽝하고 우뢰소리가 들려왔다.
"웬일일까?"
풍수는 하도 이상스러워 지붕에 올라가 두리번거리며 사방을 살펴보았다. 저 멀리 쑥대우거진 벌판에 실안개가 일고 그 우에 자기가 떠돌고 있었다.
"야! 저렇게 좋은 명당이 코 앞에 있는 줄을 몰랐댔구나."
풍수는 자신을 책망하면서 지붕에서 내려왔다. 그런데 아무 일도 없던 풍수가 해질녘부터 갑자기 사지를 못쓰고 자리에 눕더니 밤중 해시경이 되면서부터 신음소리 한마디 못하고 저승으로 가게 되였다. 아들과 며느리는 아버지 앞에 꿇어앉아 대성통곡 하면서 재삼 물어 보았다.
"아버지 이렇게 갑자기 떠나시면 우리는 아버지를 어데다 모셔야 합니까? 미리 보아두신 혈이 있으면 어서 말씀하시고 눈을 감으시오."
풍수는 기진맥진한 입속말로 말했다.
"저 쑥대 우거진 벌판 한복판에 나를 묻어다오. 그러면 너의 후손들은 화를 면하고 복할 것이다."
아들 내외는 아버지의 유언대로 쑥밭 한복판에 아버지를 모셨다. 다음해 단오날 아들 내외는 첫아들을 보았는데, 갓난애의 몸에는 령기가 차넘치고 눈부신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과연 아버지의 말씀이 틀림없구나."
두 내외는 기뻐서 어쩔 바를 몰라했다.
<중국조선족구전설화> p322~323, '상경용천부' 中
 
하지만 누가 그랬었지 좋은 일엔 항상 액이 낀다고.
 
그런데 바로 이날 이때 당나라 서울 장안에 있던 감천사가 천기를 살펴보니 북녘의 홀한수 주변에서 진룡이 태여난 기상이 보였다.
"이 놈을 더 크기 전에 없애 버려야 내 나라가 태평무사하겠다."
감천사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이 일을 상주했다. 이리하여 감천사가 통솔하는 당나라 군졸들이 홀한수에 몰려와 쏘다니면서 진룡이 태여난 곳을 찾게 되였다. 어느 하루 옥루하를 따라 내려오던 그들은 강 건너에서 자기가 돌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놈이 여기에 있었구나!"
감천사는 말을 달려 강을 건넜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어느 한집 지붕 우에 삼척동자가 서있는데, 그애의 몸에서 빛이 반짝이고 주변에는 자기가 돌고 있었다.
"이놈이 하루에 한 자씩 자랐구나!"
감천사는 그 집에 불을 지르고 진룡을 태워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이 일을 예감한 아이는 급히 어머니를 부르며 지붕에서 굴러내려왔다.
"어머니, 나쁜 놈들이 나를 죽이려구 집 뒤에 숨어 있어요."
이 소리에 어머니가 달려나와 보니 땅바닥에 쓰러진 어린애는 신음소리를 내면서 거의 숨져가고 있었다. 아이의 몸에서 빛나던 광채는 사라져가고 점점 흑황색 룡무늬가 돋아나더니 숨지고 말았다. 마당에서 통곡소리가 나자 감천사는 군졸을 데리고 급히 달려왔다. 땅바닥에 쓰러진 진룡을 보고 나서야 감천사는 일이 뜻대로 되였다고 기뻐하면서 군졸들을 휘몰아가지고 서울 장안으로 돌아갔다.
<중국조선족구전설화> p323~324 '상경용천부' 中
 
이 전승 속에서 당에 대한 시각은 고려인들이 당을 대하던 시각 그대로다. 조국을 멸한 나라에 대한 반감. 장차 나라에 큰일을 하게 될 인물이라, 자국에 위협을 가하게 될 것을 두려워한 적국에서 사람을 시켜서 끝내 그 아이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재미있는 건 여기에서는 예의 그, 당의 감천사(監天使?)라는 사람이나 그가 데려온 당병은 아무 것도 한게 없다는 거. 애는 그냥 죽은 거다. 병도 없고 칼이나 활로 치지도 않았는데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갑자기. 손 안 대고 코 풀었으니 지네들만 횡재한거지 뭐.
 
