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naver.com/spiritcorea/130048809421
우리는 발해를 고려의 후계로 생각하고, 고려를 우리의 조상이자 고대 국가의 하나로서 우리 역사의 범주로 해석하는데, 그런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고려로부터 이어진 문화의 '영속성'을 찾아내야 한다. 많으면 많을 수록 좋다. 고려 문화의 편린으로 해석할수 있는 것이 중국 문화의 편린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 말갈 문화의 편린으로 해석할수 있는 것보다 더 많다면 우리에게 설득력이 생기고, 거의 압도적인 수준이라면 뭐... 게임 끝나는 거지.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02>후고려기(後高麗記)(15)
2009/06/06 02:15 광인
서기 773년. 간지로는 태세 계축에 해당하는 이 해에 문왕은 일련의 정치개혁을 꾀했다. 기록이 제대로 남은 게 없어서 확실한 사정을 볼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써오던 대흥 연호를 고쳐 보력(寶曆)으로 선포한 것도 그러한 내정개혁의 편린이다.
[乙丑, 渤海副使正四位下慕昌祿卒. 遣使弔之, 贈從三位, 賻物如令.]
을축(20일)에 발해의 부사 정4위하 모창록이 졸하였다.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고 종3위를 내렸으며, 영에 따라 물품을 내려 부조하였다.
《속일본기(續日本紀, 쇼쿠니혼키)》 권제32, 보귀(寶龜, 호키) 4년(773) 2월
일만복의 발해 사신단이 폭풍우 때문에 일본에 발이 묶여있는 동안, 부사 모창록이 죽는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발해의 사신들은 가까스로 일본을 떠나 동해 위에 배를 띄웠다.
4월에 발해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회하고, 아울러 방물을 바쳤다.
《책부원귀》
조공 기록 말고 다른 걸 좀 적어보고 싶은데, 남아있는 게 이것밖에 없다보니....
6월에 발해가 사신을 파견하여 정조를 하례하니, 연영전(延英殿)에 불러서 만나보았다.
《책부원귀》
아마 당에 보낸 사신이 연영전에서 대종을 알현하기 전에는 돌아와 있었을 것이다. 일만복은.
[丙辰, 能登國言 "渤海國使烏須弗等, 乘船一艘來著部下. 差使勘問. 烏須弗報書曰 '渤海日本, 久來好隣, 往來朝聘, 如兄如弟. 近年日本使内雄等, 住渤海國, 學問音聲, 却返本國. 今經十年, 未報安否, 由是, 差大使壹萬福等, 遣向日本國擬於朝參, 稍經四年, 未返本國. 更差大使烏須弗等■人, 面奉詔旨. 更無餘事. 所附進物及表書, 並在船內.]
병진(12일)에 능등국(能登國, 노토노쿠니)에서 말하였다. "발해국의 사신 오수불(烏須弗) 등이 배 한 척을 타고 부하(部下)에 와서 닿았습니다. 사신을 시켜 온 이유를 묻게 했습니다. 오수불이 글을 보내서 말하기를 '발해와 일본은 오래도록 우호를 닦아 왔고 오가며 조빙(朝聘)함이 형과 아우 같았습니다. 근년에 일본의 사신 내웅(內雄, 우라오) 등이 발해국에 와서 음성(音聲)을 배우고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10년이 다 되도록 안부가 오지를 않길래 대사 일만복 등에게 부쳐 일본으로 보내어 조참(朝參)하게 했지만, 4년이 다 되도록 본국에 돌아오지를 않습니다. 다시 대사 오수불 등 40인을 뽑아 직접 면대하고 지(旨)를 받들게 했습니다. 다른 일은 없습니다. 부쳐온 물품과 표서(表書)는 모두 배 안에 있습니다."
《속일본기(續日本紀, 쇼쿠니혼키)》 권제32, 보귀(寶龜, 호키) 4년(773) 6월
오수불은 귀국하지 않는 사신 일만복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보려고 파견된 임시사신인지라, 그 관명이나 관위가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에 남아있지가 않다. 혹자는 이 사람이 정말 관인이었는지도 의심스럽다고 했지만, 관위가 나오고 안 나오고는 단지 기록에서 빠진 것 뿐이고, 오씨 성 가진 사람이 발해에서 실제로 벼슬한 일도 있고 보면 단순히 관위명이 기재되어 있지 않다는 것에 대해서 뭐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戊辰, 遣使宣告渤海使烏須弗曰 "太政官處分, 前使壹萬福等所進表詞驕慢, 故告知其状罷去已畢. 而今能登國司言, 渤海國使烏須弗等所進表函, 違例无礼者, 由是不召朝廷, 返却本郷. 但表函違例者, 非使等之過也. 渉海遠來, 事須憐矜. 仍賜祿并路粮放還, 又渤海使取此道來朝者, 承前禁斷. 自今以後, 宜依舊例從筑紫道來朝."]
무진(24일)에 사신을 보내어 발해의 사신 오수불에게 선고하여 말하였다. "태정관(太政官, 타이죠칸)의 처분은, 앞서의 사신 일만복 등이 올렸던 표문의 글이 오만방자하여 그 글을 내쳐서 쫓아 보내도록 고지시킨지 얼마 안 되었다. 그러나 지금 능등국사(能登國司, 노토노고쿠시)의 말에 발해국의 사신 오수불 등이 올린 표함(表函)은 관례와는 달리 예의가 없기에 조정에서는 받아들이지 않고 본향(本鄕)으로 돌려보냈다. 다만 표함이 격례에 어긋난 것은 사신들의 잘못이 아니며, 바다 건너 멀리서 온 것이 참으로 딱해서 녹과 돌아갈 노자를 주겠다. 또한 발해의 사신이 이 길을 따라 내조하는 것은 이미 앞서 금지시켰다. 앞으로는 마땅히 구례(舊例)에 따라 축자도(筑紫道, 츠쿠시노미치)로 해서 내조하도록 하라."
《속일본기(續日本紀, 쇼쿠니혼키)》 권제32, 보귀(寶龜, 호키) 4년(773) 6월
일만복의 소식을 듣지 못한 까닭도 있겠지만, 오수불이 가져온 발해의 국서는 이번에도 전과 별 다른 것이 없었던 것 같다. 능등(노토)의 태수(고쿠시)는 여전히 발해를 자신들에게 조공 바치는 번국 정도로 여기고 표함이 예에 어긋나니 어쩌니 하면서 돌려보내고, 다음부터는 본주(혼슈)로 오지 말고 구주(규슈)의 대재부(다자이후)를 통해서만 수도로 들어오라는 선고를 하고서 돌려보낸다.
[乙夘, 送壹萬福使正六位上武生連鳥守至自高麗.]
을묘(13일)에 일만복을 전송한 사신 정6위상 무생련(武生連, 타케후노무라지) 조수(鳥守, 토리모리)가 고려에서 이르렀다.
《속일본기(續日本紀, 쇼쿠니혼키)》 권제32, 보귀(寶龜, 호키) 4년(773) 10월
그리고 오수불이 떠난 타이밍에 맞추기라도 했는지 일만복은 무사히 발해로 돌아왔다. 같은 바다 위에서 서로 길이 엇갈리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대력(大曆) 8년(773) 윤11월에 발해의 질자가 곤룡포(袞龍袍)를 훔쳤으므로 잡아 가두었는데, 공초하기를 “중화의 문물을 흠모해서 그랬습니다.” 하니, 황제가 불쌍하게 여겨 놓아주었다.
《책부원귀》
《책부원귀》에는 보력 원년에 해당하는 당 대종 대력 8년, 11월과 윤11월에 두 번이나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회하였다고 적고 있는데, 다음 달 12월에도 두 번 더 사신을 파견한 것을 《책부원귀》에서 확인할 수 있다.
9년 갑인(774) 정월에 발해가 와서 조회하였다.
