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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간에 새겨진 낙랑군의 실체는?
낙랑군 ‘한반도 서북 지역 존재’의 결정적 증거, 낙랑 목간을 둘러싼 논란
▣ 노형석 기자nuge@hani.co.kr

옛 낙랑군은 오늘날 중국 땅인가, 북한 땅인가. 독립국가 혹은 중국 식민지였는가. 2년여 전 북한의 수도 평양 부근에서 발굴된 2000여 년 전 낙랑시대 나무쪽 문서(목간)가 남한 학계의 해묵은 논란에 다시 불을 지피고 있다.

△ 평양에서 출토된 낙랑 목간과 비슷한 성격을 지닌 동시대 중국 공문서 목간. 1993년 중국 장쑤성 롄윈강에서 발견된 기원전 10년께의 한나라 묘에서 나온 것으로 당시 관할지 면적,호구,인구 증감 등을 담고 있어 이번에 출토된 낙랑목간의 원형을 짐작케하는 유물이다.

파장의 진원지는 지난 4월14일 낮 충남대에서 열린 한국고대사학회 정기발표회장. 첫 발제자인 윤용구 인천시립박물관 학예사는 ‘새로 발견된 낙랑 목간’이라는 제목으로 북한의 최신 발굴 유물을 갈무리한 소개글을 발표했다. 기원전 45년(한나라 연호로는 초원 4년) 낙랑군 내 25개 현의 현별 호구와 인구, 전체 인구 28만여 명을 기록한 당시 공문서 목간이 평양 낙랑 구역의 옛 귀틀무덤에서 발굴됐다는 내용이었다. 북한 사학자 손영종이 지난해 북한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학술지 <력사과학> 198~200호의 논문들을 통해 보고한 이 유물은 기원전 108년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군을 설치한 뒤 60여 년 지난 시점에 나온 유일한 통계 사료다.

평양 일대는 낙랑군 통치 지역?

윤 학예사는 손영종의 논문을 분석한 결과, 목간은 낙랑군 25개 현의 현별 호구 수를 적은 통계표라고 소개했다. 목간 목록, 사진, 수효, 서체, 판독 글자 전문 등은 언급이 없으나 낙랑군 남쪽 관할인 남부도위 7개 현, 동쪽 관할인 동부도위 7개 현, 중심부인 직할 11개 현의 일부 인구와 호구 수가 기록돼 있다. 목간 통계를 보면, 고조선 도읍이었고 낙랑군의 핵심부인 조선현(평양)의 호구 수가 근 1만 호에 이르는 등 직할지 11개 현의 인구가 17만9천여 명, 남부도위 대방현 이하 7개 현이 5만1167명 등 모두 4만5956호에 28만여 명이 낙랑군에 살았던 것으로 파악됐다. 윤 학예사는 <후한서> <한서> 등 기원후 한나라 사서의 인구통계와 비교한 결과 연평균 인구 증가율이 0.8%로 중원 다른 지역의 정상적인 증가율과 거의 일치한다고 밝혔다.

또 조선현 등 직할지 11개 현은 인구밀도가 높아 대부분 2천 호를 넘었다. 반면 동부도위나 남부도위는 1천 호 미만의 작은 현이 각각 3개, 6개였다. 동부도위의 동이현(함남 안변으로 추정)은 279호 2030명의 작은 마을에 불과했다. 또 목간은 전체 인구의 14%인 4만 명을 한족(중국인), 86%는 토착민으로 분류해 꽤 많은 중국 사람들이 흘러들어온 사실도 보여준다.

주류학계는 목간의 이런 통계 내용들을 한반도 서북 지역에 낙랑군이 설치됐음을 새삼 확증하는 결정적 증거로 받아들이고 있다.

