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은 고소장 내느라 바쁘다
국가정보원의 명예는 누가 떨어뜨리고 있을까. 국정원의 정치 개입 논란이 한창인 가운데, 국정원은 국민 개인을 상대로 명예훼손 따위 고소를 남발하고 있다. 툭하면 소송을 걸어 비판 여론을 차단한다는 지적이다.
김은지 기자 | smile@sisain.co.kr [307호] 승인 2013.08.07 09:03:53
서울 서초구 서초우체국 사서함 200호. 단출한 주소에 건물명이나 층수 같은 더 이상의 정보는 없다. 국가 안보를 책임진 기관의 주소인 까닭이다. 지난 7월5일 민주당 진선미 의원 앞으로 날아온 고소장의 고소인 난에 쓰인 주소이기도 하다. ‘국정원 여직원’ 김 아무개씨(29)가 민주당 진선미 의원을 허위 사실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1억원 손해배상 청구 소송도 냈다. 진 의원이 같은 달 1일 한 라디오 방송에서 내놓은 발언을 문제 삼았다. “(국정원 여직원이) 그 당시 오빠라는 사람을 불렀는데 알고 보니 국정원 직원이었다”라는 진 의원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이다. 국정원 여직원은 자신이 달았던 댓글을 보도했던 <한겨레> 기자와 인터넷 커뮤니티 ‘오늘의 유머’ 운영자도 고소했다.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등의 혐의였다. 또 민주당 관계자를 주거침입 및 감금 혐의로 고소했다.
국정원의 고소 남발에 비난이 쏟아진다.
전략적 봉쇄 소송
국정원 직원 김씨뿐 아니라 국정원 감찰실장도 고소에 나섰다. 지난해 12월16일 인터넷 팟캐스트 <나는 꼼수다>(나꼼수)가 선거법 위반으로 윤 아무개 목사의 발언을 녹음한 파일을 공개한 바 있다(윤 목사는 지난 4월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녹음에는 “나를 지원하는 분이 국정원과 연결되어 있어”라는 윤 목사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다음 날 당장 국정원은 나꼼수 멤버를 고소했다. 국정원이 대선에 개입한 것처럼 허위 사실을 적시해 명예를 훼손했다는 주장이었다.
지난 1월18일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도 명예훼손 혐의로 국정원 감찰실장으로부터 고소당했다. 표 전 교수가 한 일간지에 기고한 칼럼에서 “(국정원이 위기를 맞은 것은) 정치 관료가 정보와 예산, 인력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거나 국제 첩보 세계에서 조롱거리가 될 정도로 무능화·무력화돼 있기 때문이다”라고 쓴 부분을 걸고넘어졌다. 국정원과 직원의 명예가 훼손되었다는 것이다. 서영석 전 서프라이즈 대표도 트위터에 쓴 글 때문에 국정원으로부터 허위 사실로 인한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했다.
국정원의 고소 남발을 두고 ‘전략적 봉쇄 소송(SLAPP:Strategic Lawsuit Against Public Participation)’이라는 말이 나온다. 소송이 개인의 권리구제 차원을 넘어 공적 참여를 막기 위한 목적으로 악용되는 경우를 일컫는다. 국회입법조사처가 2010년 펴낸 ‘전략적 봉쇄소송 규제법의 국내법적 수용방안’에서 설명하는 전략적 봉쇄 소송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공적 의견 표명(많은 경우 반대·비판)을 이유로 제소 △피소자에게 고통을 줄 목적으로 제소 △제소자의 목표는 승소가 아님 △제소에 의해 공적 문제가 법적 논쟁으로 왜곡되면서 본래 논의되던 문제 방치.
명예훼손 혐의로 국회의원을 고소한 원세훈 전 국정원장(왼쪽)과 국정원 직원 김씨(오른쪽). ⓒ뉴시스
이처럼 국정원도 전략적 봉쇄 소송을 벌여 문제 제기 및 반대 여론을 막으려 한다는 것이다. 국정원 직원 김씨에게 고소당한 ‘오늘의 유머’의 한 운영진은 기자가 해당 사건에 대해 말을 꺼내자 진저리를 쳤다. “아직 이 건으로는 검찰 조사를 받으러 가지 않았지만 맞고소를 해서 고소인 조사를 받았다. 그런데도 진이 다 빠지더라. 검찰청 근처도 가고 싶지 않다.”
