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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글 : 발해의 외교와 문화에 대한 고찰 - 원광대  http://tadream.tistory.com/7738
* 발해의 외교와 문화에 대한 고찰 - 엄윤희"에서 "2. 발해의 외교" 중 "3) 일본과의 외교"만 가져왔습니다.


발해의 외교 : 3) 일본과의 외교

발해는 일본을 34차례 방문하였고 일본 또한 발해를 13차례 방문했다. 이러한 횟수는 같은 시기 신라와 발해 간에 이루어진 교류는 말할 것도 없고, 신라와 일본 간의 교류와 비교해 보더라도 훨씬 앞서는 것이다. 여기에 동해의 풍랑을 가로지르며 조난과 표류가 거듭되는 위험한 항해 여건과 229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발해의 존속 기간을 감안해 본다면 47회에 달하는 교류는 양국 간의 관계가 긴밀하였음을 보여준다고 해도 과업이 아니다. 하지만 이같이 긴밀한 교류가 이루어지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 하는 데는 다양한 이견들이 존재하고 있다.

우선 일본에서는 대륙 침략기부터 발해사 연구를 전략적으로 중시해 왔던 연구 풍토가 이어져 ‘발해=일본의 조공국’으로 보려는 경향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반면 한국학계는 1980년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양국 교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일본에 의해 형성된 양국 교류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가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남아 있는 대부분의 사료가 일본 사료이므로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가 후속 연구의 방향을 잡는 데 중요한 부분이라 하겠다.27)

698년 진국(辰國)으로부터 출발한 발해는 727년 발해 무왕 때 처음으로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였으며 이후 양국은 지속적으로 교류 관계를 유지해 왔다. 이 시기 발해가 일본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당과 신라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바로 전해에 일어난 흑수말갈의 대당 조공, 무왕의 동생인 대무예의 망영 등에서 비롯된 발해와 당과의 관계 악화를 극복하고, 신라와 당과의 연합에 의한 고립을 견제하며, 동시에 신라도 견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본다.

양국 학계 모두 초기 교류를 정치적 목적으로 보고 있지만 그 내면을 보면 서로 다른 관점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오래전부터 발해의 국제적 고립에 따른 대일본 외교 의존이라는 시각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러한 시각은 줄곧 대일본 외교상에 나타난 발해의 저자세적 대응을 강조해왔다. 이는 이른바 일본 고대의 책봉 체제론이나 소중화 의식을 전제로 하거나 암암리에 뒷받침하고 있다. 발해사 연구가 만주 진출이라는 군사 · 정치적 목적에서 비롯된 것임을 감안한다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한편 한국 학계에서는 국제 감각을 바탕으로 한 발해의 적극적 외교 추진을 초점에 두고 양국의 교류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어쨌든 지금까지의 연구는 초기 교류에 있어 정치 · 군사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다. 혹자에 따라서는 발해가 일본과 군사 동맹을 체결하고자 교류를 시도했다는 설도 제기하기도 해다. 실제 초기 교류를 면밀히 들여다보면 정치적 문제만이 아니라 다양한 외교 단상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사절이었던 고재덕 일행은 담비 가죽을 비롯한 교역 물품을 가져갔는데 이에 대해 일본은 비단, 거친명주, 명주실, 면 등을 답례품으로 전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건데 발해가 가져간 모피가 일본 사회에 미친 영향은 꽤 컸을 것이다.28) 다음번 사신으로 방문한 이진몽 일행은 더욱 더 다양한 산물을 갖고 가게 된다. 이로 보아 단순히 정치적 입장에서만 일본과의 교류를 시도한 것으로 보는 것은 단견이 될 수도 있다.

