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92777
일본이 두려워했던 한국 가문, 뭔가 다르긴 했다
[2013년 전국투어 - 대구경북⑤] 9명 독립운동가 배출한 안동 '임청각'
13.08.15 12:41 l 최종 업데이트 13.08.15 12:42 l 진민용(jmy386)
<오마이뉴스>가 다시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기존 지역투어를 발전시킨 '2013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전국투어'가 4월부터 시작됐습니다. 올해 전국투어에서는 '재야의 고수'와 함께 지역 기획기사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시민-상근기자의 공동 작품은 물론이고, 각 지역에서 오랫동안 삶의 문제를 고민한 시민단체 활동가와 전문가들의 기사도 선보이겠습니다. 8월, 2013년 <오마이뉴스> 전국투어가 찾아가는 지역은 대구·경북·울산입니다. [편집자말]
9명의 독립유공자 배출한 특별한 가문
▲ 99칸의 양반저택답게 임청각은 상당히 큰 규모를 자랑한다 ⓒ 진민용
경북 안동에는 특별한 가문이 있다. 세종 때(1519년)부터 1950년까지 6대손이 내려오는 동안 9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가문. 처가들과 친인척까지 합하면 무려 40여 명의 크고 작은 유공자들이 배출된 가문이다. 특히 이 가문의 종손이던 석주 이상룡 선생은 구한말 퇴계 학통의 유학자로 일제 강점기때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국권회복을 위해 99칸의 집과 전답을 버리고 중국으로 망명해 경학사를 만들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이어 한족회 회장과 서로군정서 독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역임하는 등 독립투쟁의 최고 지도자로 활약했다. 하지만 독립을 보지 못한 채 "나라를 찾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으로 가져가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1932년에 만주에서 생을 마쳤다.
▲ 임청각의 모습들 ⓒ 진민용
이상룡 선생 가문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집이 바로 '임청각'이다. 정부에서는 이를 문화재로 지정했다. 그리고 그곳엔 아직도 자손들이 살고 있다.
이중환의 택지리에는 '임청각은 귀래정 영호루와 함께 안동의 명승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영남산 기슭에 비탈진 경사면을 이용해 계단식으로 기단을 쌓고 건물을 배치해 어느 방에서나 오전과 오후에 햇빛이 들도록 채광효과를 높인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건물로 꼽힌다.
"선조들의 독립운동 보고 배운 후손들"
한 가문에서 독립운동가를 9명이나 배출하는 건 매우 드문 일이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인물을 배출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임청각'을 중심으로 선조들의 희생을 보고 배운 자손들의 행동이 이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임청각이 지어진 1519년으로부터 약 70년이 지나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때는 일본군에 맞서기 위해 명나라 군대가 임청각에서 주둔하면서 전략을 세울 수 있도록 집을 기꺼이 개방하기도 했다. 그 당시 일부 소실되기도 했지만 다시 보수를 했고 이후 1910년대에 일본수비대에 점령당했지만 그 후에는 민족혼을 일깨우는 신흥강습소가 되기도 했다.
이상룡 선생의 독립에 대한 열의는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그는 1911년 중국 망명길에 올라 상주에 도착했을 때 "선발대 일부가 체포됐다"는 정보를 듣고 두려워하는 동료들에게 사소한 일로 대업을 멈출 수 없다며 독려했다.
그후 자신의 외아들이 관헌에게 붙잡혔다가 풀려나와 겁을 먹고 있을때도 "콜럼버스가 작은 배를 타고 위험을 무릅쓰고 대서양을 건너지 않았다면 지금의 미국은 없었다"며 용기를 주기도 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후 독립투쟁을 하던 청년동맹원들이 이상룡 선생의 손자인 병화를 대표로 선출하려 했지만 손자는 "나는 타국에서 조부모와 부모를 모시고 있으니 맡을 수 없다"고 했다. 그 소식을 접한 이 선생은 손자를 꾸짖으며 "나라를 찾겠다는 사람이 조부모를 걱정해서야 어찌 성공하겠느냐, 내 걱정은 내가 할테니 너는 구국에 헌신하라"고 했단다.
선생의 독립정신은 그 후손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선생의 아들 이준형(1875-1942)은 일제시대에 일본으로부터 변절을 요구받자 "일제치하에서 하루를 더 사는 것은 하루의 수치만 더 보탤 뿐이다. 도증(장손)형제는 토지를 팔고 재산을 축소해서라도 교육을 시켜라"는 유서를 남기고 1942년 9월 자결순국했다.