《책부원귀》
보력 2년. 당에서도 발해가 연호를 바꾸었다는 소식은 어렴풋이나마 들었겠지만 그것에 대해서 당조는 귀찮게 신경쓸 여력이 안 됐다.
2월 신묘에 발해의 볼모 대영준(大英俊)이 본국으로 돌아갔는데, 연영전에서 하직 인사를 올렸다.
《책부원귀》
그러고 보면 발해의 질자가 당의 곤룡포를 훔치고 '전 중국을 사랑했을 뿐이에요'라고 울면서(?) 호소한 것도 뭔가 정치적으로 쇼한 게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연호를 바꾸었을 뿐이지 발해는 당조에게 뭔가 반의를 품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중화의 문물에 귀의하기 위해 이런 식의 '스토커'짓까지 벌이고 있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한 고도의 심리 트릭. 여기서 이런 얘기를 왜 갖다붙였냐 하면 여기 나오는 대영준이라는 자가 바로 천자의 용포를 훔쳤다가 감옥에 갇혔던 그 '발해질자'였기 때문이다.
12월에 발해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회하였다.
《책부원귀》
발해는 한 달 뒤에 다시 한 번 사신을 파견했는데, 공교롭게도 신라와 그 일정이 맞물렸다. 태세 을묘ㅡ그러니까 발해 문왕 보력 3년 정월의 신년축하행사에서 신라 사신과 마주친 것이다.
10년 을묘(775) 정월에 신라와 발해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였다.
《책부원귀》
신라와 발해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사신을 보냈다고 《책부원귀》가 설명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두 나라가 서로 친하게 지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실제 역사에서도 그렇지만 이들은 단지 '서로 마주쳤다' 그것 뿐이었다.
[甲申, 以平盧淄靑節度觀察海運押新羅渤海兩蕃等使、檢校工部尙書、靑州刺史李正己檢校尙書左仆射;前隴右節度副使、隴州刺史馬燧爲商州刺史, 充本州防禦使.]
갑신에 평로치청절도(平盧淄靑節度)ㆍ관찰해운압신라발해양번등사(觀察海運押新羅渤海兩蕃等使)ㆍ검교공부상서(檢校工部尙書)ㆍ청주자사(靑州刺史) 이정기를 검교상서(檢校尙書)ㆍ좌복야(左仆射)로, 전(前) 농우절도부사(隴右節度副使)ㆍ농주자사(隴州刺史) 마수(馬燧)를 상주자사(商州刺史)로 삼고 본주의 방어사(防禦使)로 채웠다.
《구당서》 권제11, 대종본기제11, 대력 10년(775) 2월
보력 3년 정월, 이정기는 위박절도사 전승사 토벌의 상소를 올린 뒤 본격적으로 세력을 넓혀나갔다. 그야말로 '승승장구', 싸울 때마다 승리했다.
5월에 발해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였다.
《책부원귀》
아마 그러한 이정기의 실상은 발해 조정에도 보고되었을 것이다ㅡ자신들과 같은 고려인이, 대당 안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틀어쥐고서 산동반도를 기반으로 당조를 위협하다시피하는 모습이 발해에게 어떻게 비쳤을지는 아마 그 사람들만 알겠지.
6월에 신라와 발해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였다.
《책부원귀》
신라와 발해, 요하 동쪽의 두 나라에서 당에 사신을 보냈던 보력 3년 6월, 그 즈음 당조는 혼란스러웠다. 발해 사신의 숙소인 발해관이 있던 덩저우(登州)에 도착한 발해 사신들은 이곳에서 산동반도 전체를 아우르며 강력한 힘을 자랑하던 고려인 절도사의 모습을 보았다.
[六月戊戌, 以李靈耀爲汴州刺史, 充節度留後. 秋七月戊子夜, 暴澍雨, 平地水深盈尺, 溝渠漲溢, 壞坊民千二百家. 庚寅, 田承嗣兵寇滑州. 李勉拒戰而敗. 八月丙寅, 幽州節度使硃泚加同中書門下平章事. 李靈耀據汴叛. 甲申, 命淮西李忠臣、滑州李勉、河陽馬燧三鎭兵討之. 閏月丁酉, 太白經天. 九月乙丑, 李忠臣等兵進營鄭州. 靈耀之衆來薄戰. 淮西兵亂, 乃退軍於滎澤.]
6월 무술에 이영요(李靈耀)를 변주자사(汴州刺史)로 삼아 절도유후로 채웠다. 가을 7월 무자일 밤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서 평지에 고인 물이 깊은 곳은 한 자가 넘었고, 구거(溝渠)가 범람하니 방(坊)의 민가 1200여 가(家)가 무너졌다. 경인에 전승사의 병사들이 활주(滑州)를 약탈하였다. 이면(李勉)이 맞서 싸웠으나 패했다. 8월 병인에, 유주절도사(幽州節度使) 주차(硃泚)에게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를 더하였다. 이영요가 변주를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갑신에 회서(淮西)의 이충신(李忠臣)ㆍ활주의 이면ㆍ하양(河陽)의 마수(馬燧), 3진의 병사들에 명하여 토벌하게 하였다. 윤월 정유에 태백성[太白]이 대낮에 나타났다. 9월 을축에 이충신 등의 병사들이 정주(鄭州)에 진군하여 주둔하였다. 영요의 무리가 와서 싸움이 벌어졌다[薄戰]. 회서(淮西)에 병란이 있어 영택(滎澤)으로 퇴군하였다.
《구당서》 권제11, 대종본기제11, 대력 10년(775)
변주는 장강과 회수의 물산들이 모두 거쳐가는 대운하의 요충지였는데, 원래 이 땅을 차지하고 있던 변송절도사 전신옥이 죽은 뒤 새 주인을 놓고 파란에 휩싸였다. 당조에서 종친이었던 영평군절도사 이면을 변주자사와 변ㆍ송 2주를 비롯한 8주를 맡을 절도관찰유후로 삼아 당조의 직할지로 삼으려 했지만, 변주 군사들은 당조의 종친이 부임하는 것에 반발했고, 마침내 변주자사였던 이영요를 필두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면의 부임을 환영했던 복주자사 맹감을 죽이고, 당조로 이어지는 변주의 조운을 끊은 뒤 전승사에게 사람을 보내 동맹을 요청한 것이다.
《구당서》에 보니까 9월 을축에 당조에서 보낸 토벌군이 정주에 진군하여 주둔하면서 이영요의 군사들과 접전을 치렀는데, 토벌군 대장의 한 사람인 이충신이 다스리던 회서에 병란이 있어 이에 영택(滎澤)으로 퇴군하였다고 기록했다. 을축에서 무진까지는 사나흘 정도, 불과 사나흘 사이에 이정기라는 고려인 사내가 당 조정에 느닷없이 '운주와 복주를 내가 차지했습니다'하고 통보한다.
[戊辰, 淄靑李正己奏取鄆ㆍ濮二州.]
무진에 치청(淄靑) 이정기가 운(鄆), 복(濮) 2주를 차지했다고 아뢰었다.
《구당서》 권제11, 대종본기제11, 대력 11년(776) 9월
사실 이영요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정기는 회남절도사 진소유와 함께 자신이 나서서 이영요의 반란을 진압하겠다는 토벌요청을 올렸지만, 이는 거절된다. 그에게 반란은 '기회'였다. 당조를 위해 반란을 진압해주겠다는 것을 구실로
변ㆍ송 토벌을 청하고, 그 땅을 아이템으로 획득하게 되면 평로치청에도 유리한 일. 잘하면 조운의 요충지인 변주를 차지할 기회였다. 당조라고 그걸 모르는 것은 아니어서 이정기나 진소유 대신 당조에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없는, 충성이 '보증'된 영평절도사 이면과 회서절도사 이충신, 하양삼성사 마수 세 사람에게 대신 토벌하도록 명한 것이다.