내외는 죽어서 구렝이로 변한 아들이였지만 관 속에 넣어서 지성껏 장사를 치렀다. 그들은 아들애의 시체를 아버지의 무덤 앞에 묻어 주었다. 백날이 지나서 추석날이 되였다. 내외는 아버지의 산소에 찾아가 제사를 지내면서 고통스러운 사연을 털어 놓았다.
"아이고, 아버지께서는 어찌하여 그리도 무정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갓난 손자마저 다려가시나이까. 아이고, 아이고, 무정도 하시외다."
그 애절한 울음소리에 산천초목도 슬퍼했으리라. 그런데 이때 아들의 무덤 속에서 우뢰소리 같은 굉음이 울리더니 무덤이 쫙 갈라지면서 눈부신 빛이 번쩍하며 진룡이 솟아나와 하늘로 훨훨 날아오르면서 말하는 것이였다.
"부모님들이 룡천에 묻어 준 덕분으로 저는 백날 동안 수련하고 오늘 진룡이 되여 승천하게 되였습니다."
내외는 승천하는 진룡을 대견스레 우러러보다가 아들의 무덤자리에 가 보았다. 무덤자리에는 맑은 물이 고여 있었다. 이때로부터 내외는 진룡을 낳아 키운 부부라고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되였고 가난하던 살림살이도 펴이게 되였다.
<중국조선족구전설화> p324 '상경용천부' 中
 
5월 5일 수릿날에 태어난 아이는 죽고 석 달이 지난 8월 보름에 다시 살아나 하늘에 올랐다. 예수는 사흘 만에 무덤에서 스스로 나와서 제자들 만나고 하늘로 올라갔다던가. 어차피 구전설화니 구태여 사실 여부 따져보고 합리적인 해석이랍시고 갖다대고 할 것은 없지만 본인 입으로 백날이라 했는데 8월 보름을 기점으로 1백 일을 톺아(북한말로 '거슬러'라는 뜻) 계산해보면 한 달을 30일이라고 쳐도 보름(15일)+7월 한 달(30일)+6월 한 달(30일)+5월 한 달에서 닷새 빼고 나머지 날들(25일)인데, 5일로부터 꼭 1백 일이 되기는 하지만 시간대가 도저히 맞지 않는다. 당의 감천사가 알고 군사를 보냈어도 장안에서만 한 달을 걸려야 상경까지 올 수 있는 거리인데 태어나고 바로 군사를 보내고 있잖아 저건. 민간전승이었기 망정이지 다른 거였으면 큰일날뻔 했다.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이 소문은 드디여 발해왕 대흠무의 귀에까지 미치게 되였다. 문왕 대흠무는 이 소문을 듣고 하도 신기하여 문무재상들과 풍수를 거느리고 진룡이 승천했다는 룡천을 찾아떠났다. 어느 하루 수행하던 풍수가 문왕 앞에 무릎을 꿇고 상주하였다.
"전하께 아뢰나이다. 소신이 산국(山局)을 살펴본즉 북쪽에 조종산이 우뚝 솟아있고 그 밑에 주산이 서 있으며 좌우에 청룡백호가 둘러싸고 그 안으로 옥루하, 마련하가 흐르며 남쪽으로 조산이 바라보이니 저곳은 과연 천하에 둘도 없는 명당성지라고 아뢰나이다."
문왕이 룡마를 달려 쑥대 우거진 벌판에 가 보니 과연 진룡이 승천한 룡천이 있었다. 문왕은 룡안에 희색을 띠우며 문무재상들에게 성지를 내렸다.
"발해의 성지는 과연 여기로다. 동원부를 파하고 여기에 상경을 세워 용천부라 할지어다."
이렇게 되여 이곳에 재간있는 목수, 석공들이 모여와서 궁전을 짓고 토성을 쌓았는데, 몇 년 후에는 동방에서 두 번째로 큰 도읍지로 되였고 발해국은 날로 흥성하여 세상사람들로부터 해동성국이라는 미명을 받게 되였다고 한다.
<중국조선족구전설화> p324~325 '상경용천부' 中
 
 뭐, '용천부(龍泉府)'라는 이름의 유래를 설명하는 데는 하나의 자료가 될수 있겠지.
 
