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64239

노량에서 독전한 송희립 장군을 아십니까?
이순신 장군 도와 명량해전 승리로 이끌기도
05.06.26 11:26 l 최종 업데이트 05.06.26 13:46 l 김성철(화룡정점)

KBS 1TV 사극 <불멸의 이순신>을 계기로 당시 활약했던 인물들을 폄하하거나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 왜곡된 부분을 바로 잡기 위해 정걸 장군에 이어 이번에는 송희립 장군을 재조명해 본다.... 글쓴이 주 [편집자말]


▲ <제동서원지>에 기록된 이순신과 송희립 두 문중과의 관계 ⓒ 김성철
 
송간(宋侃)은 1455년 왕명으로 호남지방을 순시하던 중 세조에 의해 단종이 영월로 쫒겨 갔다는 소식을 듣고 전남 고흥군 동강면 마륜리에 은거하다가 생을 마감한다.

그 후손들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는 이 지역에 남아 왜군과 맞서 싸우다가 50여명이 전사했으며, 그 후손들 중에 송대립, 송희립, 송정립 3형제는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들이다.


▲ 송희립 장군 등을 배향하는 제동서원 ⓒ 김성철
 
송희립 장군의 출생과 약력

송희립(宋希立) 장군은 1553년 동강면 마륜리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여산(礖山), 자는 신중(信中), 호는 삼규당(三規堂)이며, 충강공 송간(宋侃)의 6대 직계손이다. 1583년에 무과에 등제하여 지도만호, 양산군수, 다대포첨사, 경상우후 등을 지냈으며, 1591년 이순신 장군의 직속군관이 되었다.

임진전란 전까지는 나대용, 정걸 장군 등과 함께 거북선 건조교육과 감독을 맡다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기간 동안에는 이순신 장군의 핵심참모로서 뛰어난 지략과 용맹성을 떨친다.

그는 여러 해전에서 왜군들과 싸워 많은 공을 세웠으며, 노량해전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자 선상에서 그 지휘권을 인계받아 독전(督戰)하는 등 그 공훈을 인정 받아 선무원종 일등공신에 올랐으며, 1611년(광해4년) 전라좌수군절도사로 임명된다.

그의 활약상은 <조선왕조실록> <난중일기> <장계> <임란기사> <선조중흥지> <충무공행록> <은봉야사별록> <백사(이항복)제장사론> <옥포파위병장> <당포파위병장> <충민사기> <은곡실기> <연려실기술> <호남절의록> 등 각종 문헌에 수록되어 있다.


▲ 여산 송씨 문중 어르신들이 모여 송희립 장군을 설명 ⓒ 김성철
 
임진왜란 때 경상도해역 출전을 주장

1592년(선조25년) 4월 13일 저녁,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제1진(1만8700명)이 부산 영도로 침입해서 사흘만에 부산진성에 이어 동래성, 양산성 등을 차례로 함락 시킨다.

이때 부산해역을 지키던 경상좌수사 박홍은 전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전선(戰船)과 전구(戰具)를 모두 침몰 시켜 도망가기에 급급했다. 경상우수사 원균 장군은 왜군과 대적할 수 없는 형세라고 판단하여 경상우수군 1만여 명을 모두 해산 시키고 70여척 중 4척의 전선(戰船)만 남긴 채, 제장(諸將)들과 함께 남해현으로 피신한다.

왜군들이 부산으로 침략하자 바다를 지키는 수군들이 모두 도주했다는 사실들이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왜병들이 바다를 건너오자 경상우수사 원균은 적세(敵勢)를 알지 못해 전함을 다 버리고 수군 만 여명이 흩어져 버렸다. 그중 옥포만호 이운룡과 영등포만호 우치적의 군사가 남해현 앞바다에 머물러 적을 피해 육지로 간 군사들을 규합하러 나섰다"고 기록했다.

적과 싸우지 않고 도망가는 상황이 벌어지자 옥포만호 이운룡이 원균에게 항거하기를 "국가의 중대사를 수임했으니 의당 죽음으로써 지켜야 하거늘 이곳이 영호남의 인후(咽喉)와 같은 곳인데 이곳을 잃는다면 양호(兩湖)가 위험하다"면서 "이제 우리가 흩어진다면 어찌 다시 모여질 것이며 호남의 수군에 원군을 청한다면 구원해 줄 것으로 믿는다"고 주장한다.

