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37635
이 성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서울 경기 역사기행 19> 이성산성(二聖山城) 기행
06.06.11 11:42 l 최종 업데이트 06.06.11 11:43 l 노시경(prolsk)
서울 송파에서 몽촌토성 앞의 강동대로를 따라 고개를 넘어가면 경기도 하남이 나온다.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에는 삼국시대의 산성인 이성산성(二聖山城)이 자리잡고 있다. 굳이 삼국시대의 산성이라고 모호하게 표현한 것은 이 산성을 처음 축조한 국가가 어느 나라인지 아직도 아리송하기 때문이다. 나는 하남의 춘궁동 동사지(桐寺址)에서 따스한 햇살을 받고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을 바라보다가 길을 건너 이성산성에 올랐다.
이성산의 정상은 해발 209.8m이니, 적당한 등산을 위해서도 아주 좋은 산이다. 평일이라 그런지 산에는 사람의 인적도 드물다. 하남시에서는 이 산성의 역사적 중요성을 파악하고 산성의 발굴 조사 후에 산성의 성벽과 건물터의 주춧돌들을 잘 보존하고 있다. 이 이성산성은 삼국시대 백제, 고구려, 신라의 흔적이 모두 남아있는 흔치 않은 산성이다.
▲ 이성산성 성벽 ⓒ 노시경
산의 중간 정도 높이에 오르자 하남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이성산성의 저수지 아래쪽에 옥수수 알 같은 석재로 쌓인 성벽이 눈앞에 다가왔다. 천오백 년을 견디는 건축자재는 역시 돌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이성산에는 화강암 암석이 없으니 성벽을 이루는 저 화강암은 다른 곳에서 모두 다듬어서 가져왔을 것이다.
이 이성산성은 조선시대 초기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몽촌토성, 하남시 춘궁동 일대와 함께 한성(漢城) 백제의 도읍으로 추정되어 왔던 곳이다. 이성산성이 자리한 하남에도 이 성이 백제의 고성으로 전해져 왔으며, 성 이름인 이성산(二聖山)도 백제를 건국한 온조(溫祚)와 소서노(召西奴)를 기리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1997년 풍납토성 발굴 이후 풍납토성이 백제의 위례성으로 밝혀지자, 이 이성산성은 백제, 고구려, 신라 삼국이 순차적으로 점령했던 삼국시대의 중요한 산성으로 자리 매김 하게 된다.
이성산성 성벽은 저수지 아래쪽에서만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사라진다. 이 넓은 성터에 성벽이 저 정도만 남지는 않았으리라. 성벽을 따라 산의 능선을 따라 올라가 보았다. 성벽은 오랜 세월에 깎여 그 모습을 감추고 있기도 하고, 흙 사이로 석재를 삐쭉 내밀기도 하였으며, 석재가 우르르 무너져 내린 곳도 있다. 이성산성 성벽은 주로 이성산의 경사면에 의지하여 들여쌓기로 쌓았고, 이성산의 정상에서 능선을 감싸 안듯이 쌓여 있다. 성벽의 안쪽은 낮고 바깥쪽은 높게 지어져 있으며, 성벽 안쪽에는 성벽을 따라 돌 수 있게 만든 길인 회곽도(廻郭道)가 아직도 자취를 남기고 있다. 성벽의 높이는 4∼5m 정도 되어 보인다.
▲ 이성산성 암반과 성벽 ⓒ 노시경
나의 답사가 헛되지 않게 옥수수 알 같은 성벽이 드문드문 나의 눈앞에 다시 나타났다. 산의 거대한 암벽이 나타나는 곳에는 그 암벽도 성벽을 삼고, 그 위에 성돌을 쌓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기계로 갈지 않고 직접 손으로 쪼아 만든 탐스런 성돌에 세월의 이끼가 잔뜩 끼여 있다.
