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legacy.h21.hani.co.kr/section-021163000/2007/11/021163000200711010683017.html
단군보다는 소서노가 어떤가
정치적 의도에 따라, 시대마다 달라지는 단군…수염 긴 할아버지에 대한 흠모를 강요할 필요 있나
▣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우리 모두의 기원은 어디인가?’ 인간은 개인 차원에서도 자신의 뿌리에 대해 늘 궁금해하지만, 집단 차원에서도 그 뿌리를 찾아서 정체성을 확립하려 한다. 대가족을 단위로 했던 과거 사회에서는, 뿌리에 대한 궁금증은 종족 내지 인류의 시조를 찾는 일로 이어지곤 했다. 중국 같으면 거인 반고(盤古)가 죽어서 그 사체가 강산과 해, 달로 변화됐다는 이야기부터 만물을 창조했다는 여신 여와(女媧) 이야기까지 다양한 창세 신화들이 존재하고, 일본 같으면 이미 8세기 초의 문헌에서 남신 이자나기(伊邪那岐)와 여신 이자나미(伊邪那美) 사이의 섹스가 이 세계를 만들었다는, 아주 야한 창세 담론이 발견된다. 한국이라고 해서 창세신화가 없을 리 없다. 하늘의 신 천지왕과 땅의 여신 총명 부인의 결연 등을 다루는 제주의 무가 ‘천지왕 본풀이’ 정도면 훌륭한 창세, 시조 신화일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나 중국과 달리 조선에서 이런 유형의 민간 신화들이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공식적’ 문헌에 잘 수록되지 않았다. 못된 부자 수명장자를 하늘 신이 혼내주는 사뭇 반란적 내용을 관료나 승려들이 좋아할 이유도 없었지만, 유교나 불교의 관념 속에서 사는 이들에게 조야하게 보이기도 했다. 결국 조선의 주류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우리’ 기원에 대한 신화적 설명으로는 단군신화라는 고조선의 건국 신화가 가장 유서 깊었다. 건국 신화, 즉 ‘국가 이야기’가 종족의 기원까지도 설명해주는 독특한 상황은, 한반도 역사에서 ‘국가’가 점하는 매우 특별한 지위를 보여준다.
△ 서울 남산 단군사당에 있는 단군상. 노년의 남성 통치자를 ‘우리 민족의 상징’으로 삼는 것이 여성이나 서민, 어린이들이 평등권을 누리면서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가. (사진/ 한겨레 김태형 기자)
무시한 신라, 부활시킨 고려
텍스트란 결국 해석이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같은 텍스트에 정반대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같은 성경에서 보수주의자는 “종들이여 주인들에게 복종하라”는 말을 강조하는가 하면 사회주의자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만큼 부자가 하나님 나라로 가기 어렵다”는 말을 강조한다. 단군신화도 마찬가지로, 누가 어떤 목적으로 읽는지에 따라서 그 모습을 계속 바꾸어갔다. 그러한 차원에서는 그 신화의 원형을 찾기란 힘들기 그지없다. 게다가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신화의 전승에 오랜 기간이 공백기로 비워져 있다는 것이다. 일단 단군신화가 고조선의 건국 이야기라고 가정한다면 기원전 108년의 고조선 멸망 이후에는 단군 이야기가 평양 지방을 중심으로 해서 계속 구전됐으리라 추측해야 할 것이다. 그 지방이 하늘 신(해모수)과 땅과 물의 여신(하백의 딸)의 결합에 대한 비슷한 내용의 신화를 갖고 있었던 고구려의 중심지가 됐을 때 단군신화와 해모수-주몽 신화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을 가능성도 크다. 이승휴(1224~1300)의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 인용된 ‘단군본기’에 의하면 단군이 하백의 딸과 결혼해 아들 부루를 낳았다는데, 이 부분은 두 신화가 하나로 합쳐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단군 이야기가 신라와 5세기 후반부터 적대적 관계에 놓여 있던 고구려-발해에서 전해지기에, 통일신라 말기까지 신라 금석문에서 단군에 대한 한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최치원 같은 신라의 대표적 불교 지식인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품은 석가모니의 종족과 같다. 우리 말은 불교의 원어인 범어와 그 발음이 통하다” 하여 신라를 부처와 인연이 있는 땅으로 선전했지만, 단군을 포함한 북방계 전승에 대해 하등의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즉, 지금 ‘한민족의 시조 신화’로 인식되는 단군 이야기는 고려의 건국까지만 해도 한반도 남부 쪽에서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 북부 쪽만의 지역 신화이었다.