상경으로 천도하면서 흠무왕은 호실이나 월희, 불열, 그리고 흑수 같은 말갈 제족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고자 했고, 이곳에 당의 왕경제를 모방한 장방형의 대규모 도성을 건립하게 된다. 상경의 도성은 북쪽의 궁성(황궁 권역)과 남쪽의 황성(관청 권역)을 합쳐서 내성이라 부르고, 다시 방어용으로 둘러쳐서 쌓은 외성의 크기는 총 16,296.5M. 이곳에서는 적어도 80만, 많게는 120만 명 정도의 인구를 수용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성 주위로는 장광재령과 노야령 같은 언덕이 있고, 성 서쪽으로는 홀한해(경박호)와 홀한수(목단강)가 돌아 흐르고 있어 해자 구실도 한다. 상경의 구조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더 조사를 해서 말을 해야 되겠지만, 단순히 내정개혁만을 위해서 도읍을 옮긴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주변에서 일어나던 불온한 정세와도 관련이 있다.
 
천보 말년, 엄청난 광풍이 중국 대륙을 휩쓴다. 당 현종의 근신이었던 안록산과 사사명이 일으킨, 이른바 '안사의 난'이 그것이다. 화려한 성당(盛唐) 시대의 몰락과 함께 당조의 운명이 상향에서 하향곡선을 그리게 되는 분기점이 되었다고 전하는 이 반란은, 당조가 그 화려한 '성세'의 이면에 숨기고 있던 대내외적 모순이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기도 했다.
 

<안록산에게 쫓겨 촉으로 몽진하는 현종 황제와 양귀비. 안록산의 난으로 천자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

당조의 지배체제를 지탱해주던 율령제가 변질되고, 균전제 및 조용조 세제의 이완, 개원 말기의 부병제의 붕괴 등의 변화는 당조를 지탱하던 자영농층(중산층)의 와해를 가져왔다. 당조는 그들의 중요한 세원인 자영농이 토지를 잃고 유민이 되어 떠도는 사태를 막아보고자 귀척들이 갖고 있던 재산에 세금을 물리기도 하고, 모병(募兵)의 조직화도 시도했지만 소용없었다. 관료층 내부에서도 신진세력, 그러니까 대토지 소유, 상업자본 이용 등을 토대로 재력을 쌓아 새로 정계에 진출한 대지주·호상(豪商) 출신의 신흥 관료층이 전통귀척들과 대립하면서 정치는 복잡하게 전개되었다.(즉 서로간의 이해관계가 처음부터 어긋날 수밖에 없었다는 거지.)
 
천보 말년에는 새로이 '번진'들이 실세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원래 당의 군사체제는 지휘부 격인 '도호부'를 중심으로 변경 각지에 설치된 진(鎭)을 통해 국경을 방어했는데, 7세기 이후부터 점차 이민족들이 강성해지면서 도호부 중심의 방어체계가 한계를 드러내게 되자, 당 조정은 진과는 별도의 방어거점으로 수천 명 단위의 '군진'을 각 요충지마다 배치했다. 현종 중기에 이르러 '군진'은 '진'을 넘어서는 수준으로 비대해져서 10만을 겨우 넘는 진과는 달리 50만을 웃도는 군진을 통제하기 위해서 군진의 상위에 둔 것이 '번진(藩鎭)'이고, 이 번진의 수장이 '절도사'였다. 742년까지 당의 주요 거점에는 여러 번진이 설치되었는데, 710년에 토번(티벳)과 돌궐(투르크)을 막기 위해 양주에 둔 하서절도사와 거란을 막기 위해 유주에 세운 범양절도사를 시작으로 용우의 용우절도사(714), 성도의 검남절도사(717), 쿠차의 안서절도사(718), 명주의 삭방절도사(721), 태원의 하동절도사(723), 북정의 북정절도사(741)를 거쳐 마지막으로 742년에 영주 지역에 평로절도사를 두어 모두 열 개의 번진이 설치된다.
 
