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29662
나랏돈 받으며 노무현 탄핵 앞장... 수상한 친목단체
[한국의 보수단체들 5] 독점적 지위 부여된 친목 단체 '대한민국재향군인회'
20.04.11 13:29 l 최종 업데이트 20.04.11 13:29 l 김종성(qqqkim2000)
▲ 2004년 4월 8일 오후 서울 송파구 향군회관에서 대한민국재향군인회 총회가 열렸다. ⓒ 권우성
국가대항 스포츠 경기를 보면서 '대한민국'을 맘껏 연호하는 것은 몰라도, '대한민국'이란 네 글자를 이용해 영업하거나 단체 활동을 하려 할 때는 제약이 따른다. 산업디자인진흥법에 의거해 설립된 한국디자인진흥원이 발행한 <2017년 디자인법률자문단 사례집>은 '대한민국이나 태극기를 사용해도 상표 및 상호 등록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상표법 제34조 제1항 '가'호를 근거로 "'한국○○'. '대한민국○○○○'는 상표등록을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설명했다.
'대한민국'을 명칭으로 사용하는 단체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법률에 의해 대한민국 국호를 단체 명칭으로 사용하는 곳은 대한민국예술원·대한민국학술원·대한민국헌정회(A)와 대한민국재향경우회·대한민국재향교정동우회·대한민국재향소방동우회·대한민국재향군인회(B)처럼 몇 곳 되지 않는다. 대한민국예술원법이나 대한민국재향경우회법처럼 이 단체들에 대해서는 별도의 법률이 제정돼 있다. 한마디로, 이들은 '법적 특권'을 부여받은 단체들이다.
A로 묶인 단체들에는 '재향'이란 글자가 들어가지 않는다. 이들은 사회 원로집단이 될 만한 단체들이다. B로 묶인 곳에는 '재향'이 들어간다. 현직이 아닌 퇴직자들의 조직이지만 특별히 대해야 할 필요가 있는 단체들이 이에 해당한다. 군사력을 사용하거나 국민에게 물리력을 행사하는 조직에 근무했던 사람들의 단체가 여기에 들어간다.
이처럼 단체 명칭에 '대한민국'을 사용하는 법률상 특권을 받았는데도 이런 특권을 소중히 사용하지 못하고 도리어 끊임없는 논란을 일으킨 단체가 있다. 대한민국 전체가 아닌 대한민국 일부를 위해 활동했다는 의혹을 받아온 대한민국재향군인회(이하 향군)가 바로 그것이다. 예비역 군인들의 친목 단체인 향군은 법적 특권에 어울리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보다는 정치적 편향성을 보이며 숱한 문제를 일으켜왔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대한민국재향군인회법은 제1조에서 "이 법은 대한민국재향군인회를 설립하여 재향군인 상호 간의 상부상조를 통한 친목을 도모하고 회원의 권익을 향상시키며 국가발전과 사회공익 증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한 뒤 제2조 제1항에서 "대한민국재향군인회는 법인으로 한다"고 규정했다. 이처럼 재향군인의 권익을 추구하는 민간 법인의 외형을 띠고 있지만, 애당초 이 단체가 창립될 때는 그런 목적이 그다지 강렬히 추구되지 않았다. 그보다는 정권의 이해관계가 훨씬 더 비중 있게 추구됐음을 부인할 수 없다.
▲ 1952년 2월 2일 자 <동아일보> 기사 "재향군인회 발족"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향군이 민간단체이기보다는 관변단체였다는 점은 한국전쟁 중인 1952년 2월 1일의 창립총회 풍경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그해 2월 2일 자 <동아일보> 기사 '재향군인회 발족'은 이렇게 보도했다.
"병무국을 비롯하여 예비역 장정들과 구(舊)한국장교단이 중심이 되어 결성되는 대한민국재향군인회 창립총회는 예정대로 작(昨) 1일 상호 십시 병무국 광장에서 허 국무총리서리와 김 국방차관 이하 삼군 장성 그리고 내외 유지(가) 다수 참석한 가운데 거행된 바 ···."
