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98>후고려기(後高麗記)(11) - 광인"에서 안사의 난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출처 : http://blog.naver.com/spiritcorea/130047172987
안사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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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사의 난
천보 말년, 엄청난 광풍이 중국 대륙을 휩쓴다. 당 현종의 근신이었던 안록산과 사사명이 일으킨, 이른바 '안사의 난'이 그것이다. 화려한 성당(盛唐) 시대의 몰락과 함께 당조의 운명이 상향에서 하향곡선을 그리게 되는 분기점이 되었다고 전하는 이 반란은, 당조가 그 화려한 '성세'의 이면에 숨기고 있던 대내외적 모순이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기도 했다.
<안록산에게 쫓겨 촉으로 몽진하는 현종 황제와 양귀비. 안록산의 난으로 천자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
당조의 지배체제를 지탱해주던 율령제가 변질되고, 균전제 및 조용조 세제의 이완, 개원 말기의 부병제의 붕괴 등의 변화는 당조를 지탱하던 자영농층(중산층)의 와해를 가져왔다. 당조는 그들의 중요한 세원인 자영농이 토지를 잃고 유민이 되어 떠도는 사태를 막아보고자 귀척들이 갖고 있던 재산에 세금을 물리기도 하고, 모병(募兵)의 조직화도 시도했지만 소용없었다. 관료층 내부에서도 신진세력, 그러니까 대토지 소유, 상업자본 이용 등을 토대로 재력을 쌓아 새로 정계에 진출한 대지주·호상(豪商) 출신의 신흥 관료층이 전통귀척들과 대립하면서 정치는 복잡하게 전개되었다.(즉 서로간의 이해관계가 처음부터 어긋날 수밖에 없었다는 거지.)
천보 말년에는 새로이 '번진'들이 실세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원래 당의 군사체제는 지휘부 격인 '도호부'를 중심으로 변경 각지에 설치된 진(鎭)을 통해 국경을 방어했는데, 7세기 이후부터 점차 이민족들이 강성해지면서 도호부 중심의 방어체계가 한계를 드러내게 되자, 당 조정은 진과는 별도의 방어거점으로 수천 명 단위의 '군진'을 각 요충지마다 배치했다. 현종 중기에 이르러 '군진'은 '진'을 넘어서는 수준으로 비대해져서 10만을 겨우 넘는 진과는 달리 50만을 웃도는 군진을 통제하기 위해서 군진의 상위에 둔 것이 '번진(藩鎭)'이고, 이 번진의 수장이 '절도사'였다. 742년까지 당의 주요 거점에는 여러 번진이 설치되었는데, 710년에 토번(티벳)과 돌궐(투르크)을 막기 위해 양주에 둔 하서절도사와 거란을 막기 위해 유주에 세운 범양절도사를 시작으로 용우의 용우절도사(714), 성도의 검남절도사(717), 쿠차의 안서절도사(718), 명주의 삭방절도사(721), 태원의 하동절도사(723), 북정의 북정절도사(741)를 거쳐 마지막으로 742년에 영주 지역에 평로절도사를 두어 모두 열 개의 번진이 설치된다.
당조는 이민족들에게 비교적 관대한 편이었다는 것을 앞서 설명했다. 안녹산은 이러한 배경에서 성장했다. 당시 당조의 동북변에 해당하는 유주(幽州)·평로(平盧)·하동(河東)의 절도사를 겸임하며 세력을 키웠는데, 유사시에는 10만이나 되는 군사를 명령 한 번으로 총동원할 수 있을 정도였다나(현종의 근위부대는 3만 정도).
정무에 지친 현종께서는 자기 딸, 아니지 손녀뻘인 양귀비와 좋아 지내시고, 자기 누이동생 빽으로 재상이 된 양국충이 안녹산과 대립하게 되는데, 이 양국충이라는 자가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킬 것 같다'고 현종에게 곤질렀단다. 이게 안록산의 귀에 들어간거지. 결국 천보 14년(755년) 11월, 안녹산은 거란·철륵 등 이민족 정예기병 8천을 앞세우고, 한병(漢兵)·번병(蕃兵) 모두 합쳐 20만 대군을 이끌고 '간신 양국충 토벌'을 구실로 범양(范陽)에서 거병, 곧바로 당의 동도(東都) 낙양(洛陽)으로 진격하기에 이른다. 결국 한 달도 안 되어 낙양은 안록산에게 함락되었고, 이듬해인 천보 15년(756), 안록산은 낙양에서 성무(聖武)라는 연호를 선포하고 새로이 대연(大燕)이라는 나라를 세워, 스스로 대연성무황제라 일컬었다.
<안록산이 수도로 삼았던 낙양. 당은 낙양에 동도(東都)를 두고 서도(西都) 장안과 함께 양경체제를 구비했다.>
당조는 서북쪽에 있던 방위군을 동쪽으로 이동시켜 안록산을 토벌하게 했는데, 이 과정에서 현종은 장안을 떠나 지금의 사천 땅인 촉(蜀)의 검남으로 몽진하기에 이르렀고, 양귀비는 가던 길에 현종의 호위병들에게 목졸려 죽었다. 모든 책임이 그녀와 양국충에 있다고 생각한 그들 나름의 나라를 위한 선택이었다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미 시작된 반란은 여자 한 명 죽인다고 끝날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중국 대륙을 9년 동안이나 불바다로 만든 '안록산의 난'은 지금까지 당조가 이면에 감추고 있던 자기모순들이 표면으로 불거져나오기 '시작'한 것에 불과했으니.
여담이지만 양귀비의 목을 직접 조른 장본인은 현종의 환관 고력사(高力士). 이 남자는 원래 풍씨였다가 내관 고연복(高延福)의 양자가 되면서 성을 고씨로 바꾼 것으로, 고연복은 원래 고려의 왕족으로서 당에 끌려가 환관이 된 자였다.