하지만 이정기가 누구야. 오는 기회 안 놓치고 가는 기회 안 만드는 이 눈치 빠른 남자는, 이충신이 회서번진의 병란 소식을 전해듣고 영택으로 퇴군한지 나흘에, 전격적으로 토벌전에 개입해 운주와 복주를 차지하는 센스를 보여주신다.
[及李靈曜之亂 諸道共攻其地, 得者爲己邑. 正己復得曹ㆍ濮ㆍ徐ㆍ兗ㆍ鄆. 共十有五州.]
이영요가 반란을 일으키기에 이르러 여러 도(道)에서 함께 그 땅을 공격하였는데. 각자 차지한 것을 자기 영토[己邑]로 삼았다. 정기도 다시 조(曺)ㆍ복(濮)ㆍ서(徐)ㆍ연(兗)ㆍ운(鄆)을 얻었다. 열 주에 다섯 주를 합쳐 함께 다스렸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74, 이정기
이정기의 열전에 기록된바 그가 이번 일을 구실로 토벌전에 개입해 얻은 땅은 산동반도 서부 5주. 비록 변주는 토벌에 참가했던 이충신이 당조로부터 변주자사로 임명되면서 그의 손에 들어갔지만, 원래 가지고 있던 치청번진 관할 10주에 새로 다섯 주를 더 포함하게 되면서 산동반도 전역을 자신의 손에 넣었다. 발해보다는 못하지만 신라보다는 훨씬 넓었고, 이정기와 같은 시기에 활약하던 당조의 어떤 절도사들도 그의 영지를 능가하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위주에서 반란의 주역 전승사를 사로잡았지만, 나이든 노인인 것을 들어 예의를 갖추어 풀어주더니, 천자에게 수차례에 걸쳐 전승사 사면을 요청한다. '이랬다저랬다장난꾸러기'라는 가사처럼, 이정기가 전승사에게 갑자기 우호적으로 돌아선 것은 그의 자비심을 과시함으로서 주변 절도사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것은 이정기라는 고려인 남자의 왕조를 지탱해주던 배경과도 관련이 있다.
이 무렵 이정기가 당의 영토 내에서 독립왕국 '평로치청'의 제왕으로 군림할 수 있게 해준 배경은 지방번진의 많은 유력자들과의 정치적인 동맹관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구당서》 양숭의열전에는 양숭의나 전승사ㆍ이정기ㆍ설숭ㆍ이보신 등 이 무렵 고위관직을 거의 독점하고 있던 유력한 지방번진 수장들의 이름이 나오고, 그 뒤에 '보거지세(輔車之勢)'로 서로를 지켰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무렵 절도사들은 서로 동맹을 맺고 당조의 명령을 거부하며 조세도 바치지 않았는데, 당조의 견제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한 방편이었다.
봉건시대 정치적동맹의 가장 보편적인 수단은 유력한 두 집안 사이의 '정략혼인', 이정기 시대의 절도사들 사이에도 이러한 정략혼이 많이 이루어졌는데, 이정기의 경우는 산남동도절도사로 있던 양숭의와 혼인동맹을 맺고 있었다. 이를테면 반당동맹인 셈이다. 말이 좋아 '동맹'이지 차포 다 떼고 보면 동네 '계'하고 뭐가 다른지.
[大歷十一年十月, 檢校司空, 同中書門下平章事.]
대력(大曆) 11년(776) 10월에 검교사공(檢校司空)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이보다 한 달 전인 9월, 이영요의 반란은 평정되었다. 수세에 몰리던 이영요를 구원하기 위해서 전승사는 3만 병사를 내어 구원하려 했지만 이들은 회서ㆍ하양 두 번진 절도사에게 패하고, 이 소식을 들은 이영요는 변주성을 버린채 도망쳤다가 활주에서 온 두여강이라는 장수에게 붙들려 장안으로 압송되었던 것.
아무튼 운주와 복주를 점령하고 한 달만에 당조는 이정기를 검교사공 동중서문하평장사로 봉한다. 《구당서》열전에는 10월이라고 했지만 본기에는 겨울 12월 정해의 일이라고 해서 두 달 차이가 있는데, 날짜 차이를 차치하고 봐도 이정기가 받은 그 지위는 당의 재상직과 맞먹는 지위였다.
[乙巳, 渤海國遣獻可大夫司賓少令開國男史都蒙等一百八十七人, 賀我即位, 幷赴彼國王妃之喪. 比着我岸, 忽遭惡風, 柁折帆落, 漂沒者多. 計其全存, 僅有■六人. 便於越前國加賀郡安置供給.]
을사(22일)에 발해국이 헌가대부(獻可大夫) 사빈소령(司賓少令) 개국남(開國男) 사도몽(史都蒙) 등 187인을 보내어 우리의 즉위를 축하하고 아울러 그 나라 왕비의 상을 고하였다. 이들은 우리 해안에 닿았으나 갑자기 악풍을 만나 키[柁]는 부러지고 돛대[帆]는 떨어져 익사한 사람이 많았다. 온전한 사람을 헤아려 봤지만 겨우 46인이었다. 월전국(越前國, 에치젠노쿠니) 가하군(加賀郡, 카가노고오리)에 안치하고 공급하여 편하게 했다.
《속일본기(續日本紀, 쇼쿠니혼키)》 권제34, 보귀(寶龜, 호키) 7년(776) 12월
구주(규슈)의 대재부(다자이후)를 통해서만 출입이 허가되었음에도 대재부(다자이후)가 아닌 월후(에치고)로 와버린 발해 사신들. 이들도 실은 발해의 토우포(吐亏浦)에서 출발해 서쪽으로 대마도(쓰시마지마)의 죽실진(竹室津, 타케무로츠)으로 가려 했지만, 하필 또 풍랑을 만나 이곳 '금지구역'에 도착한 것이었다.
사도몽의 지위는 헌가대부 사빈소경 개국남. 헌가대부니 개국남이니 하는 것은 작위이고, 직책은 사빈소령(司賓少令)이라는 외교부 소속의 관직이었다. 발해에는 사빈시(司賓寺)라고 불리는 지금의 외교부와 비슷한 관청이 있었다.
사빈시의 총책임자는 경(卿)이라고 해서 사빈시경이라 불렸고, 그 아래에 소경이 한 명 있었다고 《발해고》에는 적고 있다. 사빈소령이라는 것은 아마 사빈소경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발음이 비슷하니 헷갈렸을 수도 있지 뭐.
[十二年正月, 王獻日本舞女十一人, 及方物于唐.]
12년(777) 정월에 왕이 일본의 무녀 11인과 아울러 방물을 당에 바쳤다.
《발해고》 군고(君考), 문왕
보력 4년. 발해 사신을 따라 당조로 온 일본의 무녀 11인에 대한 기록에서, 이들 '무녀'는 민간의 그것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신당서》예악지에 따르면 당조에서 중화 사방 14국의 음악과 8국의 '기(伎)' 즉 춤을 지니고 있음이 당조 본국의 10부악에 필적한다는 자랑 섞인 기록을 담고 있는데, 음악과 무용이라는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이미지를 통해 천자의 덕화가 사방의 사이(四夷)에게까지 미쳤다는, 그렇게 그것이 그들 나라의 음악과 무용에까지 미쳤다는 것을 과시하려던 것이다.
천자국이라면 두루 다 갖추는 '필수덕목'이 궁정의례에서 펼쳐지는 외국의 춤과 음악, 소위 말하는 '번진악(蕃鎭樂)'이었는데, 그렇다고 우리 나라에서 번진악을 만들었던 흔적 같은게 보이는 건 아니다. 조선조 세조 때에 양성지가 한번 건의하긴 했는데 실행되지는 않았고, 고려 때의 팔관대회 때에는 고려나 중국, 일본뿐 아니라 서역과 몽골에서 들어온 온갖 음악과 춤, 기예들이 '가무백희'니 '사선악부'라는 이름으로 향연된 일은 있었다. 당시 봉건사회에서 외국의 음악과 춤을 한 나라의 궁정의례에서 향연한다는 사실 자체에 스스로를 사방의 여러 국가를 아우른 제국으로 인식하는 자국중심 사상이 있는 것이지, 지금처럼 '국제적인 색채가 짙구나'하는 수준이 아닌 거다.