국방부 병무국 마당에서 허정 총리서리 및 김일환 국방차관과 육해공군 장군들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총회가 열렸다. 순수한 민간단체는 아니었던 것이다. 2006년에 <군사논단> 제46호에 실린 정길호 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의 논문 '재향군인회 운영 현황과 발전 방향'은 이렇게 말한다.
"본래 재향군인회의 설립 목적은 국방부 병무행정의 집행을 보조하는 예하 단체로서 예비역 장교들이 지역 내 징병 대상자와 기타 예비역 해당자를 관리하여 동원체제에 만전을 기하는 데 있었다."
예비역 장교들을 통해 징병 대상자와 예비역을 관리하는 것이 이 단체의 설립 취지였다. 병무청 보조기관 같은 단체였던 것이다. 그 같은 실질적 설립 취지를 가진 상태에서 이 단체는 여러 차례의 통합과 해체를 거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왔다. 1953년에는 제대장병보도회로 개칭되고 1957년에는 대한상무회로 개칭됐다가 4·19 혁명 직후인 1960년 5월 4일 원래의 명칭으로 되돌아갔다.
이 단체를 법인으로 만든 것은 민주당 정권인 장면 내각이다. 1961년 5월 10일 제정된 대한민국재향군인회법(법률 제617호)은 제2조 제1항에서 "재향군인회는 법인으로 한다"고 한 뒤 제7조에서 "정부예산의 범위 내에서 재향군인회에 보조금을 교부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제8조에서 "국방부장관은 징집, 소집, 방위훈련에 관하여 재향군인회의 협력을 요구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또 이 법률은 향군에 독점적 지위를 부여했다. 제2조 제2항에서 "본법에 의하여 설립된 재향군인회 이외에는 재향군인회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못한다"고 규정했다. 친목 단체에 대해 이처럼 독점적 지위를 부여할 필요가 있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예비역 장교 못지않게 예비역 병사들의 복리 증진에 힘쓰겠다며 2005년 9월 27일 출범한 평화재향군인회가 법외 단체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향군을 보다 강력한 단체로 만든 것은 위의 법률 제617호가 제정된 지 6일 뒤 새벽에 야음을 뚫고 서울 사대문 내에 침입한 박정희 쿠데타군이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1963년 7월 19일 법률 제617호를 전면 개정한 대한민국재향군인회법(법률 제1367호)을 통해 대부분의 대한민국 남성들을 재향군인회 회원으로 만들었다.
법률 제617호의 제3조에서는 "다음 각호 규정에 해당하는 자는 재향군인회의 회원이 될 수 있다"고 한 데 반해, 법률 제1367호의 제5조는 "재향군인회의 회원은 다음 각호의 1에 해당하는 자로 한다"고 하면서 병역의무 이행자들의 종류를 열거했다.
'될 수 있다'에서 '한다'로 바뀜에 따라, 병역의무를 이행한 대한민국 국민들은 재향군인회의 당연직 회원으로 간주됐다. 2016년 개정된 현행 대한민국재향군인회법 역시 문장만 약간 다를 뿐 법률 제1367호와 동일하다. 오늘날 '1000만 재향군인회'라는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이 여기에 있다.
정치 개입
▲ 2014년 11월 25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열린 통합진보당 해체 촉구 기자회견에서 재향군인회 회원들이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 이희훈
1963년에 회원 조항이 바뀔 때 함께 달라진 것이 있다. 1961년 법률에서는 정부가 재향군인회에 보조금을 교부할 수 있다고 규정한 데 비해, 1963년 법률에서는 보조금 지급 조항에 더해 "재향군인회의 재정은 회원의 회비 기타 수입으로써 충당한다(제16조 제1항)"는 조항을 추가했다. 재향군인회가 광범위하게 확장된 신규 회원들을 명분으로 재정을 확충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만든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향군에 대한 국가적 지원이 증가된 것이고, 어떻게 생각하면 향군에 대한 국가적 개입이 강화된 1963년의 변화였다. 이 변화는 향군과 국가권력의 관계를 한층 공고히 해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향군이 친목 도모나 권익 증진 같은 기능으로부터 한층 더 멀어지는 요인이 됐던 것이다. 1963년의 변화는 향군이 국회의원선거나 대통령선거 같은 정치행사에 자주 동원되는 결과를 낳았다.
