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98802

유권자 마음 훔친 정도전의 '선거공약'
[사극으로 역사읽기] KBS 드라마 <정도전>, 여덟 번째 이야기
14.06.02 17:20 l 최종 업데이트 14.06.02 17:20 l 김종성(qqqkim2000)

▲  드라마 <정도전>. ⓒ KBS

정도전은 조선 건국의 실질적 주역이다. 그런데 그는 최대한 평화적인 방법으로 왕조 창업의 목표를 달성했다. 그의 기획으로 움직인 이성계 그룹은 1388년의 쿠데타인 위화도 회군 이후로는 원칙상 평화적인 방식으로 정치적 목표를 추구했다. 고려왕조의 법률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신왕조의 건국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정도전이 고려왕조를 최대한 존중했다는 점은, 그의 주군인 이성계가 고려 왕대비의 결단을 통해 주상 자리에 등극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공민왕의 부인이자 당시의 왕대비인 안정비(정비 안씨)의 승인 하에 왕이 됐으므로, 이성계는 형식상으로는 고려 주상으로 등극한 셈이었다. 

또 이성계가 왕이 된 시점은 태조 1년 7월 17일(양력 1392년 8월 5일)이지만, 국호를 조선으로 변경한 시점은 태조 2년 2월 15일(양력 1393년 3월 27일)이다. 따라서 이성계는 7개월 보름 이상을 고려 주상으로 살았다. 

이렇게 정도전은 무력의 사용을 억제하고 고려왕조를 최대한 존중하면서 왕조 창업이라는 혁명적 결과를 생산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비결 중 하나는 그가 사람들의 마음을 샀기 때문이다. 요즘 말로 하면, 유권자들의 호응을 얻은 것이다.  

물론 정도전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사지는 못했다. 고려 말에는 두 기득권층이 공존했다. 하나는 공민왕 이전부터 존재한 전통적 기득권층인 권문세족이고, 또 하나는 공민왕 시대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신진사대부(개혁적 관료 그룹)다. 여기서 권문세족은 정도전의 적군이고, 신진사대부는 아군이었다. 그는 이들 모두의 마음을 사는 데 실패했다.  

정도전은 적군인 권문세족의 미움을 샀다. 그는 고려왕조를 무너뜨리려 했을 뿐만 아니라, 과전법이란 토지개혁으로 기존의 경제질서를 위협했다. 그가 그들의 원성을 사는 것은 당연했다. 

정도전은 아군인 신진사대부의 마음을 완전히 사는 데도 실패했다. 이성계가 쿠데타로 최영 정권을 전복한 뒤로 신진사대부는 대체로 정도전을 지지했다. 하지만 정도전이 토지개혁을 추진하면서부터 신진사대부의 상당수가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신진사대부 역시 공민왕 이래로 기득권층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정몽주처럼 국립대학인 성균관을 졸업한 신진사대부들은 토지개혁을 계기로 정도전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정도전을 위험인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성균관 출신의 상당수는 조선 건국을 거부했다. 조선 건국에 찬동한 신진사대부의 대부분은 비(非)성균관 출신이었다. 

정도전이 제시한 '친서민 정책' 세 가지

▲  정도전(조재현 분). ⓒ KBS

이처럼 정도전은 권문세족의 마음도 잡지 못하고 신진사대부의 마음도 완전히 잡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누구의 마음을 잡았을까? 그것은 당시 경제위기를 겪고 있던 다수의 서민들이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다. 정도전이 서민들의 마음을 잡았다고 해서 그가 서민 중심의 정치질서를 추구했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가 만든 법전인 <조선경국전>에 잘 나타나듯이, 그는 어디까지나 '사대부 중심, 재상 중심'의 정치질서를 꿈꾸었다. 그를 포함해서 당시 정치인들의 머릿속에는 '서민 중심'이라는 관념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이처럼 사대부 중심의 정치질서를 꿈꾸기는 했지만, 정도전은 다수의 서민들에게 이익을 주는 정치를 꿈꾸었다. 이런 정치적 이상이 서민층 다수의 호응을 얻었기 때문에 유혈 투쟁을 최대한 억제하면서도, 또 신·구 지배층의 외면을 받으면서도 왕조 창업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정도전이 '유권자'들에게 제시한 친서민 정책 중에는 오늘날 우리의 관심을 끌 만한 것들이 적지 않다. 그중 세 가지만 소개하고자 한다. 

[공약①] 사회적 약자의 배려

전통적으로 한국·중국의 역대 왕조는 복지정책을 군주의 핵심 임무로 간주했다. 이 중에서도 환과고독(鰥寡孤獨)에 대한 복지정책은 가중 중요한 정책으로 인식되었다. 환과고독은 홀아비·과부·고아·독거노인을 가리키는 용어다. 

환과고독에 대한 배려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삼국사기>에도 잘 드러난다. 일례로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고구려 고국천태왕(고국천왕)이 환과고독에 대한 복지를 강조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같은 복지정책은 고대 이래로 한국과 중국의 역사서에서 누누이 강조되었다. 

