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lBz2L0 
* 아래 "정철 조총"은 정식 명칭이 "정철총통"이 아닐까 싶습니다.

<37·끝>종합 요약-자랑스러운 해양전통과 위대한 리더 이순신
철저한 사전 준비+리더십 ‘전승가도’ 달렸다
2012. 09. 24   00:00 입력 | 2013. 01. 05   08:24 수정
 
왜구 대비용 맞춤형 ‘판옥선’ 제작 고결한 인격 민·관·군 통합 원동력
 

현충사 이충무공 고택.

1592년(임진년)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을 상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신무기 조총(鳥銃)이다. 그런데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 발발 3년 전 대마도주로부터 조총을 상납받아 그 실체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활을 다루는 데 익숙했던 조선은 조총의 위력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한 발을 쏘고 다음 발을 쏠 때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이미 일본 내에서 통일 전쟁을 치르면서 3열 횡대의 조총 전술을 개발해 기마전술을 무력화시키는 등 조총의 전투력을 극대화시켰다. 탄금대에서 기마전술을 펼치며 배수진을 쳤던 신립 장군의 패배는 어찌 보면 예견된 것이었다.

그러나 수군의 전쟁 준비는 지상군과 달랐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은 고려 말 세계 최초로 화포를 사용해 해전을 벌인 진포(鎭浦) 해전(1380년)을 기점으로 볼 때 200년 이상 함포운영의 노하우가 축적된 혁신된 수군이었다. 조선의 지상군이 익숙한 활에 집착해 화약 병기의 활용을 소홀히 한 반면 백병전에 능한 왜구를 대비해야 했던 조선의 수군은 진작부터 화약무기류 중심의 해전전술 개발에 나섰기 때문이다. 함선의 경우도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의 주력함선이었던 판옥선은 왜구의 해전전술인 등선백병전술(登船白兵戰術)에 대비하기 위해 만든 ‘왜구 대비용 맞춤형 함선’이었다. 판옥선은 대선(大船)이었다. 백병전에 능한 일본 병사들이 조선의 배로 넘어오기 어렵게 하기 위해선 상대적으로 큰 배가 필요했던 것이다. 판옥선은 임진왜란 발발 71년 전부터 건조 논의가 시작돼 37년 전인 1555년(명종 10년)에 시제품이 나오고 대략 임진왜란 발발 27년 전쯤에는 수군의 주력함선이 판옥선으로 모두 교체가 완료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조선 수군은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 꽤 착실한 준비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순신은 임진왜란 발발 1년 2개월 전인 1591년 2월 종6품 정읍 현감에서 7계급 특진해 정3품인 전라좌수사로 부임한다. 일본이나 오랑캐의 침략에 대비해 ‘계급에 관계 없이 유능한 무인 관료를 발탁한다’는 취지의 ‘불차탁용(不次擢用)’ 제도에 의거한 특별 인사 조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사에 부임하자마자 일본의 침략에 대비한 전쟁준비에 착수한다. 무너진 성을 보수하고, 무기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관료들은 일벌백계했다. 1년여 준비를 독려한 이순신은 임진왜란 발발 2달 전 예하 부대에 대한 전투 검열을 실시한다. 그리고 여수 본영으로 돌아와 1592년 4월 12일 새로 만든 거북선에 돛을 달고 지자·현자 등의 총통을 싣고 나가 사격훈련을 실시했다. 임진왜란 발발 하루 전 거북선의 전력화가 완료된 것이다. 적어도 이순신이 지휘하는 전라좌수군은 임진왜란 발발 하루 전까지 전투 준비태세를 끝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준비가 있었기에 이순신이 중심이 된 조선 수군은 옥포해전부터 승전고를 울리면서 임진왜란 극복의 역사적 주역이 될 수 있었다.

이순신은 조선 수군의 최고 리더로서 전문성과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거북선 건조를 주도할 정도로 함선에 대한 이해가 있었고, 정철 조총을 만들어 낼 만큼 무기에 관한 지식도 소유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언제나 우세한 상황을 조성해 분산된 열세의 적을 공격해 승리했으며, 명량해전처럼 절대 열세의 해전에서는 명량의 좁은 물목을 이용해 수적 열세를 극복했다. 한산도 해전에서는 좁은 견내량에 정박해 있는 일본 함대를 한산도 앞의 넓은 바다로 유인, 학익진을 펼쳐 격파함으로써 일본 수군에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안겨주기도 했다. 이순신은 계사년(1593년) 7월 한산도에 수군의 전진기지를 설치하고 본격적으로 일본 수군의 해로를 차단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이순신의 남해 해로 차단전략은 통제사에서 파직되는 정유년(1597년) 2월까지 지속된다. 임진왜란 초기 일본 지상군 선봉 주력부대는 비록 함경도와 평양까지 진출했지만 남해 해로 이른바 바다를 통한 보급로가 차단됐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남해 연안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순신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침략자 일본군에 대한 적개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아무런 이유 없이 조선을 침략해 백성을 도륙하고 도성을 침탈한 일본군의 만행을 보고 분개한다. 그리고 하늘에 맹서한다. <단 한 척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철저히 응징해 다시는 이런 패륜적 침략행위를 할 수 없도록 할 것이다.> 이순신에게 임진왜란은 하늘의 이치를 거스른 침략자 일본군을 철저히 응징하기 위한 정의의 전쟁이었다. 그는 <정의가 승리하는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는 역사의식, 가치의식의 소유자였다. 그뿐만 아니라 이순신은 ‘나’ 중심이 아니라 ‘나라와 백성’ 중심의 삶을 산 고결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그의 인격에 감화된 부하 장병, 의병, 승병, 백성들이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조선의 민·관·군의 전투력을 통합시킬 수 있었던 중심에 이순신의 고결한 인격이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리더를 ‘유능한 리더’와 ‘위대한 리더’로 구분한다. 전문성·실력을 갖추고 괄목할 만한 성과를 창출한 리더는 ‘유능한 리더’다. 그러나 이순신 같은 ‘위대한 리더’가 되려면 전문성·실력을 토대로 반드시 가치지향적 역사의식과 고결한 인격까지를 갖춰야 한다. 

바야흐로 대한민국은 선진일류국가 진입의 문턱에 있다. 60여 년 만에 일궈낸 대한민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군사 분야의 탁월한 성과 창출은 가위 기적이라 일컬을 만하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선진일류국가로 도약하려면 단순한 성과 창출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제 민·관·군의 리더들은 자신이 창출한 성과가 대한민국 발전을 위해, 국민의 행복을 위해, 세계의 평화를 위해 어떤 가치를 포함하고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아마도 이순신 같은 전문성과 역사의식, 고결한 인격을 갖춘 수많은 리더가 우리 사회 곳곳에서 활동하는 날이 대한민국이 선진일류국가가 되는 날일 것이다. 임진왜란 발발 420주년을 맞이해 이순신 같은 ‘위대한 리더’의 출현을 기대해 보며 그동안 애독해 주신 국군 장병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임원빈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  전 해사 교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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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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