이성산성 발굴조사 결과, 이성산성 성벽은 3차례에 걸쳐 쌓여졌음이 확인되었다. 이 이성산성은 백제가 처음 쌓은 산성으로 보인다. 이성산성의 3차에 걸친 성벽 중 높이 2m가 조금 넘는 최초 성벽의 시원은 <삼국사기>에 자주 언급되는 백제의 토루(土壘)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성산성 발굴조사에서 3점의 연질토기(軟質土器: 무른 토기) 주발(周鉢: 아래보다 위가 벌어진 밥그릇) 등 수십 점의 백제시대 유물이 발굴되었다. 이 이성산성에서 백제인들은 토기에 음식을 담고 주발에 밥을 담아서 먹었던 것이다. 8개의 연판이 있는 연꽃 무늬 와당, 다리 달린 벼루 조각과 암반층을 파고 만든 복주머니형의 저장구덩이 3개도 백제인들의 흔적으로 추정된다. 이는 이 성이 고구려에 점령되기 이전에 백제인들이 생활하던 곳이었음을 알려준다.
이성산성의 두 번째 성벽은 돌을 쌓은 양식과 기단 구성으로 볼 때 전형적인 고구려 양식이다. 돌로 산성을 쌓는데 귀재였던 고구려인들은 백제인들이 흙으로 쌓았던 토루 위에 고구려의 돌을 올렸을 것이다. 고구려는 이성산성의 2차 성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기단석을 깔고 그 위에 쐐기형 성돌을 쌓았다. 이성산성의 성벽은 전체적으로 고구려의 영향이 가장 강하게 남은 고구려 성벽이다. 이 이성산성 성벽의 축성을 볼 때 고구려가 이성산성을 쌓은 실질적 주인공이다.
475년에 백제의 한성인 풍납토성을 함락시킨 고구려군은 인근 몽촌토성과 이 이성산성에 주둔했던 것이다. 고구려는 장수왕이 개척한 한강 유역의 가장 중요한 거점으로서 이 이성산을 지목하고 새로운 산성을 쌓아 이 지역을 통치했던 것이다. 이 이성산성은 고구려가 475년부터 551년에 백제 신라 연합군에게 다시 한강유역의 지배권을 뺏길 때까지 죽령 북쪽을 지배했던 고구려의 힘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점점 희미해져 가는 석축(石築)의 자취를 따라 산의 정상으로 향했다. 아쉽게도 성벽은 육안으로는 확인되지 않을 정도로 그 모습이 희미해져 간다. 그리고 능선의 한 지점에 이르자 내가 찾던 천 5백년 전의 성벽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인적 없는 산 속에서는 이방인의 침입을 경계하는 까치 소리만 들리고, 발 아래에는 겨우내 썩지 않고 남은 낙엽들이 쌓여 있다.
성벽에서 10분 정도 쉬엄쉬엄 산을 오르니 바로 이성산의 정상이다. 산성의 주인이 백제, 고구려, 신라로 바뀔 정도로 중요한 산성인 만큼 산에서 바라보는 전망은 거칠 것이 없다. 산 정상에서 보면 이 산성의 전략적 중요성은 팔당, 미사리, 강동구 등 한강 유역을 살피는 것임을 알게 된다. 한강은 백제와 신라의 입장에서 보면 고구려의 남침을 막고, 이성산성의 병력 이동을 원활하게 했을 것이다. 북쪽으로는 하남시와 한강이 이어지고, 산성의 남쪽으로는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이 버티고 서 있으며, 주변에는 이성산성에 식량을 공급하던 광활한 평야가 이어지고 있다. 정상에서 한눈에 보이는 이성산성의 성벽 둘레는 1925m이며, 성 내부 면적은 약 4만7천 평에 달한다고 한다.
