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원복집’의 기억과 국정원 ‘대선 개입’
[정석구 칼럼]
등록 : 2013.08.05 19:02수정 : 2013.08.06 11:47
‘초원 복집 도청 사건’은 오히려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유리한 계기가 됐다. 1992년 당시 초원복집에서 진행된 현장검증
- 김기춘 전 법무장관: 지금 부산은 잘 돌아갑니까?
- 정경식 부산지검장: 검찰총장이 어제 그제 좌담회에 와가지고… 득표에 아주 도움이 됐습니다.
- 김 전 장관: (선거운동을) 노골적으로 해도 괜찮지 뭐. 우리 검찰에서도 양해할 거야. 아마 경찰청장도 양해….
- 박일룡 부산경찰청장: 양해라뇨. 제가 더 떠듭니다.
- 김 전 장관: 지역감정이 유치한지 몰라도 고향 발전에는 긍정적… 하여튼 민간에서 지역감정을 좀 불러일으켜야 돼.
- 이규삼 안기부 부산지부장: 언론계통에는 제가 제일 강하게 얘기하는데… 그런데 요즘은 그 밑에 기자 애들 때문에….
14대 대통령 선거를 불과 일주일 앞둔 1992년 12월11일 아침, 부산 대연동의 초원복국 지하층 별실에서 있었던 김영삼 민자당 후보 지원모임에서 오간 대화 중 일부다. 이날 모임에는 김 전 장관을 비롯해 김영환 부산시장, 정 지검장, 박 청장, 이 지부장, 김대균 부산기무부대장, 우명수 부산교육감, 박남수 부산상공회의소 회장 등이 참석했다. 그들은 ‘우리가 남이가’를 외쳤다. 이날 모임을 주선한 김 전 장관이 5일 박근혜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전격 발탁됐다.
시기도 공교롭다. 현 시국은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 사건이 최대 정치현안으로 떠올라 있는 상황이다. 국정원 대선 개입의 진상 규명과 남재준 국정원장 사퇴, 국정원 전면 개혁 등을 요구하는 촛불집회가 갈수록 확산되고 있고, 야당도 거리로 나섰다. 김한길 민주당 대표는 박근혜 대통령과 담판을 짓자며 영수회담을 촉구하고 있다. 민주사회에선 있을 수 없는 국가기관의 선거 개입을 온 국민이 규탄하고 있는 국면이다. 그런데 하필 이럴 때 박 대통령은 총체적 관권선거의 주역이었던 김 전 장관을 사실상 권력서열 2위라는 비서실장에 중용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그를 비서실장으로 임명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혹시 국정원의 대선 개입, 그거 별거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을까.
14대 대선 당시로 돌아가 보자. ‘초원복집 사건’이 터지자 김영삼 후보 쪽에는 비상이 걸렸다. 빼도 박도 못할 관권선거에다 망국적인 지역감정까지 조장했으니 역풍이 불 게 뻔했다.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 3자 구도로 치러졌던 대선에서 패배할 수도 있는 위기상황이었다. 어김없이 보수언론이 원군으로 등장했다. 선거 당일인 12월18일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해 “이번 도청사건은 목적과 관계없이 부도덕한 것이며 앞으로 우리 사회의 관행과 시민생활에 적지 않은 부작용을 파급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초원복집 사건을 관권선거와 지역감정 조장이라는 본질은 감춘 채 주거침입에 의한 ‘도청사건’으로 둔갑시켜 버린 것이다. 김영삼 후보도 ‘나는 이번 사건의 최대 피해자’라며 ‘공명선거를 이루겠다는 나의 소박한 꿈에 너무나도 큰 상처를 주었다’고 탄식했다.
뭔가 비슷한 상황이 떠오르지 않는가. 정확히 20년 만인 2012년 12월11일, 국정원의 댓글 의혹 사건이 불거졌다. 그러나 새누리당은 이를 ‘국정원 여직원 감금사건’으로 둔갑시켰다. 박근혜 후보도 ‘여성 인권 침해’ 운운하며 자신을 흠집 내고 선거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민주당의 터무니없는 모략이라고 몰아붙였다. 텔레비전 토론회에서는 댓글을 달았다는 증거가 있으면 내놓으라고 야당 후보를 다그쳤다. 결국 대선 과정에서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수도 있었던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을 멋지게 되치기하면서 여유있게 대통령에 당선됐다.
다시 14대 대선 당시로 가보자. 김영삼 후보는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연 기자회견에서 “(초원복집) 도청을 반드시 밝혀내겠다. 그리고 법의 엄중한 처벌을 받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된 김 전 법무장관은 무죄를 받았고, 공모한 관련자들은 오히려 영전했다. 관권선거를 고발한 국민당 관계자들은 ‘주거침입죄’로 처벌을 받았다.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도 초원복집 사건과 비슷한 길을 가고 있는 듯하다. 20년이 흘렀지만 나아진 게 없다. 국가적 불행이다. 누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이렇게 퇴행시키고 있는가. 이제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답할 때다.
정석구 논설위원실장 twin8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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