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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명량(鳴梁)’ 감상문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 격군(해사 이순신연구소,제장명 교수) 2014.08.11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 격군(해사 이순신연구소,제장명 교수) 2014.08.11
서언
영화 명량이 7월 30일 개봉되어 총 1159개 스크린에서 68만 3200명의 관객이 보았다. 이는 7월 23일 개봉한 ‘군도’의 55만 1073명의 기록을 넘었고, ‘광해 : 왕이 된 남자’ 역대 최고 평일 스코어 67만명을 넘어선 숫자이기도 하다. 이후 날이 갈수록 각종 신기록을 갈아치우더니 12일째 되던 날에는 최단 기간 천만 관객을 달성하였다. 영화 명량이 대중들에게 호평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크게 보아 2가지 이유 때문으로 풀이된다. 첫째는 일본과의 불편한 관계가 지속되고 있는 국제정세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를 크게 침략하여 괴롭혔던 일본이 최근 들어 독도영유권을 계속 주장하는 한편 일제강점기 때 저지른 군 위안부 문제도 왜곡하고 있으며, 유사시 한반도 군사개입을 거론하는 등 군사대국화를 기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이순신장군의 활약상을 그린 영화 명량은 국민들에게 현실의 울분을 토로하는 데 유용한 수단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둘째는 사회적 리더십이 부족한 국내 상황이 역사상 최고의 리더 이순신을 그리워한다는 점일 것이다. 이는 특히 올해 4월 16일에 있었던 세월호 침몰사건에서 보여준 선장의 리더십 실종에 대한 실망 때문에 400여 년 전의 이순신 리더십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승객들을 죽음의 현장에 남겨두고 홀로 빠져나온 선장의 행태는 온 국민을 격분시켰고 수개월간 대다수 국민들을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지게 하였다. 반면에 이순신은 부하들과 백성을 구하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선봉에 서서 그것도 절대열세의 상황에서 적을 물리친 도전과 희망의 리더십을 보여 주었다는 점이 국민들을 크게 감동시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국민적인 실망과 분노가 확고한 철학과 강한 추진력을 갖춘 리더십에 대한 갈증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전쟁이라는 혼란의 시대에 백성과 나라를 위해 목숨마저 내던졌던 이순신과 같은 리더십에 대한 사회적 갈증이 이순신의 재조명이라는 현상으로 분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개봉된 영화 명량은 큰 인기를 끌면서 극장가를 점령하고 있다. 그러면 영화를 감상한 후 소감은 어떨까? 언론 보도를 통해서 보면 많은 감상자들이 통쾌하고 재미있었다고 평가한다. 반면에 역사적 오류가 많았다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다. 반응이 엇갈리고 있는 것이다. 전자는 이순신에 대한 사전 지식이 별로 없이 막연한 지식을 가진 가운데 그냥 영화로서의 의미만 부여한 사람들이다. 특히 영화에서 절반 이상이 전투장면인 만큼 무더운 여름에 가슴이 시원해짐을 느꼈을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이순신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관객들일 것이다. 특히 명량해전은 워낙 유명한 해전이기에 그동안 많은 연구와 함께 논란점도 많았다. 최근 들어서는 이 해전에 대해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혀졌기에 대중들의 해전 이해 수준이 상당히 높아졌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역사적 실존 인물을 다룬 영화의 경우에는 흥미와 학습효과를 동시에 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국민들에게 역사적 영웅에 대해 제대로 배우게 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상업영화니까 당연히 허구가 가미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영화나 드라마를 본 국민들은 허구로 보지 않고 역사적 사실로 인식하는 경향이 크다는 것이 우려되는 점이다. 따라서 극의 전개에 장해가 없다면 가급적 사실적 묘사를 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본다. 분위기에 편승하여 한 번 보긴 했지만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영화가 아니라 두고두고 보고 싶은 명화가 되기를 희망한다.
최근 명량 영화를 감상한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다고 하는 부분에 대한 공통적인 견해는 주로 전투 장면에 집중되고 있는데 다음의 3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가장 통쾌한 장면으로 이순신이 백병전을 벌여 왜군 장수의 목을 베는 순간 전율을 느꼈다고 한다. 둘째, 명량수로의 회오리가 있는 부분에 적선을 유인하여 백병전을 준비하라고 하는 이순신의 모습에서 뛰어난 전략가의 위상을 느꼈다고 한다. 셋째, 조선 수군 10여 척의 판옥선이 충파전술로 일본 군선들을 신나게 격침시키는 모습에서 가슴 후련한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장면들이 당대 조선 수군과 이순신이 사용한 전술이 맞다면 더 이상 멋진 영화도 없을 만큼 훌륭한 작품성을 인정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3가지 경우 모두 왜곡된 것이라면 이는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영화를 통해 학습 효과를 제고하고 있는 사회적 추세에서 기존 정확한 역사 교육은 거꾸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이번 영화를 보고 몇 가지 아쉬웠던 점을 피력해 보고자 한다. 다시 말해 역사적 사실과 달랐던 부분들을 정리하여 영화를 통해 알지 못한 부분을 학습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아울러 영화제작자들도 향후 관련 영화제작 시 참고가 될 수 있길 바라마지 않는다. 잠수에서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 좀 더 심도 있는 감상후기가 되지 못하는 점 이해 바랍니다.