일례로, 박정희 정권이 3선 개헌을 추진하던 1969년 향군은 '250만 재향군인'의 이름으로 개헌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병역의무를 이행한 모든 국민이 박정희의 3선 연임을 찬성한다는 말이 성립하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은 여야 간의 정치 쟁점으로 비화될 정도로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신민당은 오는 팔일 열리는 제칠십일회 임시국회에 정일권 국무총리를 비롯, 박경원 내무, 임충식 국방, 이호 법무, 홍종철 문교장관 등을 출석시켜 최근 재향군인회 등 비정치적인 각종 외곽단체가 삼선 개헌 지지를 위한 갖가지 정치활동을 벌이고 있는 사태에 대해 철저히 따질 방침···"
1969년 8월 5일 자 <동아일보> 기사 '야 의원에 폭력·협박 추궁'의 일부다. 당시 재향군인회법에서도 정치 개입은 금지사항이었다. 하지만 지켜지지 않았기에 이런 논란이 벌어진 것이다.
논란은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이 종식된 뒤에도 그치지 않았다.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전된 1990년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미래통합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의 1996년 15대 총선 전략에서도 향군은 주요 협력 대상이었다. 4·11 총선 1개월 전에 발행된 1996년 3월 15일 자 <한겨레> 기사 '여, 관변단체 총선 활용 조짐'에 따르면, 신한국당 직능위원회가 향군을 비롯한 9개 관변단체와 선거 협력을 도모한 사실이 드러나서 새정치국민회의(민주당의 전신)가 강력하게 항의를 한 일이 있다.
향군의 정치 개입은 보다 더 위험한 방향으로도 나타났다. 국민 대다수의 뜻에 정면으로 맞서는 일도 있었다. 노무현 정권 때는 대통령 탄핵을 찬성하더니, 박근혜 정권 때는 국정교과서 지지 운동도 벌이고, 2016년 촛불혁명에도 정면으로 맞섰다. 향군 회원들이 친박단체 박사모와 함께 태극기 집회에 참여하기도 했던 것이다.
도덕적 해이
▲ 2015년 11월 5일 서울역 광장에서 재향군인회 등 보수단체들이 역사교과서 국정화 지지 집회를 열고 "검정화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 이희훈
한층 더 딱한 모습은 촛불혁명 뒤에 사상 최초의 외부 회계감사를 받으면서 노출됐다. 회원 1000만 명과 출자회사 7곳과 직영 회사 3곳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국가보훈처로부터 해마다 100억 원 이상을 보조받고 있기에 당연히 튼튼하고 건실해야 할 항군이, 실상은 매우 열악한 재정위기를 겪고 있었다. 제대군인 복지라는 공식 활동을 게을리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금전 관리마저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집중 보도한 2019년 1월 8일 자 <시사저널> 기사 '부실 경영 향군, 매번 정부 눈치만 본다'는 "6000억 원이 넘는 부채에, 2017년에는 950억 원에 달하는 당기 순손실을 기록했다"고 보도했다. 부실단체가 아니라 부실기업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다. 매일 내야 할 이자가 6000만 원, 1년간 내야 할 이자가 230억 원 이상이었다고 한다. 그간 외부감사도 없이 국가의 보호 속에 활동해온 이 단체가 이처럼 곪을 대로 곪아 있었던 것이다.
제대군인들의 복리 증진에 힘쓰라고 수십 년간 국가 지원을 받아온 향군 덕분에 예비역 군인들의 복지가 증진됐다는 이야기는 우리 사회와 친숙하지 않다. 군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은 사람들이 제대 후에 향군에서 구조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우리 사회와 친숙하지 않았다. 향군이 예비역 복리에 신경을 썼다면, 별도의 군 인권단체가 생겨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촛불혁명 뒤에 김진호 회장 체제가 새로 출범했지만, 향군이 새롭게 거듭났다는 소식은 아직 들리지 않고 있다. '대한민국'이란 명칭에 걸맞은 단체가 될 자격이 있는지를 대한민국재향군인회는 아직 입증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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