이성산성 정상 아래, 건물터가 있던 자리로 발걸음을 옮겨 보았다. 발굴단이 발굴하던 성벽이 보호막으로 덮여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성산성의 성문이 있던 자리이다. 나는 머리 속으로 그 빈터에 성문과 목재로 만들어진 문루가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무너진 성벽이 언뜻언뜻 보호막 속에서 모습을 보인다. 신라인들은 고구려인들이 쌓은 2차 성벽이 무너진 뒤에 약 4m 밖에서 다시 화강암으로 이성산성 3차 성벽을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 이성산성 제사유적 ⓒ 노시경
산성 정상 바로 아래쪽에는 고대인들이 제사를 지냈을 것으로 추정되는 유적의 주춧돌이 남아 있다. 남아 있는 주춧돌의 배치와 숫자를 보면 주춧돌 위에 세워졌을 건물은 8각, 9각의 건물이다. 이 9각, 8각 건물지는 동쪽과 서쪽에 배치되어 있는데, 그 사이에 긴 직사각형 모양의 건물지가 있다. 직사각형 건물지는 지방관이 살던 건물이나 병영이었을 것이고, 동쪽의 9각 건물은 하늘에 제사지내는 천단(天壇)이었을 것이며, 서쪽의 8각 건물은 땅의 신을 섬기는 사직단(社稷壇)이었을 것이다.
이 제사유적 주변에서는 사람들이 일부러 목을 부러뜨려놓은 말인형들이 발견되었다. 이 말들은 토제마, 철제마 17개이다. 백제의 위례성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 안의 제사유적지에서는 왕이 제사를 지내던 말의 머리가 베어진 채로 발견된 반면, 이 곳에서는 제사의 희생용으로 이러한 말인형들이 사용되었다. 이 제사유적이 백제의 왕들이 제사지내던 곳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성산성에서 발굴된 제기(祭器)들이 대부분 신라시대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성산성에서 발굴된 경질 장경호(長頸壺: 목이 그릇 높이의 5분의 1 이상으로 길게 붙어있는 항아리), 단경호(短頸壺: 목부분이 짧은 항아리), 굽다리 접시는 신라의 대표적인 토기로서 제기로 사용된 것들이다. 그러나 말의 목을 베어서 제사를 지내는 백제의 전통은 후대에까지 면면히 이어져 온 것으로 보인다.
▲ 이성산성 저수지 ⓒ 노시경
건물터 옆에는 깨진 삼국시대의 기와 편들이 소망탑을 쌓듯이 산 능선의 한 쪽에 쌓여 있다. 이성산성 정상에서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저수지가 보인다. 산 정상부임을 고려하면 저수지는 엄청나게 큰 규모이다. 이성산은 산의 높이에 비해 물이 풍부하고, 일년 내내 마르지 않는 조그마한 2개의 개울이 흐르고 있다. 저수지의 위쪽에 보면 아직도 우물에서 물이 솟아 나오고 있으니, 물을 모아 저장하는 저수지를 만들기가 아주 용이했을 것이다. 그래서 삼국시대 사람들은 이곳의 자연적인 조그만 연못에 돌을 쌓고 넓혀서 인공 저수지를 만든 것이다. 그리고 이 저수지는 삼국시대의 군사들이 산성을 방어할 때에 꼭 필요한 필수요인이 되었다.
2000년 7월, 이 저수지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욕살(褥薩)이라는 고구려 지방관 벼슬이름이 적힌 고구려 목간(木簡: 글자를 새긴 나무)이 최초로 발굴되었다.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욕살(褥薩)'은 신라가 이 이성산성을 점령하기 이전에 고구려가 이 성의 주인이었으며, 이 고구려 최고 지방관이 이곳에서 살았음을 알려준다. 이 욕살은 고구려의 지방통치조직인 대성(大城)에 파견된 지방관리이자 성주였으니, 이성산성이 고구려 당시에는 대성으로 대접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성산성에서는 고구려인들의 생활상을 추적해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유물이 발굴되었다. `욕살'명 목간이 나온 저수지 퇴적층에서 일부 파손된 자(尺)가 발굴되었는데, 고구려 자로 추정되었다. 고구려인들은 이 자로 목재의 길이를 측정하여 이성산에 건물을 세워 올렸을 것이다. 또한 이 저수지에서는 장고처럼 허리가 잘록한 요고가 나왔는데, 이 작은 요고는 오른쪽은 손바닥으로 치고, 왼쪽은 채로 치는 일종의 장고이다. 물론 이 요고는 고구려 욕살의 여흥을 돋우는데 사용되었을 것이다. '우물 정(井)'자가 새겨진 고구려식 연질 토기도 이 이성산성에서 발굴되었다. 고대에 신성시되던 물과 물의 신을 기리기 위해 고구려인들은 토기에 우물 문양을 표시한 것일까? 이 저수지에서 발굴된 한 목간의 제 4면에서는 `전부고(前部高)'라는 일부 글자도 판독되었다. 이는 이곳이 고구려 지방행정조직 중 하나였던 전부(前部)였고, 왕족인 고(高)씨가 이 성을 다스렸다는 뜻이 아닐까?