문제는 문왕이 일본의 무녀를 바치기 전에 일본에서 무녀가 발해로 건너갔다던지 아니면 일본측이 무녀를 선사했다던지 하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양승경이나 일만복 같은 발해 사신들에게 조당에서 여악(女樂)을 연주했다거나 권신이었던 등원중마려(후지와라노 나카마로)가 개인적으로 사람을 시켜 여악을 보내준 일은 《속일본기》에 실려있고, 오수불의 말로도 일본 사신 내웅(우라오)이 발해에 왔다가 발해 음악을 배워갔다고 했지만, 이 시기에 정말 일본 무녀가 발해에 건너갔다고 해도 당에 헌상되기까지는 18년에 가까운 세월이 걸렸을 테니까. 혹자는 발해가 직접 '일본 무녀 11명'을 만들어서 당조에 보낸 것은 아닐까 하고도 말한다. 662년에 당조에 파견된 일본의 견당사(겐토시)가 하이(蝦夷, 에미시)들을 데리고 갔던 것처럼, 해당 이민족을 '제후'로 거느리고 있는 '소(小)제국'으로서의 성격을 발해는 당조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일만복을 시켜서 '천손'이 어쩌고 한 국서를 보낸 시점과도 맞물리는 일본 무녀 헌상 기록은 발해가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단적인 생각ㅡ 필요에 의해 서로 우호하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결국 발해보다는 한 수준 떨어지는 고래(古來)로부터의 '남방 오랑캐'라는 관념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해석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당조가 '사이'로 대표되는 주변 이민족들을 자신들의 '번방(속국)'으로 취급하듯, 발해 역시도 남방의 '신라'나 '일본'에게 당조만큼의 우월의식은 아니어도 '넌 나보다 떨어져'라는 자존의식은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반대로 신라에서도 발해를 '말갈'취급하며 자신들 북쪽의 '번방'으로 인식했었지)
그렇게 본다면 발해와 일본의 사이가 그리 썩 우호적이었다고 보기도 힘들겠고, '표리부동'이라는 단어 그대로 '겉으로는 서로 보고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업신여기고 깔보는' 외교가 지속되었던 정도로밖에 발해와 일본 사이의 소위 '우호외교'를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2월에 사신을 파견하여 매를 바쳤다.
《책부원귀》
일본의 무녀를 헌상한 바로 다음달에 발해에서는 다시 당조에 사신을 파견해 매를 헌상한다. 매를 헌상하기 위해서 덩저우에 있는 발해관ㅡ평로치청번진의 관할령에 당도했을 발해의 사신들은, 산동 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단히 '기이'하고 '특기'할만한 상황을 목격한다. 자신들과 같은 고려인 번장(蕃將)이 이 산동 지역의 지배권을 틀어쥐고 있으면서 다른 절도사와는 비교조차 하기 힘든, 거의 '독립국가'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강력한 통치력을 지니고 있는 상황을 말이다.
[二月戊子, 淄靑節度使李正己之子納爲靑州刺史, 充淄靑節度留後.]
2월 무자에, 치청절도사 이정기의 아들 납(納)을 청주자사(靑州刺史)로 삼고, 치청절도유후(淄靑節度留後)로 채웠다.
《구당서》권제11, 대종본기제11, 대력 12년(777)
당조가 이정기의 아들 이납을 청주자사로 삼은 것은 이정기의 요구에 따른 것도 있었다. 아들을 청주자사에 앉혀서 치소 청주의 통치를 맡기고 자신은 대외팽창에 주력하는 구도를 짜려고 한 것인데, 훗날 이납의 아들이었던 이사고도 이납과 마찬가지로 청주자사의 관직을 제수받고 나서 이납의 대권을 물려받았다는 점을 보면 이정기의 나라에서 '청주자사'란 곧 '태자'에 준하는 자리였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발해의 '부왕(태자)'이 '부왕' 직위와 함께 발해의 '계루군왕'이라는 직책을 맡아봤던 것과도 통하는 부분이다. 《구당서》이정기열전에 보면 평로치청 15주에 대한 그의 통치스타일을 이렇게 설명한다.
[爲政嚴酷, 所在不敢偶語. 初有淄ㆍ靑ㆍ齊ㆍ海ㆍ登ㆍ萊ㆍ沂ㆍ蜜ㆍ德ㆍ棣等州之地, 與田承嗣ㆍ令狐彰ㆍ薛嵩ㆍ李寶臣ㆍ梁崇義更相影響.]
정사를 다스림이 엄하고 가혹하여, 그가 있는 곳에서는 감히 마주 보고 얘기하지도[偶語] 못했다. 처음 치(淄)ㆍ청(靑)ㆍ제(齊)ㆍ해(海)ㆍ등(登)ㆍ래(萊)ㆍ기(沂)ㆍ밀(蜜)ㆍ덕(德)ㆍ체주(棣州)의 땅을 관장하면서 전승사ㆍ영호창ㆍ설숭ㆍ이보신ㆍ양숭의 등과 함께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74, 이정기
현종조 이후로 문란해진 정치질서는 대종 때까지도 지속되어 당조는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거의 잃었고, 공자가 말씀하신 바 "천하에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예악과 정벌이 제후에게서 나오니, 제후로부터 그것이 나오면 대체로 10대 안에 정권을 잃지 않은 일이 드물고, 대부로부터 나올 적에는 5대 안에 정권을 잃지 않는 일이 드물며, 가신으로부터 나올 적에는 3대 안에 정권을 잃지 않음이 드물다." 라고 하신 상황이 당조 안에서 그대로 연출되고 있었다.(실제로는 대종 이후 12대까지 갔지만)
당의 사가들은 대개 이정기의 통치스타일은 '가혹'에 가까운 엄격함이었다고 말하는데, 사실 안ㆍ사의 난이 막 끝난 혼란스러운 시대에 법령을 다소 엄격하게 집행하지 않으면 곧바로 소요와 반란이 일어나기 쉬웠다는 점에서 그들의 평가는 너무 지나친 점이 있다. 연개소문의 카리스마와 무력(武力)을 '잔악무도함'으로 비틀어버린 것처럼. 게다가 이정기가 무작정 '가혹함'으로 평로치청 15주에 대한 태도를 일관한 것은 아니다.
[內視同列. 貨市渤海名馬, 歲歲不絕, 法令齊一, 賦稅均輕, 最稱強大.]
내부를 동등하게 대우하고, 시장에서는 발해의 명마가 거래되는 것이 해마다 끊어지지 않았다. 법령은 하나같이 공평한데다 부세마저 균일하게 가벼웠으므로 제일 강대하다 칭하였다.
《구당서》 권제124, 열전74, 이정기
평로치청 안에서 15주는 모두 동등하게 대우받았다.
