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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31>제16대 고국원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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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고구려에 대해 갖고 있는 환상 가운데 하나.

불패(不敗)와 무패(無敗)의 역사.

언제나 중국이며 일본, 몽골 같은 주변 나라들에게 이리치이고 저리 치이고 살아온 우리이기에,

그러한 고구려의 역사가 가장 자랑스럽고 뿌듯한 역사의 추억이 될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중국 짱깨들이 고구려를 가리켜 중국사라고 하는 것에 대해 분노할 수밖에.

 

하지만.

 

인간의 역사에서 '승'과 '패'라는 것은 항상 빛과 그림자처럼 서로 붙어다니며,

아무리 어느 한쪽을 떼어내려 해도 떼어낼수가 없다.

고구려의 역사도 결국 따져보면 한민족, 우리 인간의 역사.

인간의 역사에서 '승(勝)', '빛[光]'이라는 한 글자만이 존재할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지 알고 싶다면 자신이 살아온 기억을 떠올려보면 된다.

자신의 기억이 항상 빛에 감싸여 있었는지 아닌지.

그러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해가 뜨는 날과 구름이 낀 날, 비가 온 날, 바람이 분 날이 서로 '비슷비슷'하다는 걸.

아니면, 어느 한쪽이 '비정상이다' 싶을 정도로 많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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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國原王<一云國上王> 諱斯由<或云釗>. 美川王十五年, 立爲太子, 三十二年春, 王薨, 卽位.]

고국원왕(故國原王)<또는 국강상왕(國上王)이라고도 하였다.>의 이름은 사유(斯由)<혹은 쇠(釗)라고도 썼다.>이다. 미천왕이 15년에 태자로 삼았고, 32년 봄에 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고구려 고국원왕의 이름은 사유, 고사유다. 쇠라고도 하고,

글자 모양이 비슷한 유(劉), 교(釗)라고 표기된 것도 있다.

미천왕의 태자이며, 어머니는 주씨. 《삼국사》에는 국강상왕이라는 시호 말고도

그냥 국강왕(國罡王)이라는 시호도 나온다. 폭군은 아닌데,

재위 기간 동안 참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했다.

 

[二年, 春二月, 王如卒本, 祀始祖廟, 巡問百姓老病賑給. 三月, 至自卒本.]

2년(332) 봄 2월에 왕은 졸본으로 가서 시조묘에 제사지내고, 백성들 중 노인, 병자들을 두루 위문하고 먹을 것을 주었다. 3월에 졸본에서 돌아왔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안악 3호분 벽에 그려진 대행렬도. 무덤 주인의 행차 장면으로 장대한 느낌을 준다.>

 

재위 이듬해(유년칭원법에 따르면 원년)는 1달 동안 시조묘가 있는 졸본에 제사를 지내며,

시조사당에 제사를 지내고, 노인과 병자들을 위문해서 식량을 주는 등,

내실부터 다져놓으려고 애를 썼다.

 

[四年, 秋八月, 增築平壤城. 冬十二月, 無雪.]

4년(334) 가을 8월에 평양성을 증축하였다. 겨울 12월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기묘하게도 그 해의 겨울은 눈이 오지 않았다.

 

[五年, 春正月, 築國北新城. 秋七月, 隕霜殺穀.]

5년(335) 봄 정월에 나라 북쪽에 신성을 쌓았다. 가을 7월에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신성은 예전에도 쌓았으면서 뭘 굳이 또 하나 쌓으셨는지 참.

디지털한국학에 고국원왕 치니까, 이때에 고국원왕이 소위 '제3현도군 지역'을 차지해서,

그곳에 쌓은 것이 바로 저 신성(新城)이란다. 

지금의 중국 요령성 무순(撫順)에 있는 북관산성(北關山城)이 그곳인데,

아마 고국원왕 자신도 연이 언젠가 침공해올 것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대비하고자 나름대로 대책을 강구했을 것으로 보인다.

 

[六年, 春三月, 大星流西北. 遣使如晉貢方物.]

6년(336) 봄 3월에 큰 별이 서북쪽으로 흘러갔다. 진(晉)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서북쪽으로 별이 흘러가던 그 해에, 전연에서는 한 가지 사건이 끝났다.

모용황의 즉위에 반대하여 일어난 '모용인의 난(333∼336)'.

모용황의 동생이었던 모용인이 일으킨 쿠데타가 평곽에서 진압당하자,

모용인의 편에 가담하였던 곽충과 동수는 갈곳이 없어 마침내 고구려로 망명한 것이다.