이를 계기로 경상우수사 원균은 이순신에게 율포만호 이영남을 직접 보내 출병 청원을 했다. 이 때 이순신은 전라좌수군에 속한 제장들을 불러 모아 작전회의를 열었지만 대부분 의견들이 "우리 고장(전라도)을 지키기에도 힘이 부족한데 어찌 남을 도와줄 수 있겠냐"며 경상도 해역 출정 반대 의견을 내 놓는다.

이때 송희립 장군이 나서서 경상도로 출정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기를 "녹도 만호 정운과 군관 송희립 만은 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적을 토벌하는 데는 우리 도와 남의 도가 따로 없다. 적의 예봉을 먼저 꺾어 놓으면 본도도 보전할 수 있다'고 말하니 이순신이 크게 기뻐하였다"고 기록했다.

옥포해전과 당포해전에 참전하여 대승

송희립 장군의 주장대로 경상우수군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이고, 정걸 장군에게 자문을 구해, 5월 4일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군 함대(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를 이끌고 여수 본영을 출발한다. 남해에서 원균을 만나 왜선의 동향을 파악한 후, 7일 거제도에 있는 옥포 포구에 정박하고 있는 왜선 50여척을 발견, 영호남연합함대가 게릴라작전을 펼쳐 첫 승리를 거둔다.

이날 옥포해전의 전투상황을 <선조중흥지>는 "진의 병선 40여척으로 출군하여 노량에서 원균과 회동하니 원균은 기뻐서 눈물을 흘리며 사례한다. 옥포에 도착하니 왜적들은 전선에서 내려 포구에서 약탈을 자행하다가 아군을 발견하고 크게 놀라 서로 불러 전선을 타고 바다로 나온다. 이순신은 기선을 잡아 북을 치며 진격하여 크게 쳐부수었다. 적은 낭패하여 육지로 흩어져 올라가고 왜장은 갑옷과 투구를 벗어던지고 도망쳤다. 적선 30척을 불살라 버리니 그 화염이 하늘을 찌른다"고 기록했다.

이날 싸움에서 이순신 장군은 어깨에 조총 탄을 맞고 피를 흘리며 쓰러지자 곁에 있던 송희립 장군과 정운 장군이 어깨에 박힌 총탄을 제거한 후, 죽음을 무릎 쓰고 싸워 대승을 거둔다.


▲ <불멸의 이순신>에 등장하는 송희립 장군의 모습 ⓒ KBS

옥포해전에서 많은 제장(諸將)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용감하게 싸운 사실들을 <선조중흥지>는 "권준, 어영담,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 흥양현감 배흥립, 옥포만호 이운룡, 군관 송희립 등 모두가 충용선전(忠勇善戰)하였다"고 기록했다. 또한 이순신이 올린 <옥포파위병장>문헌에는 "사도첨사 김완이 대선 1척, 방답첨사 이순신(李純信) 대선 1척, 광양현감 어영담 대선 1척, 이응화 소선 1척, 본의 군관 봉사 변존서, 송희립, 김효성, 이첩 등이 함께 활을 쏘아 대선 1척을 깨트려 불살라 버렸다"고 기록했다.

옥포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함대는 6월 2일 통영방향으로 기선을 돌려 당포에 도착, 포구에 정박해 있던 왜선들을 향해 송희립 장군 및 여러 제장들이 이번에도 게릴라전법으로 왜선 21척을 격침 시킨다. 이순신 장군은 <당포파왜병장>을 통해 "송희립 등 여러 제장들이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분발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힘써 싸우니 모든 군사와 관리들도 앞을 다투어 왜적과 싸웠다. 이들의 논공을 적어 올리니 상을 내려 줄 것"을 보고했다.


▲ 이순신에게 보낸 장계 ⓒ 김성철
 
남은 12척으로 명량해전에서 대승

1597년 7월 왜군들은 명나라와 화의가 결렬되자 이번에도 부산을 공략한 다음, 전라좌수군이 있는 여수 본영과 1관4포가 있는 고흥반도로 재차 침입하여 바다와 육지가 초토화된다. 7년 전쟁 동안 백성들이 겪은 고통과 참상이 어떠했는지 <난중집록>을 보면 "굶어 죽은 송장이 길에 널렸다. 한 사람이 쓰러지면 백성들이 덤벼들어 그 살을 뜯어 먹었다. 뜯어 먹은 자들도 머지않아 죽었다"고 기록했다.

