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85056
중국황제에게 퍼준 조공, 백제에 이득이었다
[사극으로 역사읽기] KBS1 드라마 <근초고왕>, 여섯 번째 이야기
10.11.29 12:00 l 최종 업데이트 10.11.29 12:00 l 김종성(qqqkim2000)
▲ KBS1 드라마 <근초고왕>. 사진은 근초고왕 역할을 맡은 탤런트 감우성. ⓒ KBS
KBS1 드라마 <근초고왕>의 주인공인 백제 근초고왕(재위 346~375년)은 성왕과 더불어 역사적으로 큰 족적을 남긴 백제 영웅이다. 그는 왕권강화나 정복사업에서 뿐만 아니라 외교 방면에서도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그는 고구려를 견제하고자 신라와 동맹을 체결하고 남중국의 동진(東晋)과도 외교관계를 체결했다.
중국과의 조공, 일방적인 퍼주기였을까
중국 동진과의 외교관계? 한국 고대왕국의 대(對)중국 외교를 접할 때마다, 우리는 '조공'이란 것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중국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한국의 특산품을 갖다 바치는 장면이 떠오른다. 근초고왕의 대중국 외교 역시 그런 조공외교였다. <삼국사기> '근초고왕 본기'에 따르면, 근초고왕은 재위 27년과 28년에 동진 황제 효무제에게 조공을 한 적이 있다.
'조공' 하면, 흔히 '퍼주기'를 연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조공이 일방적인 헌납이 아니라 물물교환 형식의 무역이었다는 점은, 오늘날 한·중·일 3국 학계에서 널리 공유되고 있다.
일본 학계에서는 하마시타 다케시를 필두로 해서 조공'무역'이라는 개념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중국 학계에서 사용되는 사행무역(使行貿易, 사신단 무역)이란 용어도 조공무역과 동일한 개념이다. 제후국의 외교사절단이 황제국을 방문하여 조공을 하는 기회에 양국 간 무역이 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조공무역이라 불러도 무방한 것이다.
조공을 무역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조공의 반대급부로 회사(回賜)라는 것이 지급되었기 때문이다. 조공을 받은 쪽에서 '답례로 하사하다'란 의미의 회사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은 중국 내부의 황제-제후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제후가 황제에게 조공을 하면 황제가 그에 대해 회사를 하던 전통이, 중국-외국 관계에까지 확대 적용된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조공과 회사 사이에 대가관계는 성립했어도 등가관계는 성립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조공을 받는 조건으로 회사를 했기 때문에 양자 간에 대가관계는 성립했어도, 조공 물량과 회사 물량 사이에 현저한 불균형이 존재했으므로 양자 사이에 등가관계는 성립하지 않았던 것이다. 조공무역에서는 어느 한쪽이 손해를 보았던 것이다. 한쪽이 '퍼주기' 외교를 했던 것이다.
그럼, 어느 쪽이 퍼주기 외교를 했을까? '그거야 당연히 힘없는 제후국에서 퍼주기 외교를 했겠지'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과연 그러할까? 조공무역의 원리를 정리한 것으로써, 역대 중국왕조의 무역관계를 관통한 동아시아 고전들의 기록을 살펴보기로 하자.
베푸는 외교 실천한 중국, 더 많이 주려는 제후국
▲ 남중국을 방문한 백제 사신의 모습. 이들의 임무 중 하나는 조공무역이었다. 사진은 서울시 송파구 올림픽공원 안의 몽촌역사관에 걸린 그림을 찍은 것. ⓒ 김종성
19세기 중후반까지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지침서였던 <예기> '왕제' 편에서는, 제후는 매년 최소 한 번씩 황제를 예방해야 한다고 했다. 이와 관련하여 <중용>에서는 "(황제 입장에서) 가는 것을 후하게 하고 오는 것을 박하게 하는 것은 제후들을 품는 일"이라고 하였다.
이 표현을 두고 주자(1130~1200년)는 "잔치와 하사를 후하게 하고 공물 납부를 박하게 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이러한 원칙들은 중국 내의 황제-제후 관계뿐만 아니라 중국-외국 관계에까지 적용되었다.
이 원칙의 요지는, 황제는 조공을 적게 받고 회사를 많이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을 더 많이 하라는 것이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중용>에서는 그것이 제후들을 품는 길이라고 했다. 그것은 황제국이 제후국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전제조건이었던 것이다.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이 원칙을 충실히 지켰다. 청나라 같은 예외만 제외하고 대부분의 왕조들은 받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제후국에게 제공했다는 것이 학계의 평가다. 요즘 말로 하면, 중국이 제후국과의 관계에서 대체로 무역적자를 보았다는 것이다. 퍼주기 외교를 한 것이다. 좋게 말하면, '베푸는 외교'를 한 것이다.