가장 큰 오류는 조선 수군의 전술 부분이다.
영화의 중간쯤 전투 장면이 시작될 때 이순신이 탄 대장선이 홀로 몇 시간을 버틴다. 그런데 이때 이순신이 사용한 전술은 백병전이다. 그것도 어쩔 수 없이 백병전을 펼친 게 아니라 이순신 스스로 백병전을 준비하도록 명령한 후 실행한다. 그리고 4척의 일본군선이 4면으로 포위한 채 일본 군사들이 등선하여 상호 백병전을 벌인다. 그리고 조선 수군은 백병전을 통해 적을 물리치고 결국 적장의 목을 베게 된다.
이 장면은 필자가 가장 안타깝게 여긴 부분이다. 당시 이순신이 지휘한 해전에서는 등선백병전을 사용한 적이 없다. 조선 수군은 사정거리 1km이상의 화포를 원거리에서 발사한 후 근접하여 활을 쏘아 적을 무력화시킨 후 분멸시키는 전술을 체계적으로 구사했다. 반면에 유효사거리 50m에 불과한 조총과 도검류로 무장한 일본군은 조선 수군을 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화포의 우수성은 이순신이 수십 회의 해전을 승리로 이끈 원동력으로 작용한 것이다.
백병전은 바로 일본군의 장기(長技)이다. 일본 수군은 전통적으로 해적질을 통해 전술을 연마했는데 적선을 탈취하기 위해 배 위로 올라가서 도검류로 싸워서 승리를 거두었다. 임진왜란 때도 일본은 이 전술을 주로 사용했다. 정유재란 초기 통제사 원균이 지휘한 기문포해전(1597. 3. 9) 시 조선 수군은 일본군선을 우습게 보고 백병전을 벌이다가 고성현령 조응도가 사망하고 군사 10여 명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입은 채 배를 탈취당한 적이 있다. 그러다가 빼앗긴 우리 전선을 화포로 공격해서 겨우 되찾은 적이 있다.
칠천량해전에서도 조선 수군이 패한 핵심 요인은 조선의 군선들이 흩어져 도망하다가 적에게 등선을 허용하여 백병전을 벌인 데 있다. 백병전은 일본군의 전술이니 활쏘기가 근접전술인 우리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으며 더욱이 우리는 수적으로도 열세였다. 이순신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기에 적으로부터 4면 포위를 당하지 않기 위한 전투 장소로 택한 곳이 바로 명량수로인 것이다.
명량수로는 조류가 빠르게 흐르는 곳인 만큼 적이 전(全) 방위로 조선 전선을 포위할 수 없다. 실제 명량해전 시 일본 군선들이 앞에서는 포위가 가능했지만 측면이나 후면에서는 포위할 수 없었다. 조류가 빠르게 흐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선 수군은 일본군을 유인하여 백병전을 스스로 벌여서 일본군을 물리치고 있다. 그것도 2번씩이나 펼쳐서 다 승리한다. 조선 수군이 칼싸움을 잘하여 적을 이기는 장면은 통쾌하나 사실과 다르니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다음으로 일본군이 화선(火船)을 이용하여 조선 수군을 공격하고 있다. 화선은 이순신이 가끔 사용한 전술이다. 배 안에 화약을 넣고 섶으로 덮은 후 조류 따라 적진으로 보낸 후 적진 가까이에 갔을 때 불화살을 쏘아 화약을 폭발시켜서 적에게 피해를 입히는 전술이다. 이순신은 웅포해전 때 화선을 이용하여 적을 공격하려고 하다가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중단한 적이 있다. 명량해전 때 이순신이 사용한 전술 중 화선을 이용한 적이 있다. 이를테면 오전에는 조류가 북서쪽으로 흘러서 일본군에게 유리했지만 오후 1시경부터는 썰물, 즉 남동류가 흘러서 조선 수군에게 유리하였다. 그런데 이때 조선 수군은 조류 따라 떠내려가는 일본군을 따라가지 않았다. 따라갈 경우 일본군의 주력 군선들을 명량수로 입구에서 만날 수 있고 조류가 북서류로 흐르지 않는 한 돌아오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때 이순신은 어떻게 했는가? 바로 화선을 이용하여 적을 공격하였다. 화선을 띄워 보내서 적선 가까이 도착했을 때 불화살을 쏘아 화약에 불을 붙여서 그 폭발력으로 파손되는 선체 파편의 충격으로 적선을 깨트리는 데 효과를 본 것이다. 그러나 이때 배 안에는 노를 젓는 격군들은 없었다. 조류가 빠르니 놓아두면 자연스럽게 적진 속으로 떠내려가기 때문이다. 더욱이 당시에는 북서풍이 많이 불어서 화선 공격이 원활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화선을 이용한 공격을 일본 수군이 사용하고 있다. 일본군이 어느 세월에 그런 준비를 해 와서 화선을 이용한 공격을 할 수 있었을까? 왜 이순신이 사용한 다양한 전술 중 하나를 왜군이 사용하는 것으로 꼭 묘사해야 했을까?
