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이 길어 "6) 청산리독립전쟁"의 "(2) 완루구전투"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6) 청산리독립전쟁
(2) 완루구전투
근대사료DB > 한민족독립운동사 > 독립전쟁 > Ⅰ.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3.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독립전쟁 > 6) 청산리독립전쟁 > (2) 완루구전투
청산리독립전쟁의 두번째 전투는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과 그 연합부대들(국민회군·한민회군·신민단·의민단·광복단)이 얼다오고우/이도구 완로우고오/완루구에서 1920년 10월 21일 늦은 오후부터 22일 새벽에 걸쳐 일본군과 대전해서 기계(奇計)를 발휘하여, 다른 일본군 한 토벌대를 끌어 넣어서 일본군 히가시/동지대의 한 부대를 섬멸한 대전투였다. 이 전투는 이도구 위랑/어랑촌 서북방 북완루구와 남완루구 사이의 삼림지대에서 전개되었다.
* 기계(奇計) : 기묘한 꾀
당시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는 완루구전투의 진상을 다음과 같이 발표 하였다.
당시 적의 지대(보병일대대/步兵一大隊, 기관총삼중대/機關銃三中隊)는 양로(兩路)로 나뉘어서 하나는 남완루구로, 또 하나는 북완루구 서편으로 향하여 아군 제1연대(홍범도연합부대/洪範圖聯合部隊……필자)를 포위공격하려는 중 아군의 동 연대는 정찰척후의 찰보(察報)를 듣고 이미 배치하였던 저항선이 전투를 시작함과 동시에 우리 예비대는 삼림 중간로를 우회하여 적의 좌우를 돌연히 사격하던 중 북완루로 진격하던 적의 일대는 오히려 아군이 중앙고지에서 자기의 우군(友軍)과 싸우는 줄 오인하고 적이 적군을 맹사하니 아군과 적군에게 포위공격을 받은 일대는 전멸하였는데 그 수는 400여 명이더라.註 060
* 찰보(察報) : 정찰/감찰하여 보고함
이 기록을 주의 깊게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① 북로군정서 독립군이 갑산촌으로 철수하는 그 시간에 다른 곳인 얼다오고우/이도구 완로우고우/완루구에서는 일본군 히가시/동지대 본대의 대부대가 2개 부대로 나누어 홍범도가 인솔하는 독립군 연합부대를 포위하여 남완루구와 북완루구의 양로로 좁혀들어 오고 있었다.註 061
② 홍범도의 독립군연합부대는 정찰병으로부터 이 보고를 받고 이미 배치한 저항선에서 전투를 시작하는 한편, 예비대로 하여금 삼림의 중간로를 돌아서 일본군의 측면을 공격하게 하였다.
③ 북완루구로 진격하던 일본군의 다른 한 부대는 홍범도 연합부대의 예비대가 이미 삼림의 중간로를 빠져 나와서 측면에 위치하게 된 것은 알지 못하고, 따라서 중앙고지의 위치에 있는 것은 일본군의 한 부대임을 알지 못하고, 중앙고지에 있는 것이 여전히 독립군인 줄 알고 중앙고지에 있는 일본군에게 사격을 가하였다.
④ 이에 중앙고지에 위치하게 된 일본군은 한쪽 측면에서는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의 공격을 받고 다른 측면에서는 일본군 다른 부대의 공격을 받아 양면의 협공을 받은 결과 전멸 상태에 빠졌는데, 그 일본군 부대의 전사자가 400여 명에 달하였다.
⑤ 일본군이 이 완루구전투에서 한 부대 400여 명이 전멸한 것은 일본군 부대들끼리의 ‘자상(自傷)’에만 의한 것이 아니라,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의 공격을 받아서, 독립군과 다른 일본군 부대의 협공을 받은 결과였다. 또한 일본군끼리의 자상도 독립군의 능동적 유인작전에 빠져 들어 위치를 오인했기 때문에 나온 결과였다.
* 자상(自傷) : 일부러 자기의 몸을 상하게 함. 자해(自害)
상해에서 발행되던 당시의『진단(震檀)』은 완루구전투에 대하여 다음 과 같은 요지로 그 내용을 기록하였다.
즉 ① 일본군이 삼림의 중심지대에 있는 홍범도연합부대를 포위하고 기관총대를 매복시킨 다음 삼림에 불을 놓아 홍범도부대가 탈출할 경우 이를 섬멸하려고 했으며,
② 홍범도연합부대는 다른 통로를 이용하여 포위망을 뚫어 탈출해 버리고 다른 일본군부대가 홍범도부대를 추격하여 중심지대에 진출한 결과, 잠복하고 있던 일본군기관총대는 이를 홍범도의 독립군으로 오인하여 기관총으로 섬멸했으며
③ 홍범도부대는 이 기회를 타서 다시 일본군을 추격하여 두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사실이다.註 062 상해 임시정부도 위와 유사한 내용을 등사인쇄물로써 보고하였다.註 063
청산리독립전쟁의 두번째 전투인 완루구전투는 홍범도가 지휘한 대한 독립군, 국민회군, 한민회군, 광복단군, 신민단군, 의민단군 등 독립군 연합부대가 기계를 써서 이룩한 대승전이었다.
주
註 060 주 58)과 같음
--> 註 058 『독립신문(獨立新聞)』(제88호/第88號), 1920년(年) 12월(月) 25일자(日字), 「북간도(北墾島)에 재(在)한 아독립군(我獨立軍)의 전투정보(戰鬪情報)」참조.
註 061 「10월중의 정보에 의거한 간도지방불령선인행동개황(月中ノ情報ニ據ル間島地方不逞鮮人行動槪況)」간정(間情) 제(第)59호(號), 1920년(年) 11월(月) 10일자(日字), 강덕상 편(姜德相編),『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28, p. 403 참조.
註 062 『진단(震檀)』 제(第)6호(號), 1920년(年) 11월(月) 14일자(日字), 강덕상 편(姜德相編), 『현대사자료(現代史資料)」 28, p. 349
註 063 「국외정보(國外情報)」고경(高警) 제(第)37231호(號), 1920년(年) 11월(月) 25일자(日字), 김정명 편(金正明編), 앞 책, p. 126 참조.
'근현대사 > 독립운동' 카테고리의 다른 글
6) 청산리독립전쟁 : (4) 어랑촌전투 - 근대사료DB (1) | 2024.11.08 |
---|---|
6) 청산리독립전쟁 : (3) 천수평전투 - 근대사료DB (0) | 2024.11.07 |
6) 청산리독립전쟁 : (1) 백운평전투 - 근대사료DB (0) | 2024.11.07 |
6) 청산리독립전쟁 - 근대사료DB (1) | 2024.11.06 |
(3) 조국광복회의 결성과 ‘항일민족통일전선’의 확산 - 우리역사넷 (6) | 2024.1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