'하나같이 공평한 법률'하에서 말이다. <중국 속 고구려왕국, 제(齊)>의 저자인 지배선 교수는 여기서의 '법령'이란 이미 유명무실해져버린 당조의 법령이 아니라 평로치청 내에서의 고유한 법령을 가리키며, 당시 문왕이 다스리던 발해의 법령을 들여와서 퍼뜨렸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평로치청의 모든 시장에서 발해의 명마가 거래되었고 등주에는 발해 사신들이 오가는 발해관이 있었으니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당조의 법령이 유명무실했다고 해서 구태여 무시할 필요까지 있었을지, 이정기가 정말 자신만의 법령을 제정했거나 이웃한 '동족' 발해의 법령을 받아들였다면 이정기를 '까기' 바빴던 중국 사가들이 그걸 빠뜨렸을까 의문이 간다. 법령이 유명무실해지는 것은 그걸 판결하고 집행할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쇠퇴하기 때문이지 법령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는 아니잖아. 통제력만 회복되면 법령은 언제든지 다시 그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더욱이 아직 평로치청에서 당조에 대놓고 반항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 이상, 괜히 당조에 흠잡힐 짓을 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독자적인 법령을 제정한다는 자체에 이미 기존의 법령을 제정한 당조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당조의 법령ㅡ율령격식으로 대표되는ㅡ은 이 무렵 동아시아 전역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는데, 발해와 신라, 일본, 나아가 왕건이 세운 고려 때까지도 당의 법령을 모법으로 한 여러 법령이 제정될 정도로 당의 법령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선진적인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다만 이정기는 이 법령에 힘을 실어주었을 뿐이다. 원래 당조가 제공해야 할 통제력, 법령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 가치'를 당조를 대신해 부여해준 것으로 당조가 행사하던 평로치청에 대한 통제력을 '법령'이라는 이름으로 이정기가 차지한 것, 그것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산동 지역의 여러 사람들은 모두 이정기의 백성이 되겠다며 자발적으로 모여들었다.
부세가 가벼웠다는 것에 대해서 말인데, <이덕일 사랑(舍廊)> 칼럼에서 본 얘기로《맹자》고자장구편 '백규장'에 보면 조세에 대해서 맹자가 백규와 나눈 대화가 등장한다. 사마천의 《사기》화식열전에도 등장하는, 춘추전국시대 위(魏)의 거상(巨商)이자 재상이었던 백규(白圭)가 당시 백성들로부터 받아들이는 세금을 기존의 1/10이 아닌 1/20으로 받겠다고 하자 맹자가 "당신이 하려는 그건 맥(貊)의 방법이다[子之道貊道也]"라고 하며 반대한 것이다. 단재 선생의 <조선상고사>에도 《춘추》공양전(公洋傳)·곡량전(穀梁傳)을 인용해 "십일(什一)보다 적게 받는 자는 대맥(大貊)·소맥(小貊)이다[少乎什一者, 大貊小貊也]." 라고 한 말을 적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맥이란 곧 당시의 고조선 즉 조선을 의미한다. 십일조라는 말에서 보이듯 봉건사회의 세금, 지배자가 피지배자에게서 거둬들이는 조세는 보통 피지배자가 거둬들이는 수입의 1/10으로 되어 있었다. 고조선 당시 중국에서는 5/10, 즉 피지배자 수입의 절반을 세금으로 받아갔는데 고조선에서는 1/20으로 세금을 받았으니 중국보다도 더 선진적인 조세할인을 실시했던 나라가 우리나라임을 알겠고, 이러한 낮은 세금은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주었다.
비록 맹자는 고조선에서 이토록 '축복받은' 조세를 내는 것에 대해서 "그 나라는 오곡이 안 나고 수수만 나며, 성곽이나 궁실도 없고 종묘에서 제사지낼 줄도 모르고 제후의 폐백이나 외국에서 온 빈객에게 잔치해줄 줄도 모르고, 관리도 없고 관청도 없는 나라라 1/20만 받아도 충분한 것"(한마디로 중국만큼의 행정체계가 못 갖춰진 미개하기 짝이 없는 나라라는 의미?) 이라고 했지만, 유가의 관점이 아닌 도가, 노자의 관점에서 이러한 상태는 굉장히 안정적인 태고의 상태, 무위(無爲)로서 루소가 말한 '자연으로 돌아가라'의 그 자연과도 일치하는 점이 있다. 국가라는 것이 서서 백성들을 핍박하기 전의 가장 자연스러운 인간 본연의 상태ㅡ모든 인류가 서로 동등한 상태로 하늘에 계신 신의 뜻에 따라 평화롭게 살아가던 나라, 그것이 옛 조선, 우리 나라의 원래 모습이었다. (이젠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아련한 추억이 되었지만)
발해의 말이라는 것은 솔빈부, 지금의 연해주 우수리스크 지역에서 나던 명마를 말하는데, 《구당서》나 《신당서》 모두가 발해의 특산물로 꼽는 이 나라의 대표적인 특산품이다. 주로 등주를 거쳐가는 발해 사신단이 들여오거나 아니면 발해와 당 사이의 접경지에서 거래되던 명마 무역루트를 장악한 이정기는 여지껏 이루어져오던 상거래질서를 그대로 유지시켜 주었다. 혼란과 무질서가 판을 치던 당조의 다른 지역과는 달리 평로치청번진 안에서는 '엄격한 법률집행'이라는 이름의 확실한 치안유지에 힘입어 상거래 질서가 안정적으로 운용되면서 다른 번진에 비해 상업이 번성하고, 발해와의 지속적인 교역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거기다 여러 지역에 대해서 나중에 온 지역이다 처음부터 따랐던 지역이다 차별하는 일도 없이 다 똑같이 공평하게 대해주었댔으니 사람이 안 모이고 배길 수가 없지.
[壬寅, 召渤海使史都蒙等卅人. 入朝時, 都蒙言曰 "都蒙等一百六十餘人, 遠賀皇祚, 航海來朝, 忽被風漂, 致死一百廿. 幸得存活, 纔■六人. 旣是險浪之下, 万死一生, 自非聖朝至德, 何以獨得存生? 况復殊蒙進入, 將拜天闕. 天下幸民, 何處亦有. 然死餘都蒙等■餘人, 心同骨完. 期共苦樂. 今承, 十六人別被處置, 分留海岸, 譬猶割一身而分背. 失四體而匍匐? 仰望. 宸輝曲照, 聽同入朝." 許之.]
임인(20일)에 발해의 사신 사도몽 등 30인을 불렀다. 입조할 때에 도몽이 말하였다. “도몽 등 160여 인은 멀리서 천황(미카도)의 즉위[皇祚]를 축하하러 항해하여 내조하였으나 갑작스레 풍랑을 만나 120명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다행히도 목숨을 건진 것은 겨우 서른여섯 명이었습니다. 이미 이러한 험한 파도 아래서, 만 번 죽고 한 번 사는 곳에서 성조(聖朝)의 지덕(至德)이 아니었던들 어찌 홀로 목숨을 부지하였겠습니까. 하물며 또한번 죽음을 무릅쓰고 나아가서 장차 천궐(天闕)에 배하려 하였습니다. 천하에 요행만 바라는 백성이 어디 있겠습니까. 살아남은 도몽 등 서른 명의 마음은 한 뼈처럼 완전하여 고락을 함께 하기로 맹세하였습니다. 이제와서 열여섯 명을 다른 곳에 안치시켜 따로 해안에 머무르게 하시니 한 몸을 갈라 나누려는 것과 같습니다. 팔다리가 없이 기어갈 수 있습니까. 엎드려 바라옵니다. 은혜로운 빛을 구석까지 비춰주소서. 함께 입조하기를 청합니다.” 이를 허락하였다.