 

<안악 3호분의 주인상. 진의 망명객 동수와 고구려 고국원왕이란 두 설이 있다.>

 

여기서 이 동수라는 이 자는,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고구려 고분의 하나인

황해도 안악의 '안악 3호분' 주인으로 추정되는 사람들 가운데 한 명으로서 지목받고 있다.

안악 3호분의 묵서명에 바로 '동수'의 이름이 나오는데,

남한에서는 이 묵서명을 가지고, 무덤의 주인이 곧 중국에서 망명해온 동수라 주장한다.

그리고 고국원왕은 동수를 중용해 안악 3호분이 있는 이곳,

낙랑과 대방 지역을 다스리는 태수로 명했으며, 그가 고구려로 넘어온 것을 기점으로

고구려에는 중국 요동성의 벽화고분양식이 유입되기 시작했다는 것이 동수설의 핵심이다.

이 설을 체계화한 사람이 월북 미술사가인 근원 김용준으로 남한에선 대부분 이 학설을 따른다.

(이 사람이 '두꺼비 연적'에 대해서 쓴 수필을 예전에 중딩 때였나, 고딩 때

교과서에서 읽은 적이 있다)

 

<북한에서 진짜 동수라고 주장하는 문지기 관리 장하독. 머리 위에 적힌 것은 묘지명이다.>

 

북한에서는 또, 이 묵서명의 위치를 가지고, 주인공은 동수가 아닌 다른 사람ㅡ

고구려의 국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벽화속에 그려진 깃발에 적힌

'성상번(聖上幡)'의 세 글자와, 기록속에 나오는 고구려 국왕의 

백라관(白羅冠)과 흡사한 주인공의 관 그림을 들어,

이 묘를 가리켜 동수의 무덤이 아닌 미천왕이나 사유왕의 능이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 왕릉설이 주장되었을 때에는 왕은 왕인데 정작 어떤 왕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했다. 동수가 모신 왕이라면 사유왕이어야 되는데,

어떻게 통구의 국내성 부근에서 죽었을 왕을

이런 남쪽에다가 모셨겠느냐고 반박하고 나선 것이다.

 

<안악 3호분 대행렬도의 한 장면. 검은 깃발 속에 붉은색으로 '성상번(聖上幡)'이라는 세 글자가 선명하다. 북한이 이 무덤을 왕릉으로 추정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안악 3호분의 주인이 누구냐의 문제는 다음에 또 다루기로 하고,

본론으로 계속 넘어가 이야기하면 사유왕 8년(338)에 전연에

또 송황(宋晃) 등이 고구려로 망명해온다. 안정복 영감이

《동사강목》에서 《자치통감》을 인용해 적은 내용인데,

 

조왕(趙王) 호(虎)가 연을 정벌하니 연의 사람들이 떨며 두려워하였고, 연의 동이교위(東夷校尉) 봉추(封抽)와 호군(護軍) 송황(宋晃), 거취령(居就令) 유홍(游泓) 등은 모두 호에게 내응하였다. 그러나 조의 군사가 크게 패하기에 이르러, 연왕 황()이 군사를 나누어 여러 반적(叛賊)을 토벌하니, (송)황 등 세 사람은 고구려로 도망쳐왔다. 호는 도요장군(渡遼將軍) 조복(曹伏)을 보내어 청주(靑州)의 무리를 거느리고 바닷섬을 지키게 하고, 또 배 3백 척으로 곡식 30만 곡을 운반하여 고구려를 찾아가 연을 칠 것을 꾀하였다.

 

이러한 내용이다.

 

[九年, 燕王來侵, 兵及新城. 王乞盟, 乃還.]

9년(339)에 연왕 황()이 쳐들어 와서 그 군사들이 신성에까지 이르렀다. 왕이 맹약을 구하니 그제야 돌아갔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큰 별이 서북쪽으로 흘러가면서, 고구려의 운도 함께 흘러가버린 걸까.

그뒤 3년만에, 연의 모용황이 고구려를 공격해왔다.

신성이라. 미리 쌓은 성이 이렇게 빨리 쓰일 줄이야.

사유왕이 화친을 청해야 할만큼, 연의 세력은 강대해져 있었다.

 

[十年, 王遣世子, 朝於燕王皝.]

10년(340)에 왕은 세자를 연왕 황에게 보내 조회(朝會)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이듬해 사유왕은 세자 구부(훗날의 소수림왕)를 모용황의 수도로 보내어 조회하게 한다.

