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onam.co.kr/read.php3?aid=1274886000332736141

전라좌수사 이순신, 옥포 해전에 첫 승리를 하다 (하)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2부 - 임진왜란과 호남 사람들 8 
여수 진남관
입력시간 : 2010. 05.27. 00:00

여수 충민사는 이순신 장군의 신위를 모신 최초의 사당이다.

풍전등화 조선에 희망의 불씨 살리다
왜선 26척 괘멸 자신감 회복 잇따라 승전보
탁월한 전술에 수군의 단합된 힘 승리견인

이순신 함대는 5월4일 새벽 2시에 여수를 출발하였다. 왜군 스파이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모든 사람이 잠 든 한 밤중에 작전을 개시하였다.

경상도 바다에 대한 물길 안내는 광양현감 어영담이 맡았다. 어영담은 무과에 급제하여 영호남의 여러 진을 두루 다녀 물길의 험하고 순탄한 것과 멀고 가까움을 마치 자기 집 안마당 드나들듯이 훤히 꿰뚫고 있었다.

이순신 함대는 하루 종일 항해하여 날이 저물 무렵 경상우도의 소비포 앞바다에 이르러 정박하고 첫 날 밤을 보냈다. 5월 5일 새벽, 이순신 함대는 경상우도 수군과 합류하기로 한 당포에 도착하였으나 경상우수사 원균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순신은 쾌속정으로 당포로 빨리 나오라고 독촉하였다.

다음날 오전 8시쯤에야 원균은 한산도 근처에서 배 한 척을 몰고 왔다. 이윽고 남해현령 기효근, 미조항 첨사 김승룡, 소비포권관 이영남, 영등포만호 우치적, 옥포만호 이운룡 등 경상우도 소속 장수들이 전선 4척과 협선 2척에 나누어 타고 합류하였다.

이로써 조선 수군의 전력은 판옥선 28척, 협선 17척, 포작선 46척 도합 91척이 되었다. 이 날 전라좌도와 경상우도 수군 장수들은 작전회의를 거듭하고 그 날 밤은 거제도 송미포 앞 바다에서 보냈다.

5월 7일 새벽, 조선 수군은 다시 출발하여 왜군의 배가 있다는 천성, 가덕도 쪽으로 향하다가 정오 경 옥포 앞바다에 이르렀다. 이 때 우척후장 사도첨사 김완과 좌척후장 여도권관 김인영 등이 신기전(神機箭 : 적이 있음을 알리는 화살로서 신호탄 역할을 함. 화살 끝에 편지 또는 불 주머니를 달아서 쏨)을 쏘아 올려 황급히 적선 발견을 보고했다.

이로써 전라좌수영을 떠나 온지 4일 만에 첫 해전이 시작되었다. 왜선의 규모는 30여척 이었고 왜군들은 육지에 올라 약탈에 여념이 없었다. 

이순신은 즉각 공격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첫 싸움이니 만큼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다. 1년 2개월간 전쟁 준비를 한 전라좌수군 이지만 실제 전투 경험은 전혀 없었다. 이순신은 전투에 앞서서 이렇게 명령했다.

"명령 없이 함부로 가볍게 움직이지 말라. 침착하게 태산같이 신중히 행동하라(물령망동 勿令妄動 정중여산 靜重如山).”

육지에 올라 노략질을 하던 왜군들은 조선 수군을 보자 겁도 없이 배에 올라 응전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적선 6척이 덤벼들었다. 조선 수군은 동쪽과 서쪽으로 나누어 포위해 들어갔으나 막상 왜적의 공격에 주춤거리었다. 왜군에 대한 공포심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러자 녹도만호 정운이 나서서 전의를 북돋우었다. 요란하게 북을 치며 적을 추격하였다. 나머지 배들도 앞 다투어 세차게 화포를 쏘고 화살을 퍼부었다. 왜군들은 조총으로 맞섰으나 전세는 이미 막강한 화력을 가진 조선수군 편으로 기울었다. 

이순신 함대는 이 해전에서 왜적의 배 26척을 격침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싸움이 바로 옥포해전이다. 옥포해전은 임진왜란 중 육전과 해전을 망라하여 조선군이 최초로 승리한 전투이다. 옥포는 지금의 경상남도 거제시 옥포동에 있는 해안이다. 

옥포해전에서 첫 승리를 거두자 조선 수군은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왜군에 대한 공포감도 사라졌다. 그래서 처음 승리란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5월7일 이순신 함대는 거제도의 북단에 위치한 영등포 앞바다로 이동하여 하룻밤을 새우려고 했다. 그런데 오후 4시경에 척후병으로부터 급보가 날라 왔다. 왜선 5척이 지나간다는 첩보였다. 이에 조선 수군은 곧바로 추격을 시작하여 지금의 진해시인 웅천 합포 바다에서 적의 배를 포착하였다. 왜군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올라가 조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이순신 함대는 사정거리 밖에서 정세를 살피다가, 배를 몰아 포구 안으로 들어가 일제히 급습했다. 이 전투에서 우척후장 김완, 중위장 이순신(李純信), 중부장 어영담 등이 일본군의 대형선 4척과 소형선 1척을 모두 불태워버리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두 번째 승리인 합포 해전이다. 