《속일본기(續日本紀, 쇼쿠니혼키)》 권제34, 보귀(寶龜, 호키) 8년(777) 2월
온갖 풍파를 겪고 백 명이 가까운 인원을 잃어가며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 서른여섯 명의 결속력은 형제 이상의 그것처럼 끈끈하고 굳건하게 다져져 있었다. 죽음은 신분을 가리지 않는다는데 저 살아남은 서른여섯 명이 모두 귀척이었을 리도 없고, 풍파가 종족을 가려서 죽이지 않는 이상 고려인과 말갈인이 온통 뒤섞여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여담으로 사도몽은 고려인도 말갈인도 아닌 중국계의 귀화인은 아니었을지. 사史씨라는 성에서 불현듯 사사명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왕명'이었다. 가독부(천자)가 자신들을 이 일본 땅으로 보내 사신으로서 임무를 수행하고 올 것을 명령했고, 신하로서 군주의 명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유가에서도 말한 당연한 충의 도리이며, 사신단의 수장인 자신이 살아남은 사람들과 함께 사신으로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죽은 사람들을 향한 예의라고 사도몽은 믿었을 것이다. 그리고 몇 명만 빼고 나머지는 모두 남으라는 일본 조정의 처우 앞에서, 풍파를 헤치고 살아남은 이상 모두 다 함께 들어가야 한다고 일본 조정을 향해서 소리친다. 그때의 사도몽과 함께 살아남은 다른 발해 사신단에게 서로가 고려인인가 말갈인인가, 관위가 높은가 낮은가는 이미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발해'라는 거대한 나라와 그 나라를 다스리는 '가독부(천자)' 아래 '발해 사람'이라는 의식으로 그들은 이어져 있었다.
[庚寅, 渤海使史都蒙等入京. 辛卯, 太政官遣使慰問史都蒙等.]
경인(9일)에 발해 사신 사도몽 등이 입경하였다. 신묘(10일)에 태정관(타이죠칸)이 사신을 보내어 사도몽 등이 온 이유를 물었다.
《속일본기(續日本紀, 쇼쿠니혼키)》 권제34, 보귀(寶龜, 호키) 8년(777) 4월
사도몽의 소원대로 살아남은 서른여섯 명 모두가 수도로 입성했고, 발해 사신으로서 그들은 이 이국 땅에서 맡은바 사신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절차 수속을 밟았다.
[癸夘, 渤海使史都蒙等貢方物. 奏曰 "渤海國王, 始自遠世供奉不絶. 又國使壹萬福歸來, 承聞聖皇新臨天下, 不勝歡慶, 登時遣獻可大夫司賓少令開國男史都蒙入朝, 并戴荷國信, 拜奉天闕."]
계묘(22일)에 발해사 사도몽 등이 방물을 바치고 아뢰어 말하였다. “발해국왕께서는 원세(遠世)부터 공봉(供奉)하기 시작한 이래 거른 적이 없었습니다. 또한 국사 일만복이 돌아와서 성황(聖皇)께서 새로이 천하에 임하셨다고 한 말을 전해듣고 기쁘고도 경사스러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시고, 곧바로 헌가대부ㆍ사빈소경ㆍ개국남 사도몽을 보내어 입조하고 아울러 하찮은 국신(國信)을 싣고 천궐(天闕)에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속일본기(續日本紀, 쇼쿠니혼키)》 권제34, 보귀(寶龜, 호키) 8년(777) 4월
사도몽은 일단 명문화된 국서는 갖고 있지 않았다. 한 무제의 사신으로 흉노에 갔다가 억류당해 시베리아 바이칼 호까지 유배당했던 소무도 자신이 사신으로 올때 갖고 있었던 부절을 구출되는 순간까지 놓지 않고 있었다고 했지만, 일단 《속일본기》에 기록된 사도몽의 알현장면에서 그는 국서를 바치지 않고 발해국왕의 말을 '구두'로만 전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목숨을 위협하는 파도 앞에서도 그가 차마 버릴수 없었던, 가독부로부터 수여된 임무, 그것은 문왕의 황후가 사망한 것을 고하는 것이었다. 아울러 고닌(홍인) 왜황의 즉위를 축하하는 것도 말이다. (사실 사도몽이 왔을 때는 이미 즉위한지 7년이나 지난 뒤였지만)
[戊申, 天皇臨軒, 授渤海大使獻可大夫司賓少令開國男史都蒙正三位, 大判官高祿思, 少判官高鬱琳並正五位上, 大錄事史遒仙正五位下, 少錄事高珪宣從五位下, 餘皆有差. 賜國王祿, 具載勅書. 史都蒙已下亦各有差.]
무신(27일)에 천황(미카도)이 대(臺)에 나와 앉았다[臨軒]. 발해대사(渤海大使) 헌가대부ㆍ사빈소령ㆍ개국남 사도몽에게 정3위, 대판관(大判官) 고록사(高祿思), 소판관(少判官) 고울림(高鬱琳)에게는 나란히 정5위상를 내리고 대록사(大錄事) 사주선(史遒仙)에게는 정5위하, 소록사(少錄事) 고규선(高珪宣)에게는 종5위하를 내리고 나머지는 모두 차등이 있었다. 국왕에게 녹을 내리고 칙서를 갖추어 내렸다[具載]. 사도몽 이하 역시 각기 차등이 있었다.
《속일본기(續日本紀, 쇼쿠니혼키)》 권제34, 보귀(寶龜, 호키) 8년(777) 4월
사도몽의 작위는 개국남, 봉호는 헌가대부였고, 실직(實職)은 사빈시의 소령(少令)이었다. 사빈시는 원래 홍려시(鴻臚寺)라 해서 사신 접대와 같은 외교 업무를 맡아보던 관청으로 당의 제도를 따른 것이다. '사빈시'라는 이름은 당조 개국 초년에 '홍려시'라고 부르던 것을 측천무후가 여러 관직들의 이름에 대해 개정하면서 바꾼 것으로, 측천무후 실각 이후 원래의 이름대로 '홍려시'로 되돌렸으나 그걸 채택한 동아시아 일부 국가에서는 그 이름을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았다. 발해도 그러했다.
《발해고》나 《발해국지장편》에는 발해의 사빈시에는 장관격인 경(卿)이 있었고(사빈경) 이것은 당의 제도를 따른 것으로 경 바로 아래에 소감(少監)이 두 명 있었으며(사빈소감) 경과 소감의 관직은 각자 종3품과 종4품상. 소령(少令)이란 관직은 일단 《쇼쿠니혼키》에서만 확인되는 관직이다. 《신당서》에는 홍려시(사빈시)에 경ㅡ소경ㅡ승ㅡ주부ㅡ녹사의 관직이 있었고 사빈시로 이름을 고친 광택 원년(684)에는 사(史)가 열 명에 정장(亭長)이 네 명, 장고(掌固) 여섯 명이 있었던 것이 보인다.
사도몽이 정3위, 대판관 고녹사와 소판관 고울림이 정5위상, 대녹사 사주선이 정5위하, 소녹사 고규선이 종5위하. 일본으로부터 수여받은 관위만 놓고 보면 사도몽은 왕신복과 같은 등급으로 대우받았다.(작위도 왕신복과 사도몽이 똑같이 '개국남'이다)
[丁巳, 天皇御重閣門, 觀射騎. 召渤海使史都蒙等, 亦會射場. 令五位已上進裝馬及走馬. 作田舞於舞臺, 蕃客亦奏本國之樂. 事畢賜大使都蒙已下綵帛各有差.]
정사(7일)에 천황(미카도)이 중각문에 행차하여 사기(射騎)를 보았다. 발해의 사신 사도몽 등도 불러 활터에 모였다. 영하여 5위 이상은 나아가 장마(裝馬)와 주마(走馬)를 하도록 하였다. 전무(田舞)를 무대(舞臺)에서 연주하고, 번객들 역시 본국의 음악을 연주하였다. 일이 끝난 뒤 대사 도몽 이하에게 채백을 차등 있게 내렸다.