이전에는 없었던 일이, 사유왕의 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일어났다.

남의 나라에, 이민족의 나라에 우리 왕자를 보내서 그 나라 황제에게 머리를 숙이게 하는.

 

[十二年, 春二月, 修葺丸都城, 又築國內城.]

12년(342) 봄 2월에 환도성을 수리하고, 또 국내성을 쌓았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고구려로서는 굴욕이었다. 그러나 사유왕이 누군가.

명색이 고구려의 태왕인데 겨우 선비족 오랑캐 따위에게 굴복할 수는 없는 일.

다시 환도성을 수리하고 국내성을 쌓는 대사업을 벌인다.

 

[秋八月, 移居丸都城.]

가을 8월에 환도성으로 옮겨 거처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12년(342)

 

단재 선생은 이때 사유왕이 옮긴 환도성은 곧 제3환도성,

태조왕 때의 제1환도성과 동천왕 때의 제2환도성에 이은 세 번째 환도성이었다고 했다. 

그 말처럼 정말 지금의 집안현 홍석정자산(紅石頂子山) 위에 새로 쌓아서

수도를 옮겼다는 제3환도성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소설 《남한산성》까지는 아니어도

사유왕도 장기항쟁 태세를 갖추셨다.

 

[冬十月, 燕王皝遷都龍城. 立威將軍翰請先取高句麗, 後滅宇文, 然後中原可圖. 高句麗有二道. 其北道平闊, 南道險狹. 衆欲從北道. 翰曰 “虜以常情料之, 必謂大軍從北道, 當重北而輕南. 王宜帥銳兵, 從南道擊之, 出其不意, 丸都不足取也. 別遣偏師, 出北道, 縱有蹉跌, 其腹心已潰, 四支無能爲也.” 皝從之.]

겨울 10월에 연왕 황이 용성(龍城)으로 천도하였다. 건위장군(建威將軍) 한(翰)이 먼저 고구려를 빼앗고 후에 우문(宇文)씨를 멸망시키고 그 후에 중원을 차지하자고 청하였다. 고구려에는 두 길이 있었다. 북쪽 길[北道]은 평탄하고 넓은데 남쪽 길[南道]은 험하고 좁았다. 많은 사람들이 북도로 가려고 하였다. 한이 말하였다.

“적(고구려)은 상식으로 헤아려 반드시 대군이 북도로 올 것이라 여겨서, 당연히 북쪽을 중요하게 여기고 남쪽은 소홀히 할 것입니다. 왕께서는 마땅히 정예군을 거느리고 남쪽 길로 가서 그들을 쳐서,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때에 나가야 할 것입니다. 환도(丸都)는 족히 취할 것도 못됩니다. 따로 적은 군사를 북도로 보내면 차질은 있겠지만 그 몸체가 먼저 무너지면 사지는 쓸수 없는 것입니다.”

황은 그 말을 따랐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12년(342)

 

고구려로 가는 두 가지의 길.

북쪽 길이라는 것은 평양→동황성→국내성(집안)→심주(심양)→

통정(신민)→호원진→여주(북진)→연주(의현)→영주(조양)로 이어지는 1,700리 길이고,

남쪽 길은 국내성→요동(랴오양)→광주(요중)→양어무→영주로 이르는 길이다.

이 두 길은 고구려의 최서단인 영주에서 만나서,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을 거쳐서

연의 수도에까지 이어진다.(여기서 뤄양으로 해서 장안까지 가면 실크로드 육로로 연결)

 

남쪽 길이 아무래도 북쪽 길보다는 험하니까 북쪽 길로 가자고 하는데,

연의 건위장군 모용한이 생각의 전환(?)을 이루어낸다.

우리가 예상못한 곳을 공격하자는 것이었다.

 

[十一月, 自將勁兵四萬, 出南道, 以慕容翰·慕容覇爲前鋒, 別遣長史王等, 將兵萬五千, 出北道以來侵. 王遣弟武, 帥精兵五萬, 拒北道. 自帥羸兵, 以備南道. 慕容翰等先至戰, 以大衆繼之, 我兵大敗.]

