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로왕 - 위키

백제/왕 2013. 10. 9. 21:03
출처 : http://ko.wikipedia.org/wiki/%EA%B0%9C%EB%A1%9C%EC%99%95

개로왕

백제의 21대 국왕
재위 : 455년 ~ 475년

개로왕(蓋鹵王, 415년 ~ 475년 9월, 재위: 455년~475년)은 백제의 제21대 국왕이다. 이름은 경사(慶司) 또는 여경(餘慶)이며 근개루왕(近蓋婁王), 개도왕(蓋圖王)으로도 불린다. 비유왕의 맏아들이다. 바둑을 잘 두기로 유명하였다. 고구려 장수왕이 첩자로 보낸 승려 도림의 계략에 빠져 포로가 되었다가 암살당했다.

일본서기에서는 백제신찬이라는 고서를 인용하여 그를 가수리군(加須利君) 또는 개도왕으로 칭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곤지가 그의 아들이라 하나 일본서기와 속일본기에서는 곤지를 그의 동생이라 한다. 아들 또는 동생인 곤지에게 자신의 후궁 영씨를 주어 일본으로 파견하였다.

생애

비유왕의 아들로 부왕 사후 즉위하였다. 개로왕은 고구려를 선제 공격하고, 청목령과 같은 군사 요충지에는 방어를 굳건히 하여 고구려를 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또한 송나라에 대해서는 사신을 파견하여 서로의 관계를 재확인 하였고, 나제동맹도 지켜나갔다. 472년에는 북위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 정벌에 군사를 내어줄 것을 청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는 북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도리어 고구려의 장수왕을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불안정하긴 했지만 개로왕은 밖으로는 정치에 안정을 기하는데 노력을 했다. 하지만 내정에는 크게 실패하고 말았다. 개로왕은 왕족이 중심이 된 집권체제를 추구했지만 이는 되려 중앙귀족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으며, 지배층의 분열을 일으켰다. 이것은 후에 문주왕이 귀족인 해구에게 살해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무리한 토목 공사와 권위는 백성들의 원망을 사기에 충분하였으며, 이는 《삼국사기》의 도미 설화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 밖에도 고구려의 첩자인 도림에 의해 실책을 펼치게 되는데, 이 또한 무리한 공사로 백성들의 원성을 사게 되었다. 결국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고구려 군사들에게 붙잡혀 아차산성 근처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이라는 사람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를 죽인 재증걸루와 고이만년은 본래 백제의 귀족으로 지배층의 분열로 고구려에 망명간 이들이었다고 한다.

죽음

《위서》의 백제전에 따르면, 당시 고구려의 장수왕은 풍홍을 살해하고 북위의 풍태후와 불편한 관계에 빠져 있다고 판단을 하였던 개로왕은 사신을 통해 북위로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쇠'로 묘사한 고구려를 비방한 국서를 보내었다. 이 사실을 간파한 장수왕은 475년 9월 경 고구려군 3만과 함께 백제의 수도 한성으로 친정했다. 단번에 한성을 포위하고 4개의 군대로 분할하여 총 공격한 고구려는 먼저 북성을 함락하고, 현재 서울특별시 송파구의 몽촌토성인 한성을 공격하였다. 성이 함락에 초 읽기 하자, 개로왕은 수십의 기병과 함께 성을 탈출하였다. 이 때 고구려군의 고이만년과 재증걸루에게 발각되어 고구려군에게 체포 당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개로왕 조는 사로잡힌 개로왕에게 걸루 등이 절한 다음에 얼굴을 향해 3회 가량 침을 뱉는 치욕을 주었고, 아차산 아래에서 죽이었다고 전한다. [1]《일본서기》 웅략기 5년 조에 따르면, 고구려군에 위례를 잃고 국왕 및 대후의 왕손들이 모두 죽임 당하였다고 전한다. 이어서 20년 조는 이 때 백제가 멸망하였다고 전한다.

도미 설화

백제 사람 도미의 아내는 얼굴이 아름답고 절개가 있어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았다. 이 소문을 들은 개로왕은 도미의 아내를 얻기 위해 도미와 내기에서 이겨 얻으러 왔다고 속이기도 하고 옥반지를 줘서 유혹하고 부하를 시켜 데려오게 했지만, 그는 계속 도미를 사랑했고 개로왕에게는 월경 때문에 몸이 더럽다는 핑계로 몰래 도망쳐 나왔다. 개루왕은 결국 도미의 눈을 뽑고 먼 곳으로 버렸다. 도미의 아내는 도미가 그리워 강가에서 울고 있었는데, 한 배가 떠밀려 왔고, 그는 배를 타고 어떤 외딴 섬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곳에서 도미를 발견하고 둘은 고구려로 도망가 서로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이들의 사정을 들은 고구려 장수왕은 곧 군사를 끌고 백제로 쳐들어가 웅진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의 목을 베었다고 한다.

이 설화를 개루왕때의 이야기라고 견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상당히 모순이 많다. 그 이유는 당시 개루왕 시대의 백제 주변엔 말갈이 둘러싸 있어서 고구려로 직접 도망가기엔 거의 모험에 가까웠고, 설령 배를 타고 간다 해도 황해를 건너서 고구려로 도착해야 하는 것이 옳다고 봐야 한다. 거기에 개루왕의 성격으로 봐서 그렇게 잔인한 행동을 할 왕이 아니었기 때문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도미 설화에 나오는 지명 대부분이 개루왕 시대보다 훨씬 후에야 나타나는 지명이기 때문이라는 점 (도미 설화 중도에 나오는 지명 이름인 산산(蒜山)이 주요 예로, 산산이란 한자 지명은 개로왕 이전에도 아예 한자 지명으로 불리지 않았고, 고유 지명인 매시달이란 이름으로 불렸었다)등은 개루왕이 아니라 개로왕 때의 이야기임을 거의 반증해준다.

가계

부왕 : 비유왕
    동생 : 곤지(昆支, ? ~ 477년) - 문주의 동생
        조카 : 동성왕 모대(牟大 혹은 마모(摩牟), 445년 - 501년) - 479년 백제의 제24대 왕 동성왕으로 즉위.
            손자 : 무령왕 사마(武寧王 斯麻, 462년 - 523년)
    아들 혹은 동생 : 문주왕 모도(文周王, 汶洲王 牟都, ? - 477년)
                           - 개로왕 때 부왕을 도와 상좌평으로 일하다 475년 백제의 제22대 왕 문주왕으로 즉위.
            손자 혹은 조카 : 삼근왕(三斤王, 壬乞, 465년 - 479년)
                                   - 문주왕의 아들로 477년 백제 제23대 왕인 삼근왕으로 즉위.

주석

이동 ↑ 김부식 (1145). 〈본기 권25 개로왕〉, 《삼국사기》 “二十一年...王出逃 麗將桀婁等見王 下馬拜已 向王面三唾之 乃數其罪 縛送於阿且城下戕之(21년(475년)... 왕이 [성을] 나가 도망가자 고구려의 장수 걸루(桀婁) 등은 왕을 보고는 말에서 내려 절한 다음에 왕의 얼굴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는 그 죄를 꾸짖었다. [그리고는] 왕을 포박하여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


전 대
비유왕
제21대 백제 국왕
455년 ~ 475년
후 대
문주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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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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