당조는 이민족들에게 비교적 관대한 편이었다는 것을 앞서 설명했다. 안녹산은 이러한 배경에서 성장했다. 당시 당조의 동북변에 해당하는 유주(幽州)·평로(平盧)·하동(河東)의 절도사를 겸임하며 세력을 키웠는데, 유사시에는 10만이나 되는 군사를 명령 한 번으로 총동원할 수 있을 정도였다나(현종의 근위부대는 3만 정도). 

정무에 지친 현종께서는 자기 딸, 아니지 손녀뻘인 양귀비와 좋아 지내시고, 자기 누이동생 빽으로 재상이 된 양국충이 안녹산과 대립하게 되는데, 이 양국충이라는 자가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킬 것 같다'고 현종에게 곤질렀단다. 이게 안록산의 귀에 들어간거지. 결국 천보 14년(755년) 11월, 안녹산은 거란·철륵 등 이민족 정예기병 8천을 앞세우고, 한병(漢兵)·번병(蕃兵) 모두 합쳐 20만 대군을 이끌고 '간신 양국충 토벌'을 구실로 범양(范陽)에서 거병, 곧바로 당의 동도(東都) 낙양(洛陽)으로 진격하기에 이른다. 결국 한 달도 안 되어 낙양은 안록산에게 함락되었고, 이듬해인 천보 15년(756), 안록산은 낙양에서 성무(聖武)라는 연호를 선포하고 새로이 대연(大燕)이라는 나라를 세워, 스스로 대연성무황제라 일컬었다.


<안록산이 수도로 삼았던 낙양. 당은 낙양에 동도(東都)를 두고 서도(西都) 장안과 함께 양경체제를 구비했다.>
 
당조는 서북쪽에 있던 방위군을 동쪽으로 이동시켜 안록산을 토벌하게 했는데, 이 과정에서 현종은 장안을 떠나 지금의 사천 땅인 촉(蜀)의 검남으로 몽진하기에 이르렀고, 양귀비는 가던 길에 현종의 호위병들에게 목졸려 죽었다. 모든 책임이 그녀와 양국충에 있다고 생각한 그들 나름의 나라를 위한 선택이었다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미 시작된 반란은 여자 한 명 죽인다고 끝날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중국 대륙을 9년 동안이나 불바다로 만든 '안록산의 난'은 지금까지 당조가 이면에 감추고 있던 자기모순들이 표면으로 불거져나오기 '시작'한 것에 불과했으니.
 
여담이지만 양귀비의 목을 직접 조른 장본인은 현종의 환관 고력사(高力士). 이 남자는 원래 풍씨였다가 내관 고연복(高延福)의 양자가 되면서 성을 고씨로 바꾼 것으로, 고연복은 원래 고려의 왕족으로서 당에 끌려가 환관이 된 자였다.
 
[肅宗至德元載, 平盧留後徐歸道, 遣果毅都尉行柳城縣四府經略判官張元澗來聘曰 "今載十月當擊安祿山, 王須發兵四萬來援平賊." 王疑其有異留之.]
숙종 지덕 원년(756)에 평로유후(平盧留後) 서귀도(徐歸道)가 과의도위(果毅都尉) 행유성현사부경략판관(行柳城縣四府經略判官) 장원간(張元澗)을 보내 조빙하며 말하였다.
"올해 10월에 마땅히 안록산을 칠 것이니, 국왕은 모쪼록 4만 병사를 내어 적을 평정하는데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왕은 이상하게 여기고 의심하여 머무르게 했다.
《발해고》 군고(君考), 문왕 대흥 20년(756)
 
756년 6월에 장안이 안록산의 손에 넘어갔다. 이 무렵 산동 지역에 설치되어있던 평로군의 절도사 유정신의 휘하 부장이었던 평로유후 서귀도는 안록산을 토벌하기 위해서 발해에 군사를 요청했지만, 발해 조정은 서귀도를 발해에 '억류'시키는 선에서 그쳤을 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했다. 아니, 개입하지 않으려 했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평로군은 안록산의 관할지였다는 점도 작용했을 듯)
 