이처럼, 조공무역이 황제국 입장에서는 적자무역이고 제후국 입장에서는 흑자무역이었기 때문에, 중국의 이웃나라들 중에는 국가적 위신을 무릅쓰고 중국에게 더 많이 조공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것을 보여주는 사례는 매우 풍부하다. 그중 2가지만 소개하겠다.
조선-명나라, 명나라-일본 무역을 통해 본 중국의 퍼주기 외교
한 가지 사례는 1397년 조선-명나라 무역분쟁이다. 조선은 1년에 3차례 조공하겠다고 우기고 명나라는 3년에 1차례만 조공하라고 버티는 바람에 생긴 분쟁이다. 조공을 하면 할수록 중국이 적자를 보았기 때문에 이런 사건이 생기게 되었다.
결국 이 분쟁은, 1398년에 조선에서 정도전의 자주파 정권이 붕괴하고 1400년에 이방원의 친명파 정권이 들어섬으로써 해결되었다. 이방원 정권이 명나라의 대외전략에 협조해주는 대가로, 명나라는 1년에 3차례 조공무역을 하는 데에 동의했다. 그만큼 명나라의 적자폭은 늘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참고로, 당시 명나라는 각국의 조공 횟수를 <대명회전>이라는 법전에 아예 명문으로 규정해 놓았다. 이에 따르면, 오키나와 왕국은 2년에 1회, 베트남·태국은 3년에 1회, 일본은 10년에 1회 조공을 할 수 있었다. 조선은 1400년부터 1년에 3회를 하다가 1534년부터 1년에 4회를 했으니, 명나라가 조선에 대해서만큼은 대단한 무역특혜를 부여한 셈이다. 명나라는 '퍼주기'를 하고 조선은 '퍼받기'를 한 것이다.
또 다른 사례는 1551년 명나라-일본 무역단절이다. 1404년 이래로 명나라와 무역관계를 개설한 일본은 '10년 1회 조공' 규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10년에 1번만 오라고 하는데도, 어떤 때는 8년 만에 찾아가는 바람에 명나라의 항의를 초래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정 눈치가 보이면, 10년에 1번만 가되 조공 물량을 규정보다 늘리는 편법을 발휘했다. 많이 조공하면 그만큼 더 많은 회사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편법에 대해서도 명나라는 신경질적 반응을 보였다.
일본 측의 행태가 시정되지 않자, 1547년에 명나라는 복건성 영파 즉 푸젠성 닝보에 도착한 일본 조공선박을 10개월씩이나 묶어두기도 했다. 그런 방법으로 일본측에 경고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그러다가 1551년에는 대일 무역관계를 아예 전면적으로 중단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은 결국 그로부터 41년 뒤인 1592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로 가는 길을 열어달라"며 조선을 침공하는 사태로까지 연결되었다.
중국은 왜 적자 무역 포기하지 않았을까
▲ 명나라의 궁궐인 자금성 내부의 모습. ⓒ 김종성
위와 같이 조공무역이 자국에게 경제적 손실을 끼쳤는데도 중국이 조공무역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유지한 것은, 그것이 자국의 안보는 물론이요 동아시아 패권에도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동안 미국이 적자외교를 통해 한국 등 위성국들에게 패권을 행사한 것과 마찬가지로, 과거의 중국 역시 기본적으로 퍼주기 외교, 아니 '베푸는 외교'를 통해 자국의 영향력을 증대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외교전략은 크게 보면 중국의 패권을 유지하는 데에 기여했고, 작게 보면 중국이 이웃나라들의 침공으로부터 안보를 유지하는 데에 기여했다. 이 전략은 특히 동아시아의 '악의 축' 혹은 '불량민족'들인 흉노족·돌궐족·여진족 등의 위협으로부터 중국을 보호하는 데에 기여했다.
이렇게 퍼주지 않았다면, 중국 한족은 진작 멸절되었을지 모른다. 한때는 '큰손'이던 미국이 '짠돌이'로 바뀌자 미국의 패권행사에 대한 거부감이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국 한족이 베푸는 외교를 지향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사방의 적들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중국은 군사력이 아니라 경제력으로 자신을 보호했던 것이다.
중국어에 따거(大哥)란 말이 있다. 우리말로는 '형님'이란 뜻이다. 중국에서 따거 노릇을 하건 한국에서 형님 노릇을 하건 간에, 여기에는 공통분모가 있다. 그것은 남에게 베푸는 사람이 따거나 형님이 된다는 점이다.