11월에 황은 스스로 날랜 군사 4만을 거느리고 남쪽 길로 나와서, 모용한과 모용패(慕容覇)를 선봉으로 삼고, 따로 장사(長史) 왕우(王) 등을 보내 1만 5천 군사를 거느리고 북도로 나와서 침략해 왔다. 왕은 아우 무(武)를 보내 정예군 5만을 거느리고 북도를 막게 하고, 자신은 약졸들을 거느리고 남도를 막았다. 모용한 등이 먼저 와서 싸우고 황이 대군을 이끌고 뒤이어 오니 우리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12년(342)

 

사유왕과 모용황, 어느 쪽이 더 노회하거나 서투르다고 단언지을 수는 없지만

아버지만큼의 능력이 사유왕에게는 좀 모자랐다는 것은 분명했다.

모용황이 찌른 곳은 확실히 고구려의 급소였다.

급소를 찔린 고구려는 그야말로 '맥없이' 무너져버렸다.

상대의 급소, 허술한 곳을 노리는 것이 동서고금을 막론한 전술의 기본이라지만,

사실 이 너무도 기본적인 전술 앞에 우리가 무너진 것이 대체 몇번이었던가.

 

조선조에 임경업이 지키고 있던 백마산성 돌아 남쪽으로 뚫고 내려온

만주족 애들이 파죽지세로 강화도를 함락시키고 세자를 인질로 잡아

인조를 남한산성에 가둬 47일동안 괴롭히다가 결국 삼전도에서 항복받고

'대가리 박아' 시키기까지의 그 치욕적인 과정도. 따져보면 여진족은

임경업이 지키는 백마산성에서 피해를 볼 것을 알고서,

자신들에게 피해가 될지 모를 곳을 돌아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우회전법을 택한 것인데.

그때 조선 정부에서, 저들이 길목 한가운데 놓인 백마산성을 그냥 놔두리라고 생각이나 했겠나.

 

[左長史韓壽, 斬我將阿佛和度加, 諸軍乘勝. 遂入丸都. 王單騎走入斷熊谷. 將軍慕輿埿, 追獲王母周氏及王妃而歸.] 

좌장사(左長史) 한수(韓壽)가 우리 장수 아불화도가(阿佛和度加)의 머리를 베니, 여러 군사들이 승기를 타고 마침내 환도로 들어왔다. 왕은 말 한 필을 몰고 도망쳐 단웅곡(斷熊谷)으로 들어갔다. 장군 모여니(慕輿)가 쫓아와 왕모(王母) 주(周)씨와 왕비를 사로잡아 돌아갔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12년(342)

 

고구려 장수 아불화도가의 목이 연의 좌장사 한수의 칼에 떨어지고,

동천왕 때에 이어 또다시 수도 환도성이 무너지던 그 날.

사유왕이 할수 있는 일이라고는 겨우 말 한 필에 의지해 도망쳐 숨는것 뿐이었다.

수도와 백성, 왕궁에 있던 어머니와 부인마저도 모두 적의 손에 내어주고서.

《한원》에서는 《십육국춘추》전연록을 인용해

 

[燕主慕容晃九年, 晃伐句驪, 乘勝長駈, 遂入丸都. 句驪王劉, 單馬奔竄, 竄乃掘其父墓, 載其尸幷世妻珍寶, 掠男女五萬餘口, 焚其宮室, 毀丸都而歸. 乃不耐城也.]
연주(燕主) 모용황(慕容晃) 9년에 
황이 구려를 정벌하여, 장구(長駈)에서 승세를 타고 마침내 환도로 들어갔다. 구려왕 유(劉)는 말 한 필에 의지해 도망쳐 숨어버리니, 이에 그 아비 무덤을 파헤쳐 시신과 그 아내, 진기한 보물과 남녀 5만여 구(口)를 약탈하고 그 궁실(宮室)을 불살라버린 뒤에야 환도에서 돌아왔다. 이에 불내성(不耐城)이라 하였다.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전연록(前燕錄) 인용

《한원(翰苑)》번이부 고려

 

라고 적었다. 《한원》의 원문에서 오자를 수정해 올려봤는데 여기 이 부분은

그래도 원문 안에서 오자가 좀 적은 편에 속한다. 당장 위에서

'황이 구려를 정벌했다[晃伐句麗]'에서 벌(伐)을 정작 《한원》원문에서는

대(代)로 적는가 하면, '마침내 환도로 들어갔다[遂入丸都]'는 말도

환도(丸都)를 구도(九都)로 적었다.(《삼국유사》에 인용된 《속고승전》에도

이런 오자가 있다.) 불내성이라는 이름은 앞에서 '펴라'를 한자로 적은 것이라고

했는데, '펴라'라는 발음을 한자로 옮긴 수많은 표기 가운데서 중국 기록이

유독 불내(不耐)라는 말을 택한 것은 고구려에 대한 모독이다.