어느 시대나 다른 나라에 파병하는 것은 꼭 실만 있는 것도 아니지만 득만 있는 것도 아니다. 더욱이 우리같이 작고 별볼일 없는 나라들은 되도록이면 다른 나라 집안일(특히 전쟁)에는 간섭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바다. 후대의 일이지만 임진왜란 때만 하더라도 조선과 일본이 싸우는데 명이라는 대국이 개입해서 조선의 편에서 7년을 같이 싸워줬지만 결국 그것이 명조 몰락과 아이신[後金]ㅡ훗날의 청조가 대륙을 차지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이고, 아이신과 명의 '힘의 격차'를 제대로 가늠한 광해군이 명조의 원병 요청을 받고도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강홍립을 보내면서 '시세를 봐서 향배를 결정하라'고 한 것도 마찬가지다. 어느 나라에서 무슨 이유로 벌어지는 싸움이든 전쟁은 '전쟁'이다. 온갖 '폭력'과 '살육'의 총집합장소, 국적을 막론하고 천신도 부처도 예수도 공자도 무함마드도 '되도록 하면 안 된다'라고 강조한 인간의 가장 '야만적이고 비상식적인' 부조리와 불합리의 총체적 결집장소가 바로 전쟁터라는 곳이다.
 
두 사람이 싸우는데 어느 한 쪽의 편을 들게 되면 그 편든 쪽의 우호를 살 수는 있을 것이다. 때문에 되도록이면 '향배를 봐서' 편을 드는 것이 현실적인 판단이라고는 한다. 하지만 다른 한 편의 우호를 사면서 자동적으로 다른 한 편의 '원한'을 사게 된다는 것을 떠올리면,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힘들어진다. 물론 누가 먼저 잘못했는지, 현실적으로 누가 더 센지를 바보한테 보여도 '이거다'라고 짚어낼 수 있을 정도라면 불가피하게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것은 '자신의 안위를 위한 결정'이 될 수 있겠지만, 힘센 사람이 계속 힘센 것도 약한 사람이 계속 약하고 비실비실하게 사는 것도 아니잖아.
 
1960년대 베트남 전쟁만 하더라도 미국이 우리에게 '우방'을 강조하면서 원병 파병을 요청하고 "우리에게는 강한 군대가 100만이 있습니다"며 박통이 원병파병을 결정했을 때, 우리 정부가 파견한 군대는 '경제개발'을 위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서 베트남에 '떠밀려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지금도 베트남에는 '하늘까지 가 닿을 죄악을 기억하라'고 한국군을 증오하는 비석이 전국 각지에 무슨 공동묘지마냥 서있고, 오늘날까지도 '실패한 전쟁'으로 평가받는 이 전쟁에서 사람 죽이고 주워모은 '피묻은 돈'으로 경제발전을 이룩한(지금 우리가 잡은 컴퓨터 마우스와 키보드, 번쩍거리는 자동차, 높은 빌딩을 만든 돈마저도 그 피가 흘러든 것일수 있다) 우리는 '미국의 용병'이라는 씻을 수 없는 오명만 역사에 남기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아무리 우방이라도 처음부터 '선'을 긋는 것이 중요하다고 해야 할까. 다른 나라에 파병하는 것만은 '신중에 신중을 거듭한다', '가장 현실적인 결정을 내린다' 하는 번드르르한 말 집어치우고 될수 있으면 무조건 '안 한다'는 전제하에서 고민을 해야 하는 것이다.
 
흠무왕의 우려는 곧 현실이 되었다.
 