《속일본기(續日本紀, 쇼쿠니혼키)》 권제34, 보귀(寶龜, 호키) 8년(777) 5월
사도몽 이 사람은 관상에 능한 사람이었다 했다.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實錄, 니혼잔다이지로쿠)》에 보면 교토에 머무르면서 만난 스무 살의 관인 귤청우(橘淸友, 다치바나노 기요토모)의 관상을 봐줬는데, "자손은 번영하겠지만, 정작 본인이 서른두 살에 액이 끼어 있구려. 그것만 넘기면 편안할 것을."이라 말했던 점괘는 딱 들어맞았다. 실제로 청우(기요토모)의 딸 가지자(嘉智子, 카치코)가 52대 차아(嵯峨, 사가) 왜황의 황후가 되었고, 청우(기요토모) 본인은
내사인(內舍人)이 된지 3년만인 연력(엔랴쿠) 8년(789)에 서른두 살로 요절하고 말았으니. (그의 딸 카치코가 낳은 외손자는 제54대 왜황 닌메이仁明로 즉위)
평안(헤이안) 시대의 궁녀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가 지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장편소설'《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의 초반 도입부에는, 주인공 히카루 겐지(光源氏)의 운명을 점쳐주는 '고려인' 관상쟁이가 등장한다. 황족으로서 외국 사람을 직접 만나서는 안 된다는 선황 우다(宇多)의 유명 때문에 궁 안으로 부를 수가 없었던 사정상 몰래 그가 머무르고 있던 처소로 찾아가 관상을 봐달라고 했더니, 한다는 말이 "나라의 어버이가 되시어 제왕이 될 상이 있기는 하오나, 그리되면 세상이 어지러워지고 백성들을 고생시키게 될 지도 모릅니다. 허나 조정의 동량으로서 제왕을 보좌할 상도 아닌 듯 싶습니다."라는 것이었다. 이에 주상은 그를 황족에서 신하의 지위로 내려서(신적강하臣籍降下) '히카루 겐지'라는 이름을 하사하셨다ㅡ고 말이다.
훗날 일본을 막론하고 전 세계의 '플레이보이'라 불리게 되며 숱한 여자들과의 염문을 뿌리고 다닌 그의 운명을 점쳐준 사람이 '고려인', 즉 우리 나라 사람이라는 것도 참 신기한 일이지만, 무라사키 시키부가 태어난 것이 대략 978년경이고 죽은 것이 1016년경, 《겐지모노가타리》가 배경으로 삼고 있는 것은 9세기에서 10세기 사이의 일로 우리나라에 고려라는 이름과 어떻게어떻게 연결된 나라는 발해밖에 없던 시대다. 주인공 히카루 겐지의 모델에 대해 일본 내에서도 여러 설이 있긴 하지만 대체로는 왜황 차아(사가)에게서 분파된 차아원씨(嵯峨源氏, 사가겐지)이자 하원좌대신(河原左大臣, 카와바라노사다이진)이라 불렸던 실존인물 원륭(源融, 미나모토노 토오루. 822~895)를 모델로 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사도몽과는 백년 정도 후대의 인물이긴 하지만 발해라는 나라가 멸망하기 전의 사람이고 보면
본의아니게 사도몽의 관상담이 《겐지모노가타리》에 끼어들어가서 '고려인 관상쟁이'의 모델이 되어준 셈이다.
여담이지만 교고쿠 나츠히코(京極夏彦)의 《항설백물어》에도 그녀와 관련해 '가타비라가쓰지(帷子辻)'라는 에피소드가 등장하는데, 가지자(카치코)의 칭호이기도 한 '단림황후(檀林皇后, 단린 오오키사키)'와도 관련이 있다. 살아 생전에 일족 귤씨(다치바나우지) 집안의 자제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학관원(學館院, 가칸인)을 짓고, 일본 최초의 선원(禪院)인 단림사(檀林寺, 단린지)를 남편이자 왜황인 차아(사가)의 별궁이 있던 차아야(嵯峨野, 사가노)에 지을 정도로 불심이 두터웠던 그녀는 뭐랄까... 너무도 아름다운 얼굴 때문에 수행중인 승려들조차 그녀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흔들릴 정도였고, 그것을 황후 자신은 몹시 슬퍼했다고.(어찌보면 공주병 같긴 하지만) 가양(嘉祥, 가쇼) 3년(850) 5월 4일(양력 6월 17일), 죽기 직전 황후는 자신의 시신을 매장하지 말고 수도 평안경(헤이안쿄)의 서쪽 변두리에 내다버릴 것이며, 그 시신의 살이 썩어 구더기가 끓고 결국 뼈만 남게 되는 과정을 빠짐없이 그려 보이라는 엽기적인 유언을 남겼다. 개나 까마귀가 자신의 시신으로 굶주림을 채우게 해주고, 또 '모든 것은 언젠가는 다 소멸하게 되어 있으며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제행무상'의 가르침을 스스로 실현해보임으로서 사람들에게 그것을 깨우쳐주고자 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이 거리는 '가타비라노츠지'라는 지명으로 교토 북서부에 남아있으며, 그녀의 시신이 썩어가는 과정을 그린 그림은 《단림황후구상도회(檀林皇后九相圖會)》라는 제목으로 전해진다. 사도몽과는 그닥 관련이 없지만 그녀가 한 나라의 황후가 되고 그 아버지 청우(기요토모)의 운명까지도 함께 점쳐주었다는 이야기를 따라가느라 잠시 소개해봤다. (자세한 이야기는 교고쿠 나츠히코의 소설을 한번 직접 읽어보시는 것이....)
[庚申, 先是渤海判官高淑源及少錄事一人, 比着我岸, 船漂溺死. 至是贈淑源正五位上, 少錄事從五位下, 並賻物如令.]
경신(10일)에 처음 발해의 판관 고숙원(高淑源) 및 소록사 한 사람이 우리 해안에 왔을 때에 배가 가라앉아 익사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숙원에게 정5위상을, 소록사에게는 종5위하를 내리고, 아울러 물품을 내려 부조하되 율령과 같게 했다.
《속일본기(續日本紀, 쇼쿠니혼키)》 권제34, 보귀(寶龜, 호키) 8년(777) 5월
처음 사도몽을 따라 발해에서 건너오다가 결국 동해 바다 위에서 불귀(不歸)의 객이 된 판관 고숙원과 소록사에게도 일본 조정으로부터 관직이 추증되었는데, 기록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사도몽의 요청에 의한 것도 있었다고 보인다.(아니면 말고)
[癸酉, 渤海使史都蒙等歸蕃. 以大學少允正六位上高麗朝臣殿繼爲送使. 賜渤海王書曰 "天皇敬問渤海國王. 使史都蒙等。遠渡滄溟。來賀踐祚。顧慙寡徳叨嗣洪基, 若渉大川. 罔知攸濟, 王修朝聘於典故, 慶寳暦於惟新. 懃懇之誠, 實有嘉尚. 但都蒙等比及此岸, 忽遇悪風, 有損人物, 無船駕去. 想彼聞此, 復以傷懷. 言念越郷, 倍加軫悼. 故造舟差使, 送至本郷. 并附絹五十疋, ■五十疋, 絲二百■, 綿三百屯. 又縁都蒙請, 加附黄金小一百兩, 水銀大一百兩, 金漆一缶, 漆一缶, 海石榴油一缶, 水精念珠四貫, 檳榔扇十枝, 至宜領之. 夏景炎熱, 想平安和." 又弔彼國王后喪曰 "禍故無常, 賢室殞逝. 聞以惻怛. 不淑如何. 雖松■未茂, 而居諸稍改, 吉凶有制, 存之而已. 今因還使, 贈絹二十疋, ■二十疋, 綿二百屯, 宜領之."]