국제관계건 국내관계건 혹은 개인이건 조직이건 간에, 남에게 돈을 쓰는 쪽은 대개 다 남을 이끄는 쪽이다. 돈을 안 쓰는 쪽이 리더가 되기는 힘들다. 자기 수중에 돈이 없으면 어떻게든지 돈을 '만들어' 와야만 리더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어찌 보면 남의 리드를 받는 쪽이 속편한지도 모른다. 돈 걱정을 안 해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남에게 돈을 쓰는 쪽이 실상은 돈을 버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근초고왕의 조공을 받은 동진 황제 효무제는 일반적인 관행에 따라 자신이 받은 것보다 더 많은 회사를 했을 것이다. 백제에 대한 그 같은 '퍼주기'를 통해 효무제는 북중국을 견제하는 효과를 창출할 수 있었다. 물론 이 관계를 통해 백제는 고구려를 견제할 수 있었지만, 백제가 얻은 이익은 동진이 얻은 이익에 비교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조선에게 무역특혜를 부여하는 대가로, 명나라는 툭 하면 여진족 토벌을 명분으로 조선에 파병을 요청하곤 했다. 명나라는 조선에 돈을 쓰는 대가로 조선 군대를 자기 군대처럼 이용한 것이다. 명나라의 퍼주기 외교는 과연 손해를 본 것일까?
퍼주기 외교가 실제로는 돈 버는 외교
백제를 포함해서 한국의 역대왕조들은 조공무역을 통해 무역흑자를 챙기는 데에만 주력했지, 그것을 통해 중국이 어떤 이익을 챙기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고민할 기회가 없었다. 왜냐하면,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민족은 아직까지 진정한 의미의 동아시아 패권을 행사할 만한 위치에 있었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한민족 왕조들은 대중국 조공외교를 통해 무역흑자를 얻기는 했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이 관계에서 더 큰 이익을 얻은 쪽은 한민족이 아니라 중국이었다. 한민족의 '퍼받기'와 중국의 '퍼주기'는 장기적으로 한민족을 중국의 영향권 하에 두는 데에 기여했다.
물론 한민족도 여진족이나 대마도·일본 등을 상대로 퍼주기 외교, 아니 '베푸는 외교'를 한 적이 있다. 일례로, 조선시대에는 신숙주(1417~1475년)가 주도한 '베푸는 외교'를 통해 대마도·일본을 조선의 영향권 하에 두고 그렇게 함으로써 오랫동안 왜구 피해를 방지한 경험이 있다.
신숙주가 은퇴한 뒤로 조선이 왜구 피해에 크게 노출되고 조선의 바다에서 문제가 터지기 시작한 사실은, 신숙주의 '퍼주기 외교'가 실제로는 '돈 버는 외교'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대마도·일본에 '퍼주기'를 하는 데에 투입된 비용보다도, 왜구에게 피해를 입고 왜구를 단속하는 데에 투입된 비용이 훨씬 더 많지 않았겠는가.
그런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아직까지 한민족은 '베푸는 외교'를 통해 자국의 안보를 유지하고 역내 패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을 고민해 볼 만한 여유가 별로 없었다. 한민족이 남에게 무언가를 베풀기에는, 지난날 한민족의 삶이 너무 각박하고 비참했다.
돈 모으기에만 급급했던 한국, 이젠 써야할 때
▲ 대마도에 남은 조선 사신의 흔적. 사진은 대마도 원통사 앞에 있는 조선사신 이예의 공적비(오른쪽). ⓒ 김종성
이제, 한국은 지금 G20의 경제대국이다. 이런 경제적 성과를 바탕으로 국제정치적으로도 높이 도약하려면, 한민족은 과감히 베풀 줄 아는 면모를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 부모자식 간에도 돈을 쓰지 않으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인데, 이 살벌한 국제관계에서 어떻게 돈을 쓰지 않고서 국제적 지위를 제고시킬 수 있을 것인가.
미국이 주머니에 돈이 없어 점점 인색하게 굴자, 미국을 대하는 국제사회의 태도가 차차 냉랭해지고 있다. 그에 따라 미국의 입지도 계속 좁아지고 있다. 돈을 안 쓰는 '짠돌이' 미국, 과연 이익을 얻고 있을까? 그런 미국의 전철을 한국은 밟을 필요가 없다.
한국이 한 단계 더 도약하는 길은, 가능한 범위 안에서 남에게 더 많이 베풀고 세상의 인심을 얻는 길이다. 남에게 빼앗기고 굶주렸던 참혹한 지난날을 잊지는 말되, 그런 기억이 우리의 민족성에 영향을 미치도록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야만, 장기적으로는 한국의 국제적 지위를 높이고, 단기적으로는 한국의 안보를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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