1597년 7월 16일 삼도 수군통제사로 있던 원균 장군이 왜선 600여척과 맞서 싸우기 위해 부산 칠천량 방향으로 함대(판옥선 100여 척, 거북선 5척)를 이끌고 가다가 기습을 당해 칠천량해전에서 전사함으로써 남해안은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고, 수군들은 모두 전의를 상실하고 패주한다.

이 무렵 이순신 장군은 "조정을 속이고 임금을 없이 여긴 죄를 범했다"하여 사형 선고를 받고 옥에 갇혀 있었는데 정탁, 정경달, 송희립 등이 상소하여 간신히 목숨을 구해 다시 백의종군 한다. 그리고 1597년 7월 23일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되어, 장흥 회녕포에서 경상수사 배설로부터 12척을 인수 받아 지휘권을 획득한다. 


▲ 송희립 장군 고택에서 발견된 군도 ⓒ 김성철
 
한편 송희립 장군의 친형 송대립 장군은 정유재란 때 백의종군하는 이순신 장군을 수행하며 수군 재건 사업을 돕고 육지에서는 의병을 일으켜 왜군들과 맞서 싸우다가 군사요충지로 알려진 고흥 첨산전투에서 중과부적으로 전사한다.

1597년 9월 16일 이순신 장군은 칠량해전에서 패하고 남은 12척의 전선(戰船)을 지휘하며 진영을 진도 벽파진, 해남 우수영, 완도 고금도 등으로 옮겨 다니면서 명량해역 부근에 이르러 아군 12척과 왜선 133척이 서로 피할 수 없는 명량해전이 벌어진다.

이 긴박한 상황에서 이순신 장군은 한 치의 물러섬 없이 "필사즉생(必死則生) 필생즉사(必生則死)"를 외치자 송희립, 송정립 형제들과 제장들이 모두 혼연일체가 되어 왜선 33척을 격침시키는 등 왜군들의 기세를 완전 꺾어 버렸다.

노량해전을 대비해서 육해 봉쇄작전 돌입

1598년 11월 이 무렵 왜장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갑자기 병사하자 왜군들이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나라 진린에게 화친을 청하면서 남해안에 있는 모든 퇴로를 열어 줄 것을 제의하여 그 약속을 받아 냈으나, 이순신, 송희립 장군 등이 이를 끝까지 거절한다. 이후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일본으로 퇴각하기 앞서 사천에 있는 시마쓰 요시히로(島津義弘)와 남해에 있는 시라노부(宗調信)에게 왜선 500여 척을 모두 노량 앞바다에 집결하도록 요청한 사실이 알려진다.


▲ 제동서원에 있는 송희립 장군 유물전시관을 돌아보며 ⓒ 김성철 
 
이때 이순신 장군은 고흥 나로도에 머물면서 군관 송희립 장군에게 노량해역에 왜선들로 진을 치고 있는 그곳에서 승리할 수 있는 계책을 묻자 "적이 이미 거점(노량)을 형성하고 있으니 힘으로 취하기는 어려움이 많으니 이제 명군과 아군이 수륙으로 연대하여 만약 육군이 예교(曳橋)를 압박한다면 수군은 장도(獐島)에 거점하여 영남의 해로를 막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적들은 내외로 막히고 허리 부분 역할을 못해 사천의 적은 반드시 돕지를 못할 것이며 서로 돕고자 하여도 피차간 호령이 통하지 않아 상응할 수 없게 되면 그 군사들은 군량이 고갈되고 그 군세가 좌절되어 사면이 고립되면 고니시 유키나가는 살 수 없을 것이다"고 말하자 이순신이 크게 기뻐했다는 내용들이 <선조중흥> <노량기사> 등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송희립 장군의 계책대로 육지와 바다에서 몇 개월 동안 봉쇄 작전을 펼치자 왜군들의 세력은 급격히 저하되어 명나라 진린 제독에게 화친을 청해 온다. 이때 송희립 장군이 나서서 "그들이 전령을 보내는 것은 각군에 구원을 청하여 전쟁일자를 약속한 것이니 마지막에 가서는 틀림없이 공격할 것이다. 이곳은 복배(腹背)와 같은 곳이라 적의 공격을 받으면 아군은 패하게 됨으로 큰 바다로 옮겨 싸우는 것보다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자 독전