일제시대부터 사학자 이병도 등이 통설로 제기한 낙랑군의 한반도 주재설은 80년대 이후 거센 반론에 부딪혀왔다. 북한 학계와 재야 학자들은 평양에 낙랑군과는 다른 ‘낙랑국’이란 토착 독립 국가가 기원후까지 존속했다가 후한에 복속되었으며, 313년 고구려에 흡수됐다고 주장해왔다. 기원후 32년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인 호동왕자가 낙랑왕 최이의 딸 낙랑 공주와 결혼하면서 내통해 낙랑국을 멸망시켰다는 <삼국사기> 기록, 이곳의 중국계 출토 유물들이 기원후 후한 계통이라는 것이 주된 근거였다. 이는 중국 왕조가 경영한 낙랑군은 요동벌의 요하 부근이나 더 서쪽인 요서 대릉하 일대에 있었다는 두 개 낙랑 병립설로 이어졌다.


 
그러나 북한 출판물에 보고된 목간의 발굴로 요동·요서 존립설은 빛이 바래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게 주류 학자들의 시각이다. 윤 학예사의 말대로 “목간의 호구 통계가 평양, 서북 지방이 낙랑군 통치 지역임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며, 각 현 관리들이 중앙의 명령에 따라 통계를 보고하지 않으면 만들 수 없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목간 통계에서 낙랑군 직할 지역이 가장 인구 밀집도가 높은 것으로 나온 만큼 평양이 통치의 중심이라는 사실도 명확히 입증됐다는 것이다. 한족과 토착민을 갈라 인구통계를 냈다는 점에서, 당시 낙랑 사회는 한족이 토착 사회 속에 융화하는 단계까지 이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북한 학설의 비현실적 한계 드러내”

북한 쪽은 왜 자기네 주장과 맞지 않는 목간 자료를 공개한 것일까. 손형종은 논문에서 “목간의 호구 통계가 얼핏 서북한에 낙랑군이 있던 것처럼 보이나 자세히 검토하면 요동반도 천산산맥 일대에 위치했다는 확고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목간에 나온 낙랑군을 평안, 황해도 지역으로 가정할 경우 인구가 밀집한 곡창 지대인 황해도 중심에 해당하는 군 남쪽 관할(남부도위) 3개현 인구수가 6000여명에 불과한 것으로 기록된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오히려 요동반도 남단이 인구통계에 걸맞는 지리 경제적 조건을 지녔다면서, 요하 부근의 별도 낙랑군 주재설을 입증하는 근거로 뒤집어 보고있다. 목간 출토지가 평양인 것은 요동 낙랑군의 관리가 목간을 들고 도망해왔기 때문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윤 학예사를 비롯한 남한 연구자들은 황당하고, 설득력이 떨어지는 가설이라고 이를 반박하고 있다. 영남대 사학과 권오중 교수는 “목간이 나온 장소를 우선 감안하지 않고, 거리가 먼 요서 쪽에 낙랑군 위치부터 비정하는 것은 북한 학설의 비현실적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윤 학예사는 “북한 스스로 낙랑군의 요동·요서 존재설을 부인하는 자료를 공개한 셈”이라며 “목간 정보의 전모에 대해 북한 쪽이 침묵하는 것은 이런 배경이 있는 것 같다”고 밝혔다.

고조선 강역과 직결되는 낙랑의 강역 문제는 우리 고대사의 미묘한 쟁점이다. 낙랑군의 변천사 자체가 만주 역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킨 ‘동북공정’의 주요 연구대상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새로 공개된 낙랑 목간은 새삼스런 화두를 던져준 셈이다. 이미 인터넷 포털에서는 이 목간의 의미와 낙랑군의 위치를 둘러싸고 누리꾼과 아마추어 애호가, 재야 사학자들 사이에 다시 입씨름이 벌어지고 있다.

낙랑 목간은 일제시대부터 지금까지 평양 부근에서 다섯 차례 발굴됐다. 전모가 파악된 것은 일제시대 남정리 116호분 출토 목간뿐이며, 해방 뒤에는 90년대 <논어> 구절을 새긴 대나무 목간(죽간)들이 출토된 사실 정도가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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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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