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heritage.tv/hp/hpContents/vod/view.do?contentsSeq=7323&categoryType=2
         http://www.youtube.com/watch?v=Ygd4zngUgNw 

남한산성 3부, 병자호란, 고립무원의 47일




내용

튼튼하게 쌓인 철옹의 남한산성 안엔 임금이 머물렀던 행궁이 
있습니다. 역사상 임금이 가장 오래 머무른 행궁으로 기록되어 
있는 남한행궁. 병자호란 당시 겪었을 남한산성의 아픈 기억들을 
더듬어 시련의 세월을 견딘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가 봅니다.

<남한산성 방문정보>

위치 :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563
연락처 : 경기도남한산성도립공원관리사무소 031-743-6610
주변 볼거리 : 지수당, 서흔남묘비, 서문, 남한행궁
관련 홈페이지 : http://www.namhansansung.or.kr


동영상 대본정보

1. 프롤로그 - 인조임금, 남한산성에 입성하다   

- 지수당
연못과 정자가 아름다운
남한산성 지수당.   

- 묘비
그 옆의 묘비에는
인조임금과 관련된 일화가 전한다.  
서흔남...  천민출신으로,  

  - 묘비 뒷면
가의대부라는 품계까지 받은 그의 이야기는
병자호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눈 쌓인 타이트 샷
청군에 쫓겨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인조.  

- 눈 내리는 성벽
눈까지 내려 올라갈 일이 아득했다.
이 때 한 남자가 나타나 적에게 들키지 않게  
 
- 눈 내리는 성벽
나막신을 거꾸로 신고, 왕을 업어
성까지 모셨다. 서흔남이었다. 
- 펄럭
기지를 발휘한 그에게
인조는 곤룡포를 하사했다. 

- 남한산성 남문 입성하는 느낌 TR
혹한의 추위에,
남한산성 남문으로 입성한 인조.
  
- 성문 닫히고 (성 밖 촬영)
성문을 잠그고
47일을 버틴 그들의 이야기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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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고립무원의 4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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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왕의 피난처 행궁, 이곳에 왕이 머물다

 
- 행궁 [국가사적 제 480호]
이곳은 남한산성 행궁.  
유사시에 임금이 거처했던 곳이다. 

- 행궁 사진
남한산성 행궁은 일제 강점기 때 모두 파괴됐다.
경기 의병들이 투쟁의 거점으로 삼았던
남한산성을 일제가 경계한 때문이다.
사라진 남한산성 행궁은... 

- 현재 한남루
2000년대에 다시 재건됐다. 
- 한남루 문 열리는
전란을 피해 왕이 이곳에 머물렀다. 

- 길  
47일...
남한산성 행궁은 왕이 가장 오래 기거한
행궁으로 기록된다. 

- 내행전 PAN
행궁은 크게 상궐과 하궐로 구분된다.
이 외행전은 하궐의 중심건물로 

- 기와
임금의 집무실로 쓰였다.    
(흘리고) 

- 공포
외행전의 공포는 끝부분을 둥그렇게 만든  
물익공. 상궐보다 위계를 낮추기
위해서다.  

- 외행전
인조는 이곳 외행전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군사들을 독려하기 위해
음식을 베푸는 호궤를 행했다.   

- 내행전
외행전을 지나면...
상궐인 내행전에 다다른다. 
   
- 처마.. 공포
내행전의 공포는 새의 날개처럼 생긴 부재를
두 개 겹쳐 쌓은, 이익공 형식으로
행궁 내 건물 중 가장 격식이 높다.  
 
- 방으로
내행전은 임금의 침전으로 쓰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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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종묘와 사직을 갖춘, 유일한 행궁, 남한행궁  

- 종묘(좌전)
조선시대는 전국 10여 곳에
주요 행궁이 있었다.  

td  
그 중, 남한산성 행궁은
유사시에 종묘와 사직의 신주를 옮겨,
모실 수 있도록, 좌전과 우실을 갖춘
유일한 행궁이었다.    

- 행궁반석
뒤뜰에는 행궁반석이 자리한다.  
병자호란 당시,
거듭 위기에 처한 종묘사직과 나라를,
반석(磐石)과 같이 튼튼히 지켜야 한다는 뜻을
간직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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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47일간의 치열한 항전    

- 서문 밖 풍경    
뒤쫓아온 청군은 서문 밖 강가,
삼전도 들판에 본진을 펼치고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 병자호란 서문전투도
청의 10만 대군을 맞아,
성 밖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이어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점점 조선군에 불리해져갔다.   

- 눈 내리는 산성
혹한의 추위와 부족한 식량...  
성안은 조금씩 지쳐갔다.

- 북문 밖으로 PAN
영의정 김류의 주장에 따라
최후의 일전을 펼치기 위해 나선 북문전투.    
결과는 대참패로 참혹하게 끝났다.  

- 북문
후에, 북문전투의 뼈아픈 패배를 기억하며
다시는 전쟁에서 패하지 말자는 뜻으로,
정조는 북문에 전승문이라 이름을 붙였다.  

 - 벌봉 (항공촬영)
청군은 벌봉에 올라 성안을 관찰하며
조선을 압박해왔다. 

- 행궁 (항공촬영)
동성 망월대에
최신식 무기인, 홍이포를 끌고와
성안의 행궁을 향해 쏘아댔다.  

- 외행전으로 ZI
청이 쏜 포환이 외행전의 기둥을 맞춰
인조가 내행전으로 옮겼다. 

- 행궁에 앉은 왕의 시선으로
행궁에 갇혀, 적에게 포위된 인조 임금.
그는 이곳에서 그 참담한 심정을
어떻게 수습했을까? 

- 행궁 옆 느티나무 tu
희망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고립무원의 상황이 계속됐다.
(잠시 쉬고)
하루는, 행궁 남쪽 느티나무에  
까치가 와서 둥지를 틀었다.   

- 나무위 까치
인조와 성 안의 군인들은 이를 길조라
여기며 반겼다 한다....
느티나무 까치는,  

- 나무
암담한 성안에서 품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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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왕이 출성하다 

-행궁 문 열리며 밖으로 나가는 느낌 TR
추위와 주림에 지치고...     
 (인조 시선)
강화행궁 마저 함락되면서  
굳게 걸었던 빗장을 열 수밖에 없었다.  
47일만의 일이었다. 
- 서문 td
왕이 서문을 통해 남한산성을 나선다.
청에 항복하러 삼전도로 향하는 길....

- 모래바람 이는 문
살기위해 선택한, 치욕의 길이었다.  


- [남한일기]
(나레이션 없이 자막만) 
(왕이) 서문을 나가니 세자가 그 뒤를 따랐다. 
뒤따르던 문무백관들은 서문에 서서 가슴을 치면서 통곡하였다. 


- 일몰
인조는 청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다.  

- 삼전도비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
병자호란이 끝난 후,
청태종은 조선에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게 했다.
몽골어와 만주어로도 새겨 넣은
치욕의 역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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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에필로그
- 서문 tu
항복하러 가는 왕의 참담함을 지켜본
남한산성 서문은,
지금도 그 자리에 묵묵히 서서   

- 서문 SS
뼈아픈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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