계유(23일)에 발해사 사도몽 등이 귀국하였다[歸蕃]. 대학소윤(大學少允) 정6위상 고려조신(高麗朝臣, 고마노아손) 전계(殿繼, 도노츠구)를 송사(送使)로 삼았다. 발해왕에게 글을 내려 말하였다. “천황(미카도)는 삼가 발해국왕에게 묻소이다. 사신 사도몽 등이 멀리서 창명(滄溟)를 건너 와서 즉위[踐祚]를 축하해 주셨소. 돌아보면 덕이 없는[寡徳] 부끄러운 몸으로 대통을 이어받아, 마치 밭은 지식으로 큰 강을 건너는 것만 같았소. 왕은 전례에 따라 조빙을 닦아 스스로를 일신하고 보력(寳暦)을 하례하였소. 그 은근한 정성은 실로 가상할 따름이오. 다만 도몽 등이 이곳 해안에 이르러 갑작스럽게 악풍을 만나 사람과 물건을 잃고 돌아갈 배와 수레도 없었소. 이것을 듣고 생각하니 또 한번 애통하였소. 언념(言念)이 국경을 초월하여 슬퍼함이 더 늘어나는구려. 때문에 배를 만들어 사신을 태워 본향(本鄕)까지 보내오. 아울러 견(絹) 쉰 정, ■ 쉰 정, 실 2백 ■, 綿 3백 둔을 부쳐 보내오. 또한 녹(縁)은 도몽의 청에 따라 더하여 황금 소(小) 백 냥, 수은(水銀) 대(大) 백 냥, 금칠(金漆) 한 관(缶), 칠(漆) 한 관, 동백기름[海石榴油] 한 관, 수정염주(水精念珠) 네 관, 빈랑나무 부채[檳榔扇] 열 매를 부쳐 보내니 마땅히 받아주시오. 여름[夏景]이 점점 더워지는데 별탈이 없으시기를." 또한 그 나라 왕후의 상을 조문하여 말하였다. "화(禍)가 무상(無常)하여 왕후께서 돌아가셨구료. 슬퍼하신다는 말을 들었소. 길하지 못한 일이라 한들 어쩌겠소. 무성하게 뻗어 나가지 못한 솔가지라 해도 쉼없이 흘러만 가는 세월 속에서 조금씩 나아질 것이오. 길흉에는 다 때가 있으니 이것으로 조문하고자 하오. 지금 사신을 돌려보내면서 견 스무 필과 명주[■] 스무 필, 솜[綿] 2백 둔을 내리니 마땅히 받아주시기 바라오.” 《속일본기(續日本紀, 쇼쿠니혼키)》 권제34, 호키(寶龜, 보귀) 8년(777) 5월
가장 최근의 소식인데, 길림성 화룡시의 용두산고분군에서 효의황후(孝懿皇后)의 무덤이 발굴되었다는 기사가 신문에 났었다. 대형 굴식돌방무덤인 M-5와 M-15 두 고분이 그것인데, 이 중 M-5가 바로 효의황후의 무덤이고 M-15호는 제9대 간왕의 황후였던 순목황후(順穆皇后) 태(泰)씨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사도몽이 전했던 '국상' 즉 황후의 사망이란 곧 효의황후의 사망을 가리키는 것이었을까, 천자의 정실 즉 본부인을 '후(后)'라 하고 계실 즉 후궁은 '비(妃)'나 '빈(嬪)'이라고 한다는데, 《속일본기》에서는 '왕비의 상[王妃之喪]'이라고 적었지만 그래도 명색이 천자인데 후궁 하나 죽은 것을 그렇게 사신까지 보내가면서 애도받고 싶어했을까. (그만큼 또 총애했다면 모르겠다만) 아무튼지간에 중국 당국에서 주도했다는 점만 빼면, 그 발굴은 꽤 성과가 많이 보인 발굴이었다.
이 새 날개모양의 관장식은 M-14호 고분에서 나온 것이다. 발해 고분에서는 처음으로 발굴된 것으로, M-13호와 M-14호 고분에서는 이 관장식과 함께 팔찌와 비녀도 나왔다. 새 날개 모양의 금판 세 개를 붙여서 만든 그 모양이나 형태가 옛날 고려에서 쓰던 조우관(鳥羽冠)의 그것과 몹시나 닮아있다.
故 이규태 선생의 말씀에 한 나라가 다른 나라로 계승되는 데에는 실타래처럼 이어지는 문화적 흐름이 수반된다고 하셨다. 발해라는 나라를 이루는데 어느 나라의 문화가 더 많이 일조를 했는가가 결국 발해의 성격을 해석하고 어느 나라의 역사로 해석할 것인가의 여부를 판가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우리는 발해를 고려의 후계로 생각하고, 고려를 우리의 조상이자 고대 국가의 하나로서 우리 역사의 범주로 해석하는데, 그런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고려로부터 이어진 문화의 '영속성'을 찾아내야 한다. 많으면 많을 수록 좋다. 고려 문화의 편린으로 해석할수 있는 것이 중국 문화의 편린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 말갈 문화의 편린으로 해석할수 있는 것보다 더 많다면 우리에게 설득력이 생기고, 거의 압도적인 수준이라면 뭐... 게임 끝나는 거지.
고려 조우관은 곧 '새'와도 관련이 있다. 이여성의 《조선복식고》에서 이른바, 동아시아 고래(古來)의 조류숭배사상에서부터 이 조우관이 비롯되었고, 그것은 고려와 백제ㆍ신라, 그리고 가야와 일본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문화적 유사성이다. 새를 하늘의 사자,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매개인 신령한 동물로 여겼기에 그 새의 날개를 본떠 관모를 장식하고, 새의 깃털을 장례 때 썼다.
고려의 고분벽화인 개마총 벽화에도 무덤주인의 관모에 긴 꽃가지 모양의 관장식이 있고 주위에 선을 둘러서 옥으로 장식했으며, 새의 날개꼴 장식이 뒤로 젖혀진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신라 금관의 날개꼴 장식과도 일치하는 것인데, 천연재료(새의 깃털)를 채취해서 쓰던 단계에서 새의 깃털모양을 모방해 금이나 은으로 날개장식을 직접 만드는 단계에까지 이른 것이다.
고려 멸망 직전의 고려 소식을 전한 《한원》에서도, 고려의 관모에 대해 '금우(金羽)' 또는 '금은으로 사슴귀를 만들었다'고 하는 기록이 보인다. 즉 금ㆍ은으로 새의 깃털과 사슴뿔의 형상을 본떠서 만든 금관 장식은 귀인 전용이었다는 것이 이여성의 설명이다. 그것은 고려뿐 아니라 신라와 백제 그리고 가야, 넓게는 부여에 이르기까지 요하 동쪽의 동이족 모두가 지니고 있었던 문화적 동질성이기도 하다.
용두산고분군에서 나온 저 금관도 개마총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새깃털과 사슴뿔을 본떠 만든 금식(金飾)이고, 고려 멸망 이후에 이어졌던 전통이 발해로 면면히 이어져 발해의 귀인들 역시 고려의 귀인들이 쓰던 금식을 붙인 관모를
착용했었다ㅡ'의복'문화에 있어 고려와 발해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단면이라 할수 있겠다.
12월에 신라와 발해가 사신을 파견하여 와서 조회하고 방물을 바쳤다.
《책부원귀》
신라와 발해의 사신이 당에 간 이듬해인 보력 6년(778) 4월, 월전(에치젠)의 바다에 견일본사 서른 명의 익사한 시체가 떠내려 들어왔다. 사도몽과 함께했던 사신들인 것은 틀림없지만, 발해에서 오던 중에 죽은 141명 가운데 일부인지 아니면 귀국길에 또 풍랑을 만나 서른 명이 죽은 것인지는 알수 없다. 후자의 경우라면 결국 처음 사신단 총 187명(사도몽 본인은 160명이라고 했음) 가운데 무사히 고국 발해로 살아 돌아간 사람들은 16명에 불과했던 셈이다. 하마다 고사쿠는 《속일본기》기록과 사도몽의 증언에서 차이가 나는 21명은 관직이 없는 뱃사공이었을 거라고 주장했는데,
그랬다면 살아남은 사람들끼리 결속을 다지며 수도에 다함께 가야 한다고 외쳤던 사도몽도 결국 봉건시대의 '신분제'라는 벽을 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물론 거대한 파도가 배를 마구 뒤흔드는 그 혼란스럽고 기억하기조차 싫은 끔찍한 순간 속에서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의 숫자를 제대로 기억해내는 것 자체가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일 수도 있겠지만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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