[十二月丙午, 歸道果○劉正臣, 于北平. 潛與祿山幽州節度使史思明, 通謀擊唐. 安東都護王志玄知其謀, 率精兵六千餘人, 攻破柳城斬歸道. 自稱平盧節度, 進屯北平, 四載四月. 志玄遣將軍王進義來聘曰 "天子已歸西京. 迎太上皇于蜀居別宮. ○滅賊徒, 故遣下臣來告." 王爲其事難信, 留進義, 別遣使詳問. 肅宗賜王勅書一卷.]
12월 병오에 귀도가 과연 유정신(劉正臣)을 독살하고 북평(北平)으로 향했다. 그곳에 진을 치고 있던 안녹산과 유주절도사(幽州節度使) 사사명(史思明)에게 신하가 되어 복속하고, 통모하여 당을 치려 했다. 안동도호(安東都護) 왕현지[王志玄]가 이 음모를 알고서 정병(精兵) 6천여를 거느리고 유성(柳城)을 깨뜨리고 서귀도를 죽였다. 스스로 평로절도(平盧節度)라 칭하며 북평으로 나아가 주둔하기를 4년 4개월. 왕현지는 왕진의 장군을 보내어 내빙하고 말하였다.
"천자께서는 이미 서경(西京)으로 돌아오셨소. 촉에서 태상황을 맞이하여 별궁에 거하게 했소. 적의 무리를 멸하느라 수고하셨기로 저를 내려보내어 이르게 하셨소."
왕은 이 일을 믿을 수 없다고 여기고 별도로 사신을 보내어 자세히 물었다. 숙종은 왕에게 칙서 한 권을 내려주었다.
《발해고》 군고(君考), 문왕 대흥 20년(756)
 
비록 군(郡)으로 불리기는 하지만 당조의 번진도 아니고, 그렇다고 부용된 처지도 아닌 자주국으로서 흠무왕의 선택ㅡ안록산의 난에 어떤 구실을 댔든지간에ㅡ원병을 파병하거나 당조에 대한 동조를 보이지 않은 것은 무척 현명한 선택이었다. 기실 주변 번국은커녕 자기네들 내지의 번진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진 당조를 위해 군사를 낼 이유는 없었다. 더구나 흠무왕에게 함께 안록산을 치자고 건의하던 평로유후마저 자신이 섬기던 당조를 등지고 안록산에게 가서 붙는 판에.
 
서귀도가 나중에 변심했다가 당의 관군에게 붙잡혀 죽은 그 사건은 문왕이나 발해 당국에게는 당에서 벌어지는 내전에 개입하지 않을 '구실'이 되어 주었다. 당조에서 보내는 구원요청을 거절할 구실. 이후 당에서 어떤 사신을 보내든지 '너희가 정말 당 황제의 부하인지 아닌지 내가 어떻게 알아?'라면서 뻗튕겨버리면 그뿐이다. 오죽했으면 당 숙종이 칙서까지 보내가며 자신이 보낸 사신이 맞다는 것을 '보증'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하지만 말이야 바른 말로 흠무왕에게 전해진 칙서가 위조된 것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이게 진짜 당 황제가 보낸 것이 아니면 니들이 책임질 수 있어? 흠무왕이나 발해 사신들이 당의 사신 앞에서 대놓고 그랬을 리야 없겠지만서도 '분위기'라는 것이 있으니까, 발해에서 자신을 당의 사신이라고 100% 믿고 있지 않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어쩌면 발해가 당조의 몰락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란 것도 알고 있겠지) 흠무왕에게 구원요청을 한 '안동도호' 왕현지라는 자도 결국, 앞서 서귀도가 그랬던 것처럼 제멋대로 선대 평로절도사 유정신의 자리를 차지한 그를 죽인 뒤 다시 스스로 평로절도사를 자칭하면서 무려 4년이 넘도록 북평에서 주둔하고 있지 않았던가.
 
왕현지가 서귀도를 죽일 때, 그의 옆에는 후희일이 있었다. 옛날 당으로 끌려온 고려인의 후예이자, 훗날 평로치청이라는 독립왕국의 초대 군주가 될 이정기의 고종사촌 형이기도 한 그가 왕현지와 함께 서귀도를 내쫓고 왕현지를 평로절도사로 추대했다. 발해와 고려 그리고 또 하나의 고려 역사를 전개할 인물의 대두를 뜻하기도 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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