고려왕조도 복지정책을 중시하는 나라였다. 고려에서는 환과고독뿐만 아니라 무료급식에까지 신경을 썼다.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단의 중간 간부인 서긍이 송나라 황제에게 바친 보고서인 <고려도경>에 따르면, 고려에서는 도성 곳곳에 급식소를 설치하고 누구라도 쌀죽을 먹을 수 있도록 했다. 서긍은 자기가 본 것만을 기록했다. 따라서 그가 방문하지 않은 지역에서도 이 같은 무료급식이 얼마든지 시행됐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복지정책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약해졌고, 이것은 서민층의 삶을 압박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 기후 변화와 함께 찾아온 14세기의 농업위기 및 경제위기로 인해 서민층은 한층 더 삶의 위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정도전은 그런 서민들에게 복지정책의 확대를 약속했다. 이 점은 정도전이 작성한 이성계의 즉위교서(취임 담화문)에서도 표출된다.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과 <태조실록>에 수록된 즉위교서에는 '환과고독에 대한 보호는 임금의 우선적인 역할이므로 지방 관청을 통해 이들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하는 대목이 나온다.  

▲  길거리에서 거지 가족에게 만두를 건네주는 정도전. <정도전> 제35회의 한 장면. ⓒ KBS

[공약②] 부의 불평등 해소

고려 말에 귀족과 불교 사찰들이 대규모 토지를 소유한 일이 국가경제를 마비시켰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 같은 부의 불평등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목적으로 정도전은 과전법이란 토지개혁을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다. 토지에 대한 지배권을 전면적으로 뜯어고치겠다고 약속하고 나선 것이다. 

과전법의 또 다른 목적은 조선 건국의 주역들에게 토지에 대한 지배권을 주는 데에 있었지만, 이것은 구세력의 재산을 감소시킴으로써 부의 불평등을 어느 정도 해소하는 데에 기여했다. 정도전이 불교를 집중적으로 비판한 것은 불교사찰이 보유한 과도한 토지를 빼앗기 위한 것이었다.  

[공약③] 고용 안정의 달성

중국대륙에서 홍건적의 난이란 농민반란이 극심했다는 사실에서 나타나듯이, 조선 건국 이전의  동아시아에서는 농민들의 생업이 전반적으로 불안정했다. 그래서 그들의 일자리를 안정시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했다. 정도전 역시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고용 안정이라는 목표를 성취하고자 정도전이 구사한 방식은 지금의 우리가 보기에는 좀 이해하기 힘든 것일 수도 있다. 그가 구사한 방법 중 하나는, 노비의 몸값을 상향 조정하고 이것을 국가가 통제하는 것이었다. 노비의 몸값을 상향 조정하는 것이 어떻게 고용 안정에 기여했을까?

태조 7년 6월 18일자(1398년 7월 31일자) <태조실록>에 적혀 있듯이, 오늘날의 노동자에 해당하는 당시 노비들의 평균적인 몸값은 말 가격의 약 3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노비의 몸값이 싸다 보니, 노비의 매매가 자유로울 수밖에 없었다. 노비의 매매가 자유롭다는 말을 당시 사람들의 관념으로 바꾸면, 노동자의 매매가 자유롭다는 말이었다. 

오늘날의 노동자들이 공장이나 회사에 얽매여 있듯이, 노비들은 주로 토지에 얽매여 생계를 유지했다. 이들의 대다수는 주인의 농토에서 농사를 짓고 수확물의 일정량을 주인에게 바쳤다. 따라서 이들의 입장에서는 토지에 대한 자신의 경작권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것이 급선무였다. 

노비의 매매가 자유롭다는 것은 노비의 고용주가 수시로 바뀔 수 있다는 뜻이고, 이것은 노비가 언제라도 기존의 농토를 잃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따라서 이것은 노동자가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현재의 일터에서 언제든지 쫓겨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이 같은 고용 불안정을 막고자 정도전을 비롯한 조선 건국의 주역들은 노비의 몸값을 높임으로써 노비의 매매를 억제하고 이를 통해 고용 안정을 달성하고자 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물이 위의 <태조실록>에 수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정도전을 비롯한 건국 주역들은 조선 건국 6년 뒤인 1398년에 노비의 몸값을 말의 몸값 수준으로 올리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이들이 조선 건국을 즈음한 시점부터 노비의 고용안정을 추구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였다. 

위와 같이 조선 건국을 즈음한 시기에 정도전이 추진한 각종 정책은 서민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이런 친서민 정책은 '유권자'들이 정도전의 '조선당'에 1표를 던지도록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 정도전의 친서민 정책은 '조선당'이 유혈 혁명을 동원하지 않고도 실질적 혁명을 달성할 수 있도록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기호가 몇 번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정도전과 조선당은 서민 대중을 자기편으로 만듦으로써 새 시대의 권력을 획득할 수 있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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