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6962
이재용 ‘형량 낮추기 쇼’에 폭죽 터뜨린 보수신문
[비평] “자녀에게 경영권 안 물려준다” 헤드라인 뽑으며 ‘사과 기자회견’에 의미 부여…그러나 애초에 경영권은 승계나 세습의 대상이 아니다
정철운 기자 pierce@mediatoday.co.kr 승인 2020.05.08 14:38
2008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경영에서 물러나고 일체의 직에서 사임했다. 특검 수사결과에 따른 대국민 사과였다. 당시 이 회장은 4조5000억 원 규모의 차명계좌에 대한 실명전환과 함께 누락 된 세금납부와 사회 환원을 약속했다. 지배구조 개선도 약속했다. 물론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구체성이 없는 ‘말뿐인 선언’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2020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경영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경영권은 자신이 계속 갖되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겠다고 했다. 아버지처럼 구체성 없는 선언에 불과했는데, 그 내용의 ‘수위’도 아버지에 미치지 못했다. 무엇보다 자신의 범죄행위에 대한 반성이 없었다. 기자들에게는 질문할 기회도 없었다. 그럼에도 ‘사과 기자회견’ 다음날 대다수 신문의 1면 헤드라인은 이 부회장을 향한 선물에 가까웠다.
△고개 숙인 이재용 “자녀에게 경영권 승계 않겠다” (국민일보) △이재용 “자녀들에 경영권 안 물려줄 것” (동아일보) △이재용 “자녀에게 경영권 물려주지 않겠다” (세계일보) △이재용 “제 아이들에게 경영권 물려주지 않겠다” (조선일보) △“삼성 경영, 자녀 안 물려준다” (중앙일보) △이재용 “삼성 경영권 대물림 않겠다” (한국일보) △이재용의 결단 “자식에게 삼성 경영권 물려주지 않겠다” (한국경제) △이재용 “자녀에 경영권 안 물려줄 것” (매일경제)
7일자 보수신문과 경제지 1면 헤드라인은 이재용 부회장이 경영권 승계를 ‘포기’했다는 데 집중했다. 조선일보는 “경영권 승계 관련 논란을 근원적으로 끊겠다고 밝힌 것”이라고 평가하면서 “파기환송심 재판과 삼성 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의혹 수사를 받고 있는 이 부회장이 외부 압력에 못 이겨 삼성을 초일류로 만든 경영상 장점까지 포기하는 선언을 해버렸다”는 비판도 나왔다는 ‘재계’의 입장을 전했다.
▲7일자 주요 신문의 1면 헤드라인. 디자인=이우림 기자.
매일경제는 “4세 경영 포기를 공식 선언한 것은 삼성의 잘못된 과거와 단절하고 새로운 미래를 시작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사과를 뛰어넘은 선언”이라 평가했다. 국민일보는 “사과 수위가 재계의 예상을 넘어섰다”며 “주변의 우려에도 (이재용이) 삼성의 변화를 위한 소신을 밝히겠다는 뜻을 강하게 피력한 것으로 전해졌다”고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이번 선언이 실천될 경우 삼성은 창립 82년만에 가족경영을 뒤로하고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된다”고 전망했다.
중앙일보는 “자녀 승계에 대한 입장을 공식적으로 표명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며 의미를 부여하는 한편 ‘대기업 소유·경영 분리 계기돼야 할 이재용의 사과’란 사설을 통해 “이번 사과는 재판과 검찰 수사에 불합리한 영향을 미쳐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매일경제는 같은 날 사설에서 “이 부회장은 2018년 총수 자리에 오른 이후 반도체 백혈병 사태를 마무리했고 80년 무노조 경영 원칙을 폐기하는 등 삼성에 대한 신뢰를 제고하기 위한 변화를 이끌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날 주요 보수신문과 경제지는 ‘4세 경영 포기’를 강조하며 ‘초일류 삼성’으로 거듭나라는 덕담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언론의 본분을 망각한 대목이 눈에 띈다. 우선 ‘4세 경영 포기’ 프레임은 전제부터 잘못됐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생경제위원회 소속 김종보 변호사는 8일 통화에서 “경영권은 재산권이 아니다. 승계나 상속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지적하며 “승계 대상으로서의 경영권은 존재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그러나 ‘세습자본주의’에 익숙한 한국 언론은 승계 대상으로서의 경영권이 존재할 수 있다는 식의 전제를 바탕으로, 이재용 부회장이 마치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 것처럼 보도했다.
