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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서당[九誓幢]
한국사 연대기 > 고대 > 580 > 9서당
 
신라 중대의 핵심적인 중앙군사조직 (연대: 미상)
 
삼국사기(권40 잡지 무관) : 한국사데이터베이스(국사편찬위원회)
 
 
1 개요
 
구서당(九誓幢)은 신라 중대의 핵심적인 중앙군사조직이다. 구서당은 진평왕(眞平王) 5년에 설치된 서당(誓幢)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효소왕(孝昭王) 2년에 장창당(長槍幢)을 비금서당(緋衿誓幢)으로 개칭하면서 완성되었다. 구서당에는 정복민이었던 신라인뿐 아니라 피정복민이었던 백제·고구려·말갈인도 함께 구성되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처럼 편성된 구서당 조직은 신라 중대 왕권의 군사적 기반이 되었다.
 
 
2 구서당의 성립과 구성
 
7세기는 신라에 있어 커다란 변혁의 시기였다. 삼국통일 전쟁을 통해 영토가 급속히 확대되었고 중앙정치 제도와 지방제도를 비롯한 각종 제도가 정비되었으며, 정치·권력 구조의 성격 변화는 물론 사회 구성원도 크게 확대 변화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군사제도 역시 커다란 변동이 나타났다.
 
신라는 삼국통일 전쟁과 나당전쟁(羅唐戰爭)을 수행하면서 많은 군사조직을 창설·확장하였다. 전쟁이 종결되자 신라는 전쟁 기간 동안 확대되었던 군사조직을 재편할 필요성이 생겼다. 이에 군사조직을 새롭게 재편하였는데, 중앙군으로서 구서당이 조직되고 이에 대응되는 지방군으로서 10정을 비롯한 5주서(五州誓)·만보당(萬步幢) 등이 설치되었다. 이러한 신라의 군사조직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직관 하(下) 무관(武官) 범군호(凡軍號) 조에 기록되어 있으며, 여기서 구서당은 6정 다음 순서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기록을 살펴보면 구서당은 금색(衿色)에 의해 구별되는 획일적인 부대명칭을 가지고 있으며, 배속된 군관(軍官)이 21종으로 다른 군단(軍團)보다 그 수가 많으며, 중요한 군관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많은 부대 가운데 그 구성원들의 출신을 밝히고 있는 것은 구서당뿐이라는 점에서 신라 중대의 핵심적인 중앙군단으로서 구서당의 위상을 알 수 있다.
* 금색(衿色) : 옷깃의 색. 군대의 표지색
 
구서당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녹금서당(綠衿誓幢)이다. 금은 녹자색(綠紫色)이며 신라인으로 구성되었다. 진평왕5년에 설치된 서당(誓幢)이 진평왕 35년에 녹금서당으로 개칭된 것이다. 
두 번째는 자금서당(紫衿誓幢)이다. 금은 자록색(紫綠色)이며 신라인으로 구성되었다. 진평왕 47년에 설치된 낭당(郎幢)이 문무왕 17년에 자금서당으로 개칭된 것이다. 
세 번째는 백금서당(白衿誓幢)이다. 금은 백청색(白靑色)이며 백제인으로 구성되었다. 문무왕 12년에 설치되었다. 
네 번째는 비금서당(緋衿誓幢)이다. 신라인으로 구성되었다. 문무왕 12년에 설치된 장창당이 효소왕 2년에 비금서당으로 개칭된 것이다. 
다섯 번째는 황금서당(黃衿誓幢)이다. 금은 황적색(黃赤色)이며 고구려인으로 구성되었다. 신문왕(神文王) 3년에 설치되었다. 
여섯 번째는 흑금서당(黑衿誓幢)이다. 금은 흑적색(黑赤色)이며 말갈인으로 구성되었다. 신문왕 3년에 설치되었다. 
일곱 번째는 벽금서당(碧衿誓幢)이다. 금은 벽황색(碧黃色)이며 고구려 유민의 나라였던 보덕국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신문왕 6년에 설치되었다. 
여덟 번째는 적금서당(赤衿誓幢)이다. 금은 적흑색(赤黑色)이며 벽금서당과 마찬가지로 신문왕 6년에 보덕국의 사람들로서 설치되었다. 
마지막 아홉 번째는 청금서당(靑衿誓幢)이다. 금은 청백색(靑白色)이며 백제인(百濟殘民)으로 구성되었다. 신문왕 7년에 설치되었다.
 