세금으로 고소하고, 져도 책임 없어
실제로 국정원의 고소는 대체로 실패했다. 지난해 대선 당시 국정원의 나꼼수 고소는 결국 불기소로 끝을 맺었다. 증거 부족이었다(나머지 지난해 대선 국면에서 진행된 국정원의 고소 사건은 진행 중이다).
2011~2012년, 민주당 이석현 의원을 고소한 국정원의 명예훼손 사건은 두 건 모두 불기소되었다. 이석현 의원은 2011년 6월 대정부 질문에서 국정원이 박근혜 당시 의원을 집중 사찰했다고 주장했다. 일주일 후 국정원은 이 의원이 허위 사실을 퍼뜨려 명예가 훼손되었다며 검찰에 고소장을 냈다. 또 지난해에는 원세훈 당시 국정원장으로부터 허위 사실 유포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당했다. 이 의원이 국회 현안질의에서 “원 원장이 베트남에 다녀오면서 과일 세 박스를 사왔다가 세관에 걸렸다”라고 말한 게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이석현 의원실의 한 관계자는 당시 고소에 대해 “국회의원이 국회에서 한 발언은 면책특권이 있다는 사실을 국정원이 모를 리가 없다. 더 이상의 폭로를 막기 위해 일부러 소송을 걸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어차피 불기소될 걸 알면서도 괴롭히는 거였다”라고 말했다.
국정원으로부터 소송을 당한 진선미 민주당 의원(왼쪽)과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오른쪽). 국정원은 라디오 방송과 신문 칼럼을 문제 삼았다. ⓒ시사IN 백승기
지난해 3월 “국정원 ‘후쿠시마 방사능 유입 경고’ 막았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낸 <한겨레>도 올해 4월 국정원과의 민사소송에서 이겼다. 국정원은 “국립환경과학원에서 지난해 일본 후쿠시마 원전이 폭발하면서 방사성 물질이 한국으로 넘어올 수 있다는 실험 결과 등을 토대로 작성한 보고서를 ‘대외비로 하라’는 등 외압을 넣거나 관여하여 폐기하도록 한 사실이 없다”라고 주장하며 정정 보도와 손해배상(정정 보도를 하는 날까지 매일 500만원)을 청구했다. 재판부는 “국가기관에 대한 감시·비판·견제라는 정당한 언론 활동의 범위 내에 속한다”라고 <한겨레>의 손을 들어줬다. 2009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발언 때문에 국정원으로부터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당한 박원순 당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도 전략적 봉쇄 소송의 피해자였다. 박 당시 상임이사는 1·2·3심에서 모두 이겼지만 국정원이 항소와 상고를 포기 하지 않아 30개월 동안 법원을 오가야 했다.
나꼼수 사건을 맡은 이재정 변호사(법무법인 동화)는 “국가기관은 국민의 세금으로 소송을 한다. 심지어 소송에서 져도 이에 관한 책임을 묻거나 하지 않는다. 국정원 또는 그 밖의 국가기관에 소송을 당해서 이겼다 치더라도, 당사자에게 돌아오는 건 그 기간 법원·검찰을 들락거린 시간과 비용 그리고 무죄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국정원의 잦은 고소가 국민의 입을 막는 게 아니냐는 비판에 대해 국정원의 한 관계자는 “달리 입장을 말할 성격이 아니다”라고만 말했다.
전략적 봉쇄 소송을 막자는 논의는 이미 정치권에서도 있었다. 2003년 참여정부 시절 야당이던 한나라당은 전략적 봉쇄 소송을 규제하겠다는 법안을 발표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신과 측근의 부동산 문제 의혹을 제기한 당시 한나라당 김문수 의원과 <조선일보> 등 4대 신문사를 대상으로 손해배상 30억원을 청구한 것에 맞선 조치였다. 2004년 한나라당 최구식 의원이, 2005년에는 한나라당 정종복 의원이 다시 그 필요성을 언급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면서 말이 쏙 들어갔다.
박주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사무차장은 “미국은 전략적 봉쇄 소송의 경우 법원이 소송을 바로 각하하고 영국도 국가의 소송 남발을 금지토록 하는 조례가 여러 지자체에 제정되어 있다. 외국의 입법례를 검토해 소를 조기에 각하시키는 등의 조치가 필요해 보인다”라고 말했다. 또 그는 당장은 국정원의 자제가 필요하다고도 지적했다. 국정원의 명예는 소송으로 지켜지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행동을 되돌아보고 어떻게 하는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국정원으로부터 고소당한 이들 사이에서 정작 국정원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게 누구냐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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