또한 초기 교류가 결코 발해만의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도 짚어 두어야 할 것이다. 발해는 고인의를 필두로 하는 24인의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이에 비해 이들을 환송하는 송발해사 사절단은 히키타무시마로를 필두로 한 62인의 사절단으로 구성된다. 견당사 파견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못했던 일본으로서는 발해를 통한 대륙과의 연계를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발해의 사신 이진몽은 739년 7월에 일본에 도착하였음에도 불고하고 740년까지 머물러 있다가 설날 조하의식29)에 참가하여 환대를 받는다. 일본 조정으로서는 조하의식에 멀리서 온 외국 사신을 참가시킴으로써 대외적 정당성을 과시하는 좋은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이상과 같이 초기 교류는 지금까지 제기되어 온 바와 같이 정치적 외교로만 일관된 것이 아니라, 경제 및 문화 교류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발해의 필요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일본의 필요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시작된 양국의 교류는 752년 모시몽의 파견으로 다시 이어진다. 하지만 모시몽은 국서를 지참하지 않았고 이데 대해 일본 조정은 예이 어긋나는 일이라 질책하여 양국 관계에 처음으로 갈등이 야기된다. 하지만 758년 일본의 오노타모리의 파견으로 다시 양국의 교류는 이어지는데 이처럼 양국의 교류가 연이어 이어지는 것은 당시 일본이 추진하고 있던 이른바 ‘신라 침공 계획’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신라 침공 계획’이란 『속일본기』에 나오는 군사적 움직임을 두고 하는 말로, 일본이 발해와 연합하여 신라를 침공하고자 했던 일련의 사건을 말한다. 『속일본기』에는 이 시기 신라와 관계된 군사 조치 기사들이 등장하고 있다. 일본 학계는 이 두 종류의 기록을 연결 지어 일본과 발해가 군사 동맹을 맺고 신라를 침공하고자 했으며, 이는 당과 신라에 대해 대립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발해가 이러한 국제 관계의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도모한 사건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신라 침공 계획은 실행에 옮겨지지 못한 채 무산되고 말았다. 무산된 이유를 발해의 태도 변화로 보는 입장도 있고 후지와라나카마로의 실각으로 보는 입장도 있다. 더불어 당초부터 실행 가능성이나 의지가 없었던 정치적 사건에 불과하였다고 평가하는 경우고 있다.

한때 우리 학계에서도 이러한 일본의 주장을 비판하는 입장에서 오히려 발해가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주도하기 위해 신라 침공을 면밀히 계획하고 일본의 협조 세력으로 포섭하고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계획에 대해 발해가 적극적일 만큼 당 또는 신라와의 관계라 극단적으로 악화된 것은 아니라는 쪽으로 모아지면서 신라 침공 계획이 필요 이상으로 과잉 해석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30)

특히 당시 양국 교류의 양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당시 발해 사신의 방문은 모두 일본의 초빙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다시 발해사의 귀국 길에는 일본사가 동행하였다. 즉, 이 시기의 발해사의 일본 내왕이 일본 조정의 편의 제공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양국 교류를 긴밀하게 추진해야만 하는 일본 내부의 절실한 필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집권자 후지와라나카마로의 집권 위기 타개였으며, 이를 위해 발해 사절을 초빙하고 신라 침공 계획이라는 정치적 퍼포먼스를 구상하였던 것이라 하겠다.31) 다만 신라 침공 계획에 대한 일본 조정의 실현 의지가 어느 정도였는가 하는 것을 정확히 밝히기에는 사료적 한계가 있다.

한편 발해는 이렇게 접근해 온 일본을 외교적 동반자로 삼기 위해 다양한 정보를 일본에 제공해 주었다. 이 시기 발해는 안사의 난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일본에 전한다. 발해가 전한 정보는 두 가지로, 반란 세력이 매우 강성하다는 것 그리고 반란 세력이 자신들에게까지 지원을 요청해 왔으나 슬기롭게 잘 대처했다고 하는 것이다. 말하자만 대륙 정세에 대한 위기의식과 자신들의 우수한 상황 대처 능력을 동시에 전함으로써 일본으로 하여금 더욱 발해에 밀착하도록 유인하고 있었다. 32)