그러나 평양 지역을 영토화해 신라와 고구려 양쪽에 대한 계승 의식을 가졌던 고려의 건국으로 사정이 바뀌었다. 개성 지역의 영주로서 고려 왕씨의 문중 전승 자체도 일부 측면에서 단군 이야기와 상통했다. <고려사>의 첫 부분에 실려 있는 <편년통록>의 전승에 의하면, 왕건 가문의 시조로 받들어진 ‘성골 장군’ 호경(虎景)이라는 전설적 인물은 백두산을 비롯한 산천을 구경하고 범의 모습을 한 구룡산의 여(女)산신과 결합을 이룬 뒤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다. 물론 이는 단군신화의 복제판은 아니지만 백두산을 언급한 것이나 범이나 호랑이의 모습을 띤 여신과 결합한다는 줄거리, 그리고 “산신이 돼 산속으로 사라졌다”는 결말은 단군신화와 같은 유형의 북방계 전승을 연상시키긴 한다.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제왕운기>에서 단군 이야기의 근거로 삼는 ‘단군본기’(혹은 그냥 ‘본기’)는 10세기쯤에 쓰였으리라 여겨지는 고려 초 <구삼국사>(지금 전해지지 않는 삼국시대 역사의 서술)의 일부분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즉, 고려왕조 치하인 10세기에 단군 이야기가 한반도에서 비로소 ‘구전’에서 ‘필기’의 형태로 그 모습을 바꾸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평양 세력의 반란을 진압한 이로서 평양 쪽의 전승을 꺼렸던 김부식이 <구삼국사>를 자료로 삼아 <삼국사기>를 만들었을 때 북방계 문화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고조선과 단군 이야기를 제외시켜 고려 초기, 중기의 단군 의식에 대해 정확하게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 평양의 단군릉. 1940년대 후반에 이승만 정권이 단군 숭배 분위기를 만들어 통치 명분을 다지려 했듯이, 이북 정권도 단군릉 복원을 통해 실추된 위신을 다시 세우려 했다.
1270~80년대에 이르러 상황이 다시 한 번 확 바뀐다. 몽골에 대한 항쟁이 끝나고 고려가 몽골 제국의 제후국이 됨에 따라 몽골와 개성 사이 한반도 북부 지역에 대한 인식이 고조됐다. 단군 전승의 발원지인 평양은 1270년 원나라가 고려로부터 빼앗아 직할구역으로 삼았다가 1290년에 이르러서야 다시 돌려주었는데, 20년 동안 ‘실지’(失地)였던 평양에 대해 고려 문인들의 관심과 애착은 절로 커지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다가 이제 막을 내린 최씨 무신정권하에서 고려의 큰 약점으로서 지방에서의 국가 통합 의식의 부족이 노출됐다. 1202년 경주에서 지역세력들이 ‘신라 부흥’을 들고 일어났는가 하면, 1217년에 평양의 세력들이 ‘고구려 부흥’을 시도했다 진압되고, 1237년 전라도에서 ‘백제 부흥’까지 시도됐다. 고려왕조에 대한 지방민의 귀속 의식이 그 정도로 약했던 것인데, 과거의 삼국을 하나로 묶는 어떤 표상이 고려 중앙의 지배자들에게 절실히 필요했다. 그래서 우연치 않게 바로 이 시기에 일연과 이승휴가 잘못하면 영원히 잃을지도 모를 평양 지역의 단군 전승을 ‘해동 전체’의 기원 신화로 부각시킨 것이다. 일연이 승려이었기에 “우리 모두의 기원”을 찾는 방법도 불교적이었다. 단군의 할아버지 격인 하늘 신이 불경에서 부처를 늘 지켜주고 부처의 설법에 귀의하는 제석환인, 즉 인도의 천신 인드라(Indra)로 그려지고, 그 인드라의 아들 환웅이 땅으로 내려가려 할 때에 불교에서 부처와 보살의 염원으로 자주 언급되는 “인간(즉, 중생)에 대한 홍익”을 꾀한다는 것이었다. 중생에 대한 ‘홍익’ 내지 ‘요익’(饒益)이 대승불교에서 보살도 정신의 요체다. 마찬가지로, 아이를 가지려는 웅녀가 신단수 아래에서 잉태를 주원(呪願)했다고 하는데, 이는 불가에서 자주 언급되는 ‘기도’의 동의어다. 말하자면 일연에게 단군은 불교에서 말하는 ‘신중’(神衆) 중의 하나로 인식된 듯했다.