 

한자로 우리말 지명을 표기하는 방법도 어떤 글자를 채택하느냐에 따라

뉘앙스가 달라졌던 모양이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역사에 따라 위치가 달랐던

패수라는 강은 표기가 '浿水'와 '沛水'의 두 가지가 있는데 둘 중 하나는

고구려의 패수이고 다른 하나는 백제의 패수인데 분별을 못 하겠다. 단순히

발음만 같으면 아무 글자나 갖다 쓰는게 아니라 나름의 원칙이 있었던 거다.

불내(不耐)라는 것도 발음상 '펴라'의 한자 차음표기지만, 그 쓰인 한자를 보면

아니 불에 견딜 내, '견뎌내지 못하다'라는 뜻으로 환도성의 함락을 가리켜

조롱하느라 저런 식의 한자를 빌렸던 것이라고 말이다. 수많은 한자 표기 가운데

중국 사람들이 아무 거나 골라잡았다는 뜻.

 

[會, 王等戰於北道, 皆敗沒. 由是, 不復窮追. 遣使招王, 王不出. 將還, 韓壽曰 “高句麗之地, 不可戍守, 今其主亡民散, 潛伏山谷, 大軍旣去, 必復鳩聚, 收其餘燼, 猶足爲患. 請載其父尸, 囚其生母而歸. 俟其束身自歸, 然後返之, 撫以恩信, 策之上也.” 從之, 發美川王墓, 載其尸, 收其府庫累世之寶, 虜男女五萬餘口, 燒其宮室, 毁丸都城而還.]

마침 왕우 등이 북도에서 싸우다 모두 패해 죽었다. 때문에 (모용)황이 다시 끝까지 쫓지 못했다. 사신을 보내 왕을 불렀으나 왕은 나가지 않았다. 황이 돌아가려는데 한수가 말하였다.

“고구려 땅은 지킬 수 없습니다. 지금 그 왕이 도망치고 백성이 흩어져 산골짜기에 숨어있으나, 대군이 돌아가면 반드시 다시 모여들어 남은 무리를 모아 오히려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 아비의 시신을 싣고, 그의 친어미를 잡아가십시다. 그가 스스로 몸을 묶어 항복해 오기를 기다려 그 후에 돌려주고 은덕과 신뢰로 어루만지는 것이 상책입니다.”

황은 그 말을 좇아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그 시신을 싣고, 창고 안의 여러 대의 보물을 거두고, 남녀 5만여 명을 사로잡고 그 궁실을 불지르고, 환도성을 허물고 돌아갔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고국원왕 12년(342)

 

고구려의 확실한 패배였다.

수도가 파괴되고 백성이 끌려가기만 한 것이 아니라,

국고 안에 있던 많은 보물을 잃고, 선왕의 시신과 대후(大后), 왕비마저도 연에 빼앗겼다.

 

백성들이 흩어져 산골짜기에 흩어져 있다는 것은 고구려의 저항세력,

즉 아직 고구려의 군사력이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연을 압박하고 있다는 의미다.

산골짜기의 험준한 능성이를 따라 성을 쌓아 계곡물을 식수로 마시는 것이 고구려의 성이다.

비록 허점인 남쪽 길을 노려서 고구려를 치기는 했지만,

왕제 무가 이끄는 고구려의 주력 부대 5만은 모두 평탄한 북쪽 길에 건재하고 있고,

그 주력 부대에게 연의 장수 왕우를 비롯한 1만 5천 명이 모두 전멸당한 상태다.

고구려의 수도를 함락시켰지만 아직 국왕인 사유왕도 사로잡지 못했고,

저항세력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군사를 돌렸다가 만약 저들이 반격이라도 해오면,

연의 군대가 온전히 돌아갈수 있다는 보장은 하지 못할 것이고,

그들을 모두 잡기에는 고구려의 주력군이 공격해올까 무섭고.

 

그래서 무사히 돌아갈 방책과 고구려가 반격하지 못하게 만들 방법을 함께 절충한 것이,

사유왕의 아버지이자 선왕인 미천왕의 재궁(관)을 파서 인질 비슷하게 삼는 것이었으리라.

선왕의 시신과 왕의 어머니, 그리고 그 부인을 인질로 잡고 있는 상황에서

저들이 무슨 해를 끼칠까봐 고구려군도 감히 손을 쓰지 못할 것이라고 계산한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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