양국의 교류 가운데 발해를 ‘고려’라 칭한 사례가 이 시기에 집중되어 있다. 현존하는 20통의 국서 중 발해 국왕을 고려국왕이라 칭한 것은 2회가 있는데 모두 이 시기이다. 뿐만 아니라 발해 사신의 행적을 기록함에 있어 ‘고려사신’이라고 기록한 것도 778년 사례와 함께 모두 이 시기이다.33) 이는 발해가 자신이 고구려 옛 강역을 회복한 후계자임을 분명히 하고 대외적 자주성과 국력의 자신감을 일본에 표방한 것이며, 일본은 이러한 발해의 의도를 십분 이해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렇게 형성된 양국 교류의 기반 위에 발해는 안정적인 외교 전략을 펼쳐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전 시기 양국 교류는 발해가 우위적 입장에 서서 일본에 제공하는 외교적 편의를 십분 활용하고 있었다. 이는 자신이 준비하고 있던 이른바 신라 침공 계획에 발해의 도움을 청함과 동시에 대륙의 문물과 정세 정보를 입수하려는 일본의 절박한 상황, 그리고 이를 잘 알고 있었던 발해의 적극적인 외교 전략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한마디로 일본의 현실적 필요와 발해의 외교 전락이 맞아떨어지고 있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런 관계와 달리 8세기 후반에 이르면 종종 대립 국면이 나타나게 되는데 일본 학계는 이러한 몇몇 현상을 두고 일본을 방문해 오는 발해에 대해 일본이 주도적 위치에서 외교적 요구를 내렸고 발해는 이에 순응해 왔다고 이해하였다. 이 같은 해석은 1930년대의 대륙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만주에서 일본의 선점적 권리를 역사적으로 입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에 와서도 이러한 논리는 일본이 한국에 대한 우위를 주장하는 담론의 한 부분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양국의 교류는 정치 · 경제적 이익과 욕구 충족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 교류를 통해 상호 교감과 우호를 증진시키고 문화의 폭을 확대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양국의 문화가 교류되는 중요한 계기는 발해 사절의 방문 시 개최되는 연회 등 공식 의전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우선 발해 사신이 일본을 방문했을 경우 으레 연회가 개최되고 음악과 향연이 이루어졌다. 연회는 대개 음악 연주로 시작되었는데 발해 사신단에 악사들이 포함되어 파견될 경우는 직접 발해 음악을 선보이기도 했다.

740년 이진몽의 경우 직접 발해악을 연주하여 일본인들의 관심을 받았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일본의 우치오가 발해로 와 발해 음악을 배우기도 하였다. 본국에 돌아 온 이후 우치오의 활약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지만 후에 발해 음악은 일본 궁정의 우방악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게 된다. 1171년 편집된 쟁(箏) 악보집인 『인지요록(仁智要錄)』고려악편에 3수의 발해악이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대에 입수된 발해 음악이 일본 내 궁정악으로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연회에선 여악이라 불리는 여성 무용단의 공연도 빼놓을 수 없다. 759년 양승경의 위국에는 일본 무희 11인이 동행하였고(이들 무희들은 후에 당으로 보내진다.), 883년 배정의 파견때 이루어진 연회에서는 148명의 여악이 출현한 성대한 연회가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일본은 연회에 매우 많은 관심과 정성을 쏟았던 것 같다.34)

그러나 문화 교류의 백미는 양국 문인들 간의 한시 교류라 할 수 있다. 발해 사신단 가운데는 양태사, 왕효렴, 배정, 배구와 같은 당대 문호들이 포함되었다. 일본 측에서도 당대 최고 문사라 할 수 있는 스가와라미치자네, 오에오나사쓰네, 시마다타다오미 등이 참여했다. 이들에 의해 교환된 시문은 일본 내 문집 속에 많이 남아 있어 발해 문학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그 밖에도 일본에 큰 영향을 미친 발해 교류의 문화 산물은 바로 선명력(宣明曆)이다. 선명력이랑 대음태양력(大陰太陽曆)으로서 1년을 356.2446일로 계산한 역법의 하나였는데 859년 발해 대사 오효신에 의해 일본으로 전해졌다. 발해가 이를 수입한 것은 822년 당으로부터였으며 이후 발해에서는 71년간 사용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발해를 통해 수입한 선명력을 1684년 정향력(貞享曆)이 채용되기 전까지 사용하였으니 무려 823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사용한 셈이다.35)

이처럼 발해와 일본은 정치 · 경제 · 학문 · 예술 등 다방면을 통해 교류를 전개하면서 동아시아 문화의 새로운 확대와 발전을 이루었다. 때때로 마찰도 야기되었지만 양국의 교류는 상호의 필요에 의해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데는 상대를 자극하지 않으면서 자신에게 유리한 외교 정세를 이끌어 나가는 발해의 용의주도한 판단과 외교 대처 능력이 중요한 동인이 되었으며 대륙과의 직접적 교류가 어려웠던 일본의 당대 현실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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