한편으로 전투 초기에 일본군의 조총에서 쏜 총탄이 조선 수군의 초요기를 훼손하는 장면이 보인다. 그리고 일본군의 조총이 조선 수군의 방패판을 뚫으면서 조선 수군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일본군의 조총 공격이 시작되었는데 우리의 화포공격은 없었다. 그리고 조총이 먼 거리에서 날아와 조선 수군에게 피해를 입혔다. 조총의 사거리가 우리의 화포보다 멀리 날아가고 있다. 그러면 조선 수군의 우수한 화포는 적이 근접해 왔을 때만 사용하는 것인가? 당시의 전술 구사체계에 대한 개념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런 설정이 있었던 게 아닌가?
이순신의 대장선이 홀로 대부분의 전투를 수행한 후 마지막 부분에 조선 수군의 12척 전선이 대장선 곁에 합류하여 전투 마무리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난중일기에 이순신 대장선이 상당 시간 동안 홀로 버틴 것은 사실이지만 전세를 완전히 혼자서 뒤집은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 버티다가 부하들을 불러서 함께 치열한 전투를 수행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순신 대장선이 거의 모든 전투를 하고 부하들은 마무리하는 정도에 그친다. 이순신이 지휘도 하고 활도 쏘고 칼도 사용한다. 통제사라는 위치는 전체 전황을 조율하면서 적시에 전술을 지시하도록 하는 데 있다. 여기서는 대장선 1척이 모든 것을 다 수행하고 이순신 혼자서 모든 것을 다한다. 이런 설정은 맞지 않고 우리 사회의 발전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과거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이제는 모든 일을 개인이 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이 하도록 해야 한다.
아울러 조선 수군이 선체로 전선을 박치기 하는 충파전술을 사용한다. 우리 배는 적선을 충격하면 적선만 깨지고 있고 우리 배는 유유히 다음 배를 향하여 충파를 하고 있다. 참으로 통쾌한 장면이다. 그렇게만 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전에 선체로 선체를 부딪치는 전술을 당파라고 했고 그러한 전술이 조선 수군의 전술인 것처럼 인식된 적이 있다. 그러다가 연구 결과 그것이 아니라 화포에 의한 적선 당파가 핵심이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기존 잘못된 인식을 전환시키기 위해 뛰어난 강의능력을 갖춘 전문가 한 분이 게거품을 물고 대국민 강의를 한 적이 있는데 이번 영화를 통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명량해전 때 조선 수군이 선체로 충파 전술을 사용하여 이긴 것으로 이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 제도적 오류
다음으로 아쉬운 부분은 당시 수군 제도적 오류이다. 먼저 조선 수군의 장졸들이 모두 갑옷을 입고 전투에 임하고 있다. 당시 갑옷은 일부 상급 지휘관이 입었을 뿐이지 일반 수군들은 갑옷을 준비하지 못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6년이 지난 시점인 1604년 6월에 통영 당포에서 벌어졌던 당포해전을 그린 ‘당포전양승첩지도’와 노량해전 시 중국 화가가 그린 ‘정왜기공도권’을 보면 갑옷을 입고 있는 군사는 배 1척에 1~2명에 불과하다. 나머지 기수(旗手)·사부(射夫)·격군(格軍) 등 일반 수졸들은 모두 납의(衲衣)를 입고 머리에는 전립(戰笠) 또는 조건(皁巾)을 쓰고 허리에 대(帶)를 두르고 있다. 납의는 소매통이 좁고 소매길이가 손목까지 오며, 옷 길이가 무릎정도에 이르는 간소한 형태의 포로서, 중국 진대에 일반 전사들이 군복으로 입었던 장유(長襦) 형태의 포와 비슷하다. 이는 군사들이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스스로 갑옷을 준비하지 못했거나 국가적인 차원에서 이를 충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조선 수군은 백병전을 위한 군이 아니었기 때문에 갑옷을 입을 필요가 없었으며, 명량해전 당시는 군수물자의 확보 수준이 굉장히 열악했기 때문에 준비할 여력도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아마도 추정컨대 ‘명량해전도’라고 명명된 정체불명의 기록화를 보니 전부 갑옷을 입고 있어서 그대로 모방한 것 같다.