▲ 이성산성 배수구 유적 ⓒ 노시경
저수지 사면을 돌아가면서 살펴보는데 성벽 위쪽, 저수지 아래쪽에 완벽한 원형의 저수지 배수구가 보인다. 이는 전형적인 신라의 건축양식이다. 배수구 바닥에는 판석을 잘 다듬어 계단 같이 비스듬히 쌓았고, 이 배수구를 통과한 저수지의 물은 성 바깥으로 떨어지도록 만들어져 있다. 신라는 잠시 이 산성을 차지한 백제를 공격하여 산성을 빼앗고 고구려의 성벽 바깥에 다시 성벽을 쌓은 것이다.
553년경 신라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확보한 후, 신라는 이 지역에 대규모 행정군사 통치지구인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이 신주의 주성으로 이성산성을 더욱 보강해 쌓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 이성산성에서 발굴되는 유물은 통일 이전의 신라 것이 가장 많다. 이 곳 저수지에서 발굴된 목간 중에는 무진년(戊辰年)이라는 간지(干支)가 적힌 목간이 있다. 무진년은 603년으로 추정되기에, 이성산성을 진평왕대의 신라가 사용했다는 결정적인 물증이 되었다.
또한 이 저수지에서 발굴된 목간에서는 도사(道使)·촌주(村主) 등 신라의 관직명이 6∼7세기 초 필법의 묵서(墨書: 붓글씨)로 적혀 있었다. 도사는 6세기∼7세기의 신라 관직이며, 촌은 신라의 가장 말단 행정조직 이름이다. 신라의 도사와 촌주는 이 곳에서 발굴된 철도끼와 철화살촉을 가지고 고구려군을 경계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성산성은 고구려의 성으로 사용되다가 다시 고구려의 남진을 막는 거대한 성으로 그 역할이 바뀌었던 것이다.
이성산성은 이 때부터 8세기까지 사용되다가 신라의 힘이 쇠약해지는 9세기 중엽에 버려진 것으로 보인다. 9세기 말 이후의 유물이 발굴되지 않기 때문이다.
삼국시대 삼국의 유물이 모두 발견되는 이성산성. 이성산성 저수지는 전체의 5분의1 정도만 발굴되었고, 이 넓은 이성산성 중 발굴된 면적은 아직 10% 밖에 되지 않는다. 이 산성 어디에선가 또 다시 우리나라 삼국의 역사를 가늠 짓게 할 결정적인 유물이 나타나지 않을까?
서울특별시 바깥쪽에 백제인, 고구려인, 신라인들의 흔적이 모두 남은 산성이 자랑스럽게 남아 있다. 백제인들은 이 산성에서 연꽃무늬 와당을 올린 기와집에서 벼루를 사용하고 목간에 글을 남기며, 주발을 이용해 밥을 먹고 생활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간의 세월이 흘렀다. 한강 유역에 진출한 고구려인들이 이 이성산에 돌로 강건한 성벽을 쌓고 그들의 최고 지방 통치자인 욕살을 파견하여 이 지방을 통치하였다. 그리고 또 한참의 세월이 흘렀다. 이 번에는 백제와 고구려를 밀어낸 신라가 이 곳에 성을 다시 쌓고 약 3백년의 세월을 지킨다. 그리고 또 천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대학에서 파견된 발굴단원들이 이 곳의 유적과 유물을 살핀다. 나는 천년이 지나 우리 앞에 나타난 삼국시대인들의 역사적 향기에 취해 본다.
덧붙이는 글 | 네이버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do에도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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