조선초 유교 학자들에겐 ‘성현’
반면에, 고조선에 대한 인식의 고조를 통해 대내외적으로 고려왕조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만든 쿠데타의 정통성을 확립시키려 했던 조선 초기의 관변 유교 학자들의 입장에서는, 단군은 더 이상 ‘인드라의 손자’가 아닌 유교적 의미의 ‘성현’이었다. 그러기에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유학자들이 보기에는 허황하기 그지없는 웅녀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 <삼국유사>의 단군 관련 기사를 인용하지도 않고 “단웅천왕(환웅)이 손녀(孫女)로 하여금 약을 먹게 하여 사람의 몸이 되게 하여 단수(檀樹)의 신과 더불어 혼인시켜 아들을 낳게 하니 이는 바로 단군”이라는 <제왕운기>의 내용을 대신 인용했다. 샤머니즘의 냄새가 나는 동물 이야기는 선비의 관점에서 “나라 기원에 대한 언설”로서 제격이 아니었다. 조선 후기로 내려갈수록 유학자들의 단군 의식은 ‘얌전해지기’만 했다. 예컨대 안정복(1712∼91)은 그의 <동사강목>(1778)에서 단군이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됐다”는 말에 대해서 “허황하다”고 평하고, 평양 부근에 단군묘가 있다는 것을 “따를 수 없는 속설”로 봤다. 안정복의 책에서 제석환인도 웅녀도 빠져 있었다는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유학자들이 애써 단군신화의 ‘불순한 요소’들을 ‘순화’하려 노력했지만, 민간에서는 그 반대로 무당들이 환인, 환웅, 단군을 ‘삼신’으로 모시고 단군을 특히 ‘무조’(巫祖), 즉 조선 무당의 시조로 숭배했다. 일제시대에 접어들어 단군은 두 개 문화 권력의 싸움의 장이 됐다. 1929년에 ‘단군고’(檀君考)라는 논문을 지어 발표한 이마니시 류(今西龍)와 같은 “과학적 근대 사학자”들을 내세웠던 일제는, 단군신화를 “13세기 후반에 날조된 이야기”로 봤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단군 연구에 힘을 쏟았던 최남선은 ‘단군’을 “하늘을 대표하는 고대 종교 지도자의 호칭”으로 인식해 단군의 종교인 ‘빛의 숭배’가 고대 동아시아 문화의 중심에 있었다고 못박았는가 하면, 신채호는 일찌감치 단군조선을 ‘정복왕조’로 파악해 단군을 “뛰어난 정복자”로 묘사했다. 결국 담론 생산자마다 그 필요성에 따라서 단군의 상을 역사에서 지우거나 ‘시의적절한’ 단군의 이미지를 그렸다고 봐야 한다.
△ 단군의 표준 영정.
권력을 상징화하는 ‘시조’의 초상
일제의 압박에 맞서서 “위대한 장군 단군”이나 “고대의 종교 문화 대표자 단군”을 믿을 필요성도 이미 없어졌고, 단군을 “우리 모두의 할아버지”로 설정해 가족국가에 대한 충성을 국민들에게 강요했던 독재도 이미 갔다. 일연의 시대에야 “우리들의 시조” 이야기에서 여성인 웅녀를 동물의 모습으로 그려놓은데다 단순히 단군을 낳고 나서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부차적인 요소로 묘사해 환인, 환웅, 단군 셋을 다 ‘당당한 남성’으로 서술하는 것은 ‘당연지사’였겠지만, 양성평등의 시대인 오늘날에도 과연 여학생들에게 수염이 긴 노년의 남성으로 그려진 단군에 대한 흠모를 강요할 필요가 있는가? 더군다나 최남선 이후로 통설화된 주장대로 ‘단군’이란 고조선의 제사장 내지 군주의 칭호, 즉 일반명사라면 ‘단군의 영정’이라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게 된다. 굳이 그 실재성을 확인할 수 없는 상고사 인물들에 대한 학습을 통해 ‘문화적 정체성’을 확인시키자면 여성인데다 고구려와 백제 양쪽과 관련이 있는 소서노(召西奴)의 가상적 모습을 교과서에 실어 ‘단군 할아버지의 영정’을 대체케 하는 것이 조금 낫지 않겠는가? 우리가 ‘시조’의 초상화를 그릴 때 결국 우리 사이의 권력과 권위의 구도를 상징화해 그린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 ‘박노자의 동아시아 근현대 탐험’을 마치고 ‘박노자의 거꾸로 본 고대사’를 새로 연재합니다. 민족주의로 덧칠된 고대사 인물들을 다시 조명하고,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진 우리의 편협한 역사관을 비판하는 칼럼입니다.
참고 문헌
1. <단군, 만들어진 신화> 송호정, 산처럼, 2004
2. <단군과 고조선사> 노태돈 편저, 사계절, 2002
3. <일본인들의 단군 연구> 신종원 엮음, 한국학중앙연구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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