일본이 두려워 했던 '임청각'
▲ 고택의 풍미를 따라 특별히 제작된 번지표 ⓒ 진민용
임청각은 이처럼 단순히 양반댁 건물이 아니다. 나라를 지키려는 민족정신으로 뭉쳤던 선조와 그 모습을 본받은 후손들이 대대로 민족혼을 이어가며 희생했던 역사의 현장이다.
이것을 알았던 일본도 임진왜란때부터 임청각을 파괴하기 위해 노력했다. 명나라 군대가 주둔했을 때 화재가 발생해 자칫 흔적도 없이 사라질 뻔했다. 이후 1930년대 후반에는 일본군이 이 집에 항일투사가 많이 나온다며 중앙선 철도부설을 핑계로 집 전체를 없애려 했다. 하지만 당시 여론이 좋지 못해 일부 부속건물만 철거했다.
▲ 임청각 앞을 지나는 철도, 일본이 일부러 놓은 것이다. ⓒ 진민용
▲ 붉은점선이 원래 계획했던 철로지만, 일본은 현재 노란선으로 철로를 만들어 임청각을 두 동강 냈다. ⓒ 위성지도 갈무리
임청각을 없애려는 일본의 횡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해방을 불과 몇 년 앞두고 일본군은 중앙선 철도를 연결하는데, 원래는 현재 35번 국도가 지나는 안동과 영주 구간과 마찬가지로 직선으로 중앙선을 만들기로 했다. 하지만 일본은 갑자기 설계를 변경하게 된다.
안동에서 임청각을 마당을 지나 옹천역까지 돌아서 두 번이나 꺾이도록 우회를 시켰고, 그 과정에 세 개의 터널(와룡, 성남, 사동)을 뚫는다. 또 소금모래로 유명한 유적지인 '가수내'를 막기 위해 옹벽과 축대를 쌓아버렸다. 이 때문에 기차는 십 여 킬로를 돌아서 가게 됐다. 일본이 얼마나 '임청각'을 두려워 했는지 알 수 있는 실례다.
"임청각은 잊혀져서는 안 됩니다"
현재 임청각은 이상룡 선생의 증손이 이항증씨가 관리하고 있다. 이씨는 현재 임청각의 주인이기도 하다. 그는 이 곳을 찾는 관광객들을 위해 임청각의 역사를 담은 책자를 만들어 베포하고 있고, 어린 학생들과 청소년들을 위해 고택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시설도 현대화 하면서 샤워실과 화장실을 보수했다. 안동시에서는 주변의 주차장 부지를 확보하는 등 '임청각'을 안동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유적지로 만들기 위한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항증씨는 소개책자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과 그 후손들이 타지로 흩어지고 그 자녀들은 정규교육도 제대로 못 받으면서 임청각의 역사가 잊혀졌다" 면서 "지난 2009년에 정부가 현충시설로 지정하기 전에는 극심한 재정난을 비롯해 자손들간의 소유권다툼이 발생하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고 적었다.
그에 따르면 임청각이 보존돼야 하는 이유는 4가지다. 첫째는 국가문화재(보물182호)고 둘째는 임진왜란때 명나라 군대가 주둔하면서 국권수호에 기여한 역사적 건물이며 셋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그리고 넷째는 조상 대대로 참 선비의 삶을 보여준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현재 관리를 맡은 관리인은 "석주 선생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의 산 역사현장이기 때문에 특별히 가치가 높아 관광객들뿐 아니라 건축가들과 공부를 하는 학생들이 많이 찾고 있다"고 했다.
그는 또 "현재 임청각은 보다 많은 관람객들의 편의를 위해서 일부 보수공사를 진행하고 있다"며 "이 같은 공사가 완공되면 고택체험에 불편이 없이 가족단위나 단체관람객들도 부담없이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근현대사 > 독립운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민부(新民府) - 브리태니커 (0) | 2014.01.07 |
---|---|
신민부[新民府] - 민족문화대백과 (0) | 2014.01.07 |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신민부, 장작림 잡으려 장개석과 손잡다 - 중앙 (0) | 2014.01.07 |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⑪ 무장독립투쟁 연구 빈약한 이유 - 한겨레 (0) | 2014.01.04 |
독립투사 유관순은 못말리는 말괄량이였다 - 오마이뉴스 (0) | 2013.05.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