▲ 송영섭(86)옹이 송희립 장군과 관련된 자료를 설명하고 있다. ⓒ 김성철

1598년 11월 18일 밤 10시쯤 조선 해군은 야음을 틈타 조명연합함대 146척을 앞세워 선제공격에 나선다. 남해 관음포 앞 바다에 이르러 왜선 500여 척과 교전하다가 명나라 전선이 갑자기 집중포위를 당해 여기에 탑승해 있던 명나라 진린 제독이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 때 이순신과 송희립 장군 등이 왜군들의 집중포화를 뚫고 구출하는 과정에서 적들에게 노출되어 그 위치에 있던 송희립 장군은 중상을 당하고 이순신 장군은 다음날 새벽 2시경에 전사했다. 그 밖에 이영남, 박덕룡, 고득장, 이언량 등이 전사했다.

이날 노량해전에 대해 <은봉야사별록>은 "송희립은 선상에서 장사들과 함께 사력을 다해서 활을 쏘아 무수히 적을 죽였다. 적선은 흐터졌다 모였다를 반복하며 송희립이 있는 곳을 알고 일제히 집중사격을 가했다. 총탄이 갑옷을 입고 있는 위 부근에 빗맞아 이마에 맞고 기절하여 쓰러지자 좌우 군사들이 이순신에게 송희립이 총탄에 맞았다고 말한 순간에 크게 놀라 일어서다가 총탄에 옆구리를 맞았다"기록했다

이어 "선상의 병사들이 크게 놀라며 이순신 장군이 총탄에 맞았다고 말하자 기절해 있던 송희립이 이 말을 듣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다행히도 이마 뼈만 상하였을 뿐 뇌는 다치지 않았다. 다시 힘을 가다듬어 얼굴과 옷깃에 묻은 선혈들을 닦아내고 옷을 찢어 이마를 싸매고 상장좌(上將座)에 오르니 이순신은 이미 전사했고 아들 회가 울음을 터뜨렸다"고 전했다.

이분(李芬)의 저서 <충무공행장>(춘원 이광수 역)에는 "이순신이 한참 독전하다가 문득 지나가는 탄환에 맞았다. 싸움이 한창 진행 중이다. 내가 죽었단 말을 남에게 하지 말라. 이순신은 이 말을 마지막으로 하고 전사했다. 그리고는 시신을 안고 방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이순신을 모시고 있던 노비 김이와 희와 완, 세 사람만이 알았을 뿐 친하게 믿었던 부하 송희립 등도 알지 못했다 기를 들어 독전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노량해전의 전공은 모두 이순신이 힘써 이룬 것으로 불행히 총탄을 맞게 되어 군관 송희립 등 30여명이 상인(喪人·아들과 조카)의 입을 막아 곡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고 군사를 재촉하여 살아 있을 때와 똑같이 영각을 불어 모든 배가 이순신의 죽음을 알지 못하게 함으로써 승리할 수 있었다"고 기록되었다.

또한 <은봉야사별록>을 보면 "송희립이 영장(令將) 몇 사람으로 하여금 입을 막아 울음을 그치게 하고 이순신의 갑위를 벗기고 홍모로 시신을 싸고 다시 초둔(草芚)으로 덮은 후에 이순신의 갑위를 입고 둔상에 앉아 이순신을 대신하여 기와 북채를 잡고 더욱 급하게 독전(督戰)을 하니 적은 대패하다"고 기록했다.

호국정신의 얼을 기려


▲ 상무대에 세워진 송희립 장군 동상 ⓒ 김성철 

송희립 장군의 호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제동서원, 충무사, 무광사 등에서 배향하고 있다. 또 육군에서는 광주 상무대(육군포병학교 장성으로 이전)에다가 이순신, 송희립, 정운 장군의 동상 세워 투철한 군인 정신을 함양하고 있다.

그러나 송희립 장군의 12대 직계손인 송영섭(86)옹은 요즈음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KBS 1TV 사극 <불멸의 이순신>을 보면서 "우리 자손들이 미약해서, 우리 선대 할아버지(송희립)가 나와야 할 때 안 나와서 속상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어 <제동서원지> 고서를 보여주며 "1801년에 이 충무공 직계손인 이인수가 통제사로 있으면서 수사공(송희립)이 제동서원에 배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제기 1벌과 잔대 3벌을 보냈다"면서 "그 집안과 우리 집안은 아직도 400년간 그 인연이 이어져 오고 있다"고 말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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