이처럼 구서당의 구성은 신라인으로 구성된 3개의 부대와 백제인으로 구성된 2개의 부대, 고구려인 1개 부대와 말갈인 1개 부대, 그리고 보덕국인 2개의 부대로 이루어졌다. 부대의 구성원이 모두 정복민인 신라인으로 구성되지 않고 9개의 부대 가운데 6개의 부대가 신라에 정복당한 피정복민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기존 신라의 다른 군사조직과 차별되는 9서당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위에서 보듯이 구서당은 한 번에 조직·편제된 것이 아니라 점진적인 과정을 거치면서 만들어졌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삼국사기』 직관지에는 구서당의 시작을 진평왕 35년 서당(誓幢)을 녹금서당으로의 개칭한 때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무열왕 8년(660) 백제와의 전쟁 , 문무왕 원년 과 동왕(同王) 8년 에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서당이 등장하고 있어 문무왕 8년까지 서당은 녹금서당으로 개칭되지 않고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진평왕 35년 서당이 녹금서당으로 개칭되었다는 기록은 『삼국사기』 저자의 기록 오류일 것이다. 서당을 녹금서당으로 개칭한 시기는 진평왕 35년이 아닌 백금서당이 만들어지는 문무왕 12년(672)이나 낭당을 자금서당으로 개칭한 문무왕 17년(677)일 가능성이 높다.
 
녹금서당을 제외한다면 구서당 가운데 가장 먼저 만들어진 부대는 백금서당이며, 구서당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조직된 부대는 비금서당이다. 따라서 구서당은 문무왕 시대에 설치되기 시작하여 장창당이 비금서당으로 개칭되는 효소왕 2년(693)에 완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3 구서당과 왕권(王權) 그리고 김흠돌(金欽突)의 난
 
구서당을 구성하는 부대들의 명칭은 모두 앞에 금색(衿色)을 붙여 ‘OO서당’으로 되어있다. 이처럼 구서당의 부대명칭에는 서당이 공통적으로 들어간다. 이것은 구서당이 진평왕 5년에 설치된 서당에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서당은 신라 6부 귀족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강하게 작용한 6정의 대당(大幢)과는 달리 국왕의 직속 부대였다. 진평왕 당시 6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서당을 창설한 것은 왕권을 강화하고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실시한 제도적 정비의 한 사례로 이해된다. 또한 서당은 ‘맹세하다’라는 뜻을 가진 서(誓)와 ‘군사조직’을 뜻하는 당(幢)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단어로 ‘맹세를 받은 군대’ 혹은 ‘(국왕에) 맹세한 부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이름에서도 왕권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삼국통일 전쟁 이후 군사조직을 새로이 재편하고 있던 문무왕은 귀족적 성격이 상대적으로 강하였던 대당보다는 국왕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였던 서당에 주목하였다. 삼국통일 전쟁 과정에서 전공을 세운 진골귀족들은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였고, 비록 규모의 차이가 있더라도 사병(私兵)을 거느리며 무력적 기반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에 문무왕은 왕권강화를 위해 진골귀족들의 군사 기반을 약화시키고 왕을 중심으로 새롭게 군사권을 재편·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왕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서당은 국왕의 군사권 강화 의도에 상응하는 가장 적절한 조직이었다. 이에 문무왕은 서당을 바탕으로 중앙군단을 설치하였고, 그 결과 구서당은 신라의 핵심적인 중앙군단으로 편제되었다.
 
물론 이러한 문무왕의 왕권 강화정책에 반발하는 진골귀족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김흠돌(金欽突)이다. 김흠돌은 문무왕 원년(661)에 고구려를 정벌할 때 대당(大幢) 장군으로 출정하였고, 같은 왕 8년(668) 진행된 고구려 정벌 과정에서도 대당총관이 되어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공을 세웠다. 또한 그의 딸은 신문왕이 태자로 있을 때 태자비가 되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김흠돌은 병부령(兵部令) 김군관(金軍官)을 비롯한 다른 진골귀족과 결탁하였다.
 