이 부회장 스스로 과거와 같은 탈법적 경영권 승계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도 있다. 권오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경제정책팀장은 7일 통화에서 “이재용의 재산이 10조라고 하면 상속세를 법대로 내는 경우 6조는 내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탈법 승계를 할 수 없다면 재산의 절반 이상을 세금으로 내야 하는데, 안 물려주는 게 아니라 못 물려주는 상황이라고 볼 수도 있다. 김종보 변호사 또한 “법대로 재산을 상속할 경우 지배력이 약화 되면서 (이재용의 자녀가) 스스로 경영자로 선출될 가능성이 낮아진다”고 내다봤다.
권오인 경제정책팀장은 ‘4세 경영 포기’ 발언을 두고 “20년 뒤에나 할 이야기를 지금 왜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앞으로 얼마든지 말이 바뀔 수 있고, 또 다른 편법으로 경영권을 가져갈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논평을 통해 “오늘 발표문도 12년 전, 아버지 이건희 회장의 사과문과 같이 언제든지 휴지조각처럼 버려질 수 있는 구두 선언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다수의 보수신문과 경제지는 이 같은 합리적 의심 대신, 이재용 부회장이 원하는 대로 헤드라인을 뽑고 “결단”이라며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6일 사과 기자회견에 나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연합뉴스
이재용 부회장이 몇 번 고개 숙였는지보다 중요한 대목은
이재용 부회장은 6일 기자회견에서 현재 재판 중인 국정농단 범죄에 대한 인정이나, 수사가 진행 중인 삼성물산 부당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사기에 대한 언급을 피했다. 경실련은 “사건의 본질은 이재용 부회장 본인의 경영권 승계를 위한 정경유착 및 경제범죄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대법원의 유죄 취지 판결이 확정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법적 책임을 지겠다는 최소한의 내용도 언급이 없었다. 결국 법경유착에 의해 급조된 조직인 준법감시위의 권고에 따라 구체성 없는 형식적인 사과를 통해 위기를 모면하겠다는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앞서 대법원은 이재용 부회장에게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박근혜 등에게 뇌물을 준 불법이 있었다며 유죄 판결을 내리고 이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미국의 연방양형기준을 언급하면서 준법감시기구를 설치하면 양형사유로 고려할 수 있다고 밝혔으나 해당 제도는 ‘회사’에 대한 양형기준이지 ‘개인’에 대한 양형기준이 아니다. 이재용 부회장 사건은 기업범죄가 아니라 개인범죄다. 이재용 부회장의 ‘삼성 지배권 승계’를 위해 온 임직원이 달려들었다. 이는 회사 이익과 무관하며, 이재용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참여연대는 이날 기자회견을 두고 “마치 삼성이 저지른 범죄를 자신이 대신 사과하는 듯한 모양새를 띄었다”고 비판하며 “노조파괴 등으로 인한 피해자에 대한 사과도 일체 없었다”고 했다. 참여연대는 “이재용 회장이 진정으로 자신의 과오를 씻고자 한다면 현재 진행 중인 국정농단 재판과 삼성물산 부당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불법 회계 수사에 적극 협조하고 제대로 죗값을 받는 것이 우선”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같은 대목은 보수신문과 경제지에서 찾기 어려웠다.
경실련은 “황제경영을 막기 위한 총수일가의 이해 관련 거래에 대해 주주총회에서 비지배주주(소수주주)의 다수결 동의와 같은 제도도입과 같은 개선의지를 보였어야 했다”고 지적하며 “정경유착 근절과 황제경영을 방지하기 위한 근본적인 소유․지배구조개선책을 제시해야 한다”고 했다. 반면 동아일보는 “삼성은 이미 2018년 이사회 중심 경영을 선언했다. 투명한 지배구조로 경영하겠다는 의지”라고 보도했는데, 보수신문과 시민사회와의 ‘거리감’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현 삼성전자 이사회 이장은 이명박 정부 기획재정부 장관 출신의 박재완씨다.
국회에서 ‘삼성 저격수’로 통하는 박용진 민주당 의원은 “변명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도덕적 책임회피와 법적 자기면죄부를 위한 구색 맞추기식 사과”라고 기자회견을 혹평하며 “앞으로 잘하겠다는 허황된 약속보다 그동안 저지른 각종 편법, 탈법, 불법 행위를 해소하기 위한 계획을 제시했어야 했다. 삼성생명 공익재단 등을 통한 공익법인 사유화 문제,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주식 법적 한도 초과분의 처분 문제 등 현재 방치되고 있는 삼성의 경영권 관련된 사회적 논란을 해소하는 일이야 말로 제대로 책임지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언론이 이틀 전 사과 기자회견에서 이재용 부회장이 몇 번 고개 숙였는지보다 중요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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