이튿날인 5월8일 새벽에 이순신은 지금의 진해시인 웅천 고리량에 왜군의 배들이 있다는 첩보를 받았다. 91척의 이순신 함대는 즉시 출발하여 주변을 수색하면서 돼지섬(저도 猪島)을 지나 적진포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왜군의 배 13척이 정박하여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들은 민가들을 습격하며 노략질을 하고 있었다. 조선수군은 도망가는 적을 추격하여 대선 9척과 중선 2척을 파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옥포·합포 해전 승리에 이은 세 번째 승리였다. 

이렇게 이순신 함대는 제1차 출전에서 3전 3승을 거두며 적선 42척을 격침시키고 왜군들을 사살하였다. 아군의 피해는 부상자 단 1명이었다. 

한편 해전을 마치고 아침식사를 하는 도중에 전라도사 최철견으로부터 선조 임금이 평안도로 피난을 갔다는 나쁜 소식을 접하였다. 이순신 함대는 서둘러 뱃머리를 돌려 전라좌수영 본영 여수로 출발하였다. 

5월 9일에 여수로 돌아온 이순신은 임금에게 올릴 장계를 썼다. 그는 '옥포파왜병장'이라고 이름 붙인 장계에 세 번 전투의 경과 및 같이 싸운 부하들의 전공, 인근 백성들의 동태와 앞으로 싸움의 방책을 상세하게 적었다. 그리고 5월 10일 부하 송한련과 김대수에게 선조 임금이 계시는 행재소로 가서 올리도록 하였다. 

선조 임금은 이 장계를 5월 23일 평양에서 읽었다. 선조는 크게 기뻐하였다. 그날의 선조실록 기록을 보자.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수군을 동원하여 타도까지 깊숙이 들어가 적선 40여척을 격파하고 왜적의 목을 베었으며 빼앗겼던 물건을 도로 찾은 것이 매우 많았다. 비변사에서 표창을 하자고 청하니, 임금이 품계를 올려 주라고 지시하였다.'

이리하여 이순신은 한 계급 승진하여 가선대부(종2품)가 된다. 

옥포해전은 임진왜란사중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해전이다. 해전과 육전을 통하여 조선군이 거둔 첫 승리라는 점에서 그렇기도 하지만, 이 해전으로 바람 앞의 촛불 같은 위기에 놓인 조선이 실낱같은 희망의 불씨를 살릴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더 큰 의미가 있다. 그리고 조선수군이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함과 동시에 왜군의 바닷길을 막음으로서 전라도가 온전하게 보전 될 수 있었다. 

후세에 전쟁사가들은 이순신 장군이 옥포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요인으로 왜군의 준비 부족 및 상대적 열세, 우수한 배 판옥선과 화력이 앞선 대포(총통), 이순신의 탁월한 지도력과 전술 등 3가지 요소를 꼽고 있다. 

먼저 당시의 왜군 상황을 보면 왜군은 조선 수군이 쳐들어 올 것이라는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인근 육지에서 노략질에 급급하였고 왜선들도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었다. 군함 숫자로 보아도 조선수군은 91척이었으나 왜군의 배는 옥포해전에서 30척, 합포는 5척, 적진포는 13척으로 왜군이 상당히 열세이었다. 

두 번째 조선수군의 승리 요소는 판옥선과 대포이다. 판옥선은 두꺼운 소나무 판자로 만든 배라는 의미로 백병전에 능한 왜적들이 쉽게 배에 오를 수 없도록 2층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1층에서는 노를 젓고 2층에서는 군사들이 대포와 활을 쏠 수 있었다.

또한 조선 수군의 주력무기는 대포(총통)였다. 대포는 사정거리가 500보 정도로서 그 위력이 대단하였다. 그런데 일본의 배는 얇은 나무로 만들어져서 속도는 빠르나 대포를 장착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더구나 왜군의 전술은 백병전인 만큼 조총이 주무기였다. 조총은 사정거리가 100보정도이어서 근접 전투에는 유효하였다. 

그래서 이순신은 해전에 근접 전투는 피하고 원거리에서 포격전으로 적을 격파한다는 작전을 구사한 것이다.

또한 이순신은 이번 전투를 위하여 적의 정세를 소상하게 파악하는 한편 군사들을 독려하여 신중하게 싸웠다. 이런 작전이 옥포해전을 승리로 이끈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옥포해전의 가장 큰 승전 요인은 전라좌도 수군들의 단합된 힘이다. 몸을 아끼지 않고 싸운 여수, 순천, 보성, 고흥, 광양 등 5관 5포 지역 수군들이 없었다면 쉽게 이기기 힘들었을 것이다. 

전라좌수영의 본영이 있는 여수 진남관은 국보 제304호로 기둥이 66개나 되는 우리나라 최대의 단층 목조건물이다. 남쪽을 진압하는 건물이란 의미의 진남관(鎭南館)을 자세히 풀이하면 남쪽의 왜적을 진압하여 백성을 평안하게 하는 공관이란 뜻이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진해루(鎭海樓)에서 공무를 보았다는 기록이 나오고 바다를 제압한다는 의미의 진해(鎭海)에 해군사령부가 있다. 또한 전라좌수영의 본영 여수는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2차 당포해전, 3차 한산도 해전, 4차 부산포 해전의 출발지이다. 

한편 경상남도 거제도의 옥포는 지금은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 등 우리나라 최고의 조선업체가 있는 곳이다. 임진왜란 때 국난 극복을 한 전승지 옥포는 이제 한국을 세계 1위의 조선강국으로 만든 조선소가 들어섰다.

김세곤(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