김흠돌과 결탁한 진골귀족 세력은 문무왕의 왕권강화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결국 이들은 문무왕이 사망하자 이를 기회로 삼아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반란은 5일 만에 평정되었고, 반란을 평정한 신문왕은 반란의 주모자뿐만 아니라 그와 연루된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김흠돌의 난을 평정한 신문왕은 왕을 보호하는 군대인 시위부(侍衛府)의 조직을 정비하고 그 기능을 강화하였으며 이어서 구서당을 확대·재편하였다.
 
기존에 있던 녹금서당·자금서당·백금서당·장창당을 재편하고 새로이 황금서당·청금서당·적금서당·흑금서당·벽금서당을 설치하였다. 새롭게 설치된 5개 부대의 구성은 신라인 출신은 없고 모두 신라에 정복당한 피정복민(고구려인·말갈인·보덕국인·백제인)으로 이루어졌다. 5개 부대를 구성한 피정복민들은 본디 신라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신라의 왕도 경주에 기반이 없었고, 진골귀족과도 직접적인 연고 관계가 없었다. 따라서 이들이 신라의 중앙군으로 편제되어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철저히 왕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때문에 신라왕은 이들을 군사적 기반으로 삼는데 용이하였다. 더불어 피정복민을 중심으로 부대를 조직함으로써 옛 고구려와 백제 유민을 위무하고 포용하는 효과도 있었다.
 
 
4 나당전쟁과 구서당
 
구서당이 설치되는 배경에는 왕권을 공고히 하는 무력적 권력 장치 확보라는 대내적 목적 이외에도 당의 위협이라는 대외적 요인도 자리하고 있었다. 고구려 멸망 이후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삼국을 총괄하게 함으로써 한반도를 완전히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내었다. 이에 신라는 당에 대한 항쟁을 시작하였고 결국 문무왕 10년(670) 나당전쟁이 발발하였다.
 
이러한 국제 상황 속에서 문무왕 12년 백제인으로 구성된 백금서당이 조직된 것은 신라의 백제 장악 및 지배력 강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신라는 나당전쟁 기간 동안 당으로부터 적극적으로 백제의 영토를 회수하기 시작하여 이후 백제의 왕도 사비(泗沘)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고 도독을 파견함으로써 옛 백제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백제가 신라의 영역임을 확고히 한 문무왕은 나아가 백제 유민의 동요를 막고 그들의 충성을 확보하고자 백금서당을 설치하였다.
 
비금서당은 효소왕 2년(693)에 장창당이 개칭된 것이다. 장창당은 문무왕 12년에 설치된 장창보병(長槍步兵) 부대이다. 장창보병 부대란 보병이 기병의 공격을 막아 내기 위해 창(槍)·극(戟)·노(弩)·궁(弓) 등으로 무장하고 일정한 대열을 갖춘 전법을 구사하는 부대를 말한다. 나당전쟁에서 당은 대규모 기병을 동원하였는데, 당의 기병에는 당나라 사람으로 구성된 기병뿐만 아니라 말갈과 거란 기병도 포함되어 있었다. 반면, 신라 기병의 규모는 이러한 당의 기병과 그 전술을 대처하는 데에 있어 수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열세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문무왕은 당의 기병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해 장창보병으로 구성된 장창당을 조직하였다.
 
나당전쟁은 문무왕 15년(675) 매소성 전투와 동왕(同王) 16년(676) 기벌포 전투에서 신라가 승리함으로써 종결되었다. 그러나 당은 전쟁 종결 이후로도 신라에 사신을 보내 김춘추에 대한 태종(太宗) 묘호 사용을 빌미로 압력을 가하였다. 이러한 당의 외압은 신라가 당에 대한 외교 노선을 결정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신라는 태종무열왕의 묘호 개칭에 대한 당의 외압을 계기로 반당적(反唐的) 입장을 분명히 하고 나당전쟁의 재발(再發)에 대비하여 대규모로 군비를 확장·정비하였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구서당 역시 다른 군사조직과 함께 설치·완성되게 된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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