[肅宗至德元載, 平盧留後徐歸道, 遣果毅都尉行柳城縣四府經略判官張元澗來聘曰 "今載十月當擊安祿山, 王須發兵四萬來援平賊." 王疑其有異留之.]
숙종 지덕 원년(756)에 평로유후(平盧留後) 서귀도(徐歸道)가 과의도위(果毅都尉) 행유성현사부경략판관(行柳城縣四府經略判官) 장원간(張元澗)을 보내 조빙하며 말하였다.
"올해 10월에 마땅히 안록산을 칠 것이니, 국왕은 모쪼록 4만 병사를 내어 적을 평정하는데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왕은 이상하게 여기고 의심하여 머무르게 했다.
《발해고》 군고(君考), 문왕 대흥 20년(756)
756년 6월에 장안이 안록산의 손에 넘어갔다. 이 무렵 산동 지역에 설치되어있던 평로군의 절도사 유정신의 휘하 부장이었던 평로유후 서귀도는 안록산을 토벌하기 위해서 발해에 군사를 요청했지만, 발해 조정은 서귀도를 발해에 '억류'시키는 선에서 그쳤을 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했다. 아니, 개입하지 않으려 했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평로군은 안록산의 관할지였다는 점도 작용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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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二月丙午, 歸道果○劉正臣, 于北平. 潛與祿山幽州節度使史思明, 通謀擊唐. 安東都護王志玄知其謀, 率精兵六千餘人, 攻破柳城斬歸道. 自稱平盧節度, 進屯北平, 四載四月. 志玄遣將軍王進義來聘曰 "天子已歸西京. 迎太上皇于蜀居別宮. ○滅賊徒, 故遣下臣來告." 王爲其事難信, 留進義, 別遣使詳問. 肅宗賜王勅書一卷.]
12월 병오에 귀도가 과연 유정신(劉正臣)을 독살하고 북평(北平)으로 향했다. 그곳에 진을 치고 있던 안녹산과 유주절도사(幽州節度使) 사사명(史思明)에게 신하가 되어 복속하고, 통모하여 당을 치려 했다. 안동도호(安東都護) 왕현지[王志玄]가 이 음모를 알고서 정병(精兵) 6천여를 거느리고 유성(柳城)을 깨뜨리고 서귀도를 죽였다. 스스로 평로절도(平盧節度)라 칭하며 북평으로 나아가 주둔하기를 4년 4개월. 왕현지는 왕진의 장군을 보내어 내빙하고 말하였다.
"천자께서는 이미 서경(西京)으로 돌아오셨소. 촉에서 태상황을 맞이하여 별궁에 거하게 했소. 적의 무리를 멸하느라 수고하셨기로 저를 내려보내어 이르게 하셨소."
왕은 이 일을 믿을 수 없다고 여기고 별도로 사신을 보내어 자세히 물었다. 숙종은 왕에게 칙서 한 권을 내려주었다.
《발해고》 군고(君考), 문왕 대흥 20년(756)
비록 군(郡)으로 불리기는 하지만 당조의 번진도 아니고, 그렇다고 부용된 처지도 아닌 자주국으로서 흠무왕의 선택ㅡ안록산의 난에 어떤 구실을 댔든지간에ㅡ원병을 파병하거나 당조에 대한 동조를 보이지 않은 것은 무척 현명한 선택이었다. 기실 주변 번국은커녕 자기네들 내지의 번진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진 당조를 위해 군사를 낼 이유는 없었다. 더구나 흠무왕에게 함께 안록산을 치자고 건의하던 평로유후마저 자신이 섬기던 당조를 등지고 안록산에게 가서 붙는 판에.
서귀도가 나중에 변심했다가 당의 관군에게 붙잡혀 죽은 그 사건은 문왕이나 발해 당국에게는 당에서 벌어지는 내전에 개입하지 않을 '구실'이 되어 주었다. 당조에서 보내는 구원요청을 거절할 구실. 이후 당에서 어떤 사신을 보내든지 '너희가 정말 당 황제의 부하인지 아닌지 내가 어떻게 알아?'라면서 뻗튕겨버리면 그뿐이다. 오죽했으면 당 숙종이 칙서까지 보내가며 자신이 보낸 사신이 맞다는 것을 '보증'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하지만 말이야 바른 말로 흠무왕에게 전해진 칙서가 위조된 것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이게 진짜 당 황제가 보낸 것이 아니면 니들이 책임질 수 있어? 흠무왕이나 발해 사신들이 당의 사신 앞에서 대놓고 그랬을 리야 없겠지만서도 '분위기'라는 것이 있으니까, 발해에서 자신을 당의 사신이라고 100% 믿고 있지 않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어쩌면 발해가 당조의 몰락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란 것도 알고 있겠지) 흠무왕에게 구원요청을 한 '안동도호' 왕현지라는 자도 결국, 앞서 서귀도가 그랬던 것처럼 제멋대로 선대 평로절도사 유정신의 자리를 차지한 그를 죽인 뒤 다시 스스로 평로절도사를 자칭하면서 무려 4년이 넘도록 북평에서 주둔하고 있지 않았던가.
왕현지가 서귀도를 죽일 때, 그의 옆에는 후희일이 있었다. 옛날 당으로 끌려온 고려인의 후예이자, 훗날 평로치청이라는 독립왕국의 초대 군주가 될 이정기의 고종사촌 형이기도 한 그가 왕현지와 함께 서귀도를 내쫓고 왕현지를 평로절도사로 추대했다. 발해와 고려 그리고 또 하나의 고려 역사를 전개할 인물의 대두를 뜻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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