다음으로 당시 참전했던 인물들의 활약상을 사료에 맞게 그려야함에도 전혀 다르게 설정하였다는 점이다. 이순신 휘하에서 감조군관의 임무를 수행한 나대용을 도원수 권율에게 보내 병력 지원을 요청하게 한 것은 사료에 나오지는 않지만 작가의 상상력으로 충분히 설정이 가능하다. 이런 것들은 지적사항이 아니다. 그렇지만 본인의 행적이 사료에 뚜렷하게 나오는 인물의 경우에는 가급적 사료에 충실해야 한다.
예컨대 경상우수사 배설의 행위에 대해서는 너무 비약적으로 그렸다. 배설은 칠천량해전에서 먼저 도망쳐 나와 관하 12척으로 서진하다가 8월 19일 회령포에서 통제사 이순신에게 전선을 인계한 후 이순신 휘하에서 경상우수사의 직책을 수행하였다. 그러다가 칠천량해전에서 패배한 기억 때문인지는 몰라도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난중일기에 보이고 있다. 그 후 병을 핑계로 육지에 올랐다가 결국 9월 2일에 도망치고 말았다. 종전 후 1599년에 고향 선산에서 도원수 권율에게 붙잡힌 후 참형을 당한 인물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거북선을 불태우고 이순신을 암살하려다가 발각되어 부상을 입은 채 도망가는 장면이 나온다. 거북선이 존재한 것도 사실과 다르지만 이순신을 암살하려고 하는 태도는 더욱 사실과 다른 것이다.
이순신 휘하에서 적정을 살피는 역할을 수행한 임준영의 경우도 아쉬웠다. 임준영은 명량해전 직전 적의 동태를 살피는 망장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후 명량해전 후에도 유사 임무를 수행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적에게 잡힌 후 적이 운용하는 화선에 태워져 화약의 폭발에 의해 사망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렇게 전사한 인물이 아닌데 역사적 인물의 생사를 왜곡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한편 일본수군 장수가 붓글씨로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는 한자숙어를 능숙하게 쓰고 있다. 일본 장수들은 대부분 글을 몰랐고 겨우 측근의 승려들이 글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임진왜란 종전 후 성리학이 전파되어 일본도 유학을 배우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일본군 장수가 한문을 능숙한 솜씨로 쓰는 장면이 나온다. 너무 관대한 부분이 아닌가?
다음으로 당시의 수군 제도에 대한 것이다. 10년 전에 방영된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필자가 가장 아쉬워한 부분 중 하나는 전선에 장착한 대포인 총통을 장난감 취급한 부분이다. 무거운 총통을 어깨에 메고 구보를 하는가 하면 손으로 들어서 옆 사람에게 던지기도 하였다. 영화 명량에서는 총통 운용에 관해서 비교적 사료에 충실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가 주위를 에워싼 일본군선들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기 위한 방편으로 총통을 다연장 로켓포처럼 만드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발휘되었다. 바로 무거운 총통을 겹겹이 쌓아 두고 한꺼번에 발사하는 모습을 그렸다. 여기서 결국 총통이 또 한 번 장난감 취급을 받게 된 것이다.
일본군들이 조선의 깃발 신호들을 다 알고 있다. 물론 적정을 입수하면 알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순신도 적선의 깃발이 주는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데 일본군이 어떻게 조선 수군의 다양한 깃발이 가지는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는지 의문스러웠다.
명량수로라는 천험의 요새지에 대한 오류
이순신이 명량수로를 전장으로 택한 이유는 이곳이 조류가 가장 빠른 곳이고 폭이 좁아서 적은 전선으로 많은 적선과 싸우기에 적당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에서 보면 일본 수군이나 조선 수군을 막론하고 전선의 진퇴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다. 수십척이 횡렬진을 형성해도 무방한 위치를 보여서 이곳이 마치 넓은 바다 같은 느낌도 준다. 아울러 조류의 흐름이 명확하지 않고 멋대로 흐른다. 당시 시간대별 조류의 방향과 속도는 이미 연구를 통해 밝혀진 바 있다. 명량해전 당일의 조류는 아침 7시경 북서류(밀물)가 흐르고 13시경 남동류(썰물)로 전류된다는 연구 결과가 이미 발표된 바 있다. 그럼에도 영화에서는 이를 전혀 활용하지 못하고 조류의 전류시각을 아전인수격으로 언급할 뿐이다.
한편으로 진을 친 곳이 불명확하여 이곳이 명량인지 여부를 알 수 없다. 피아간을 막론하고 수십 척이 일자진으로 먼 거리에서 포진하고 있다. 그리고 필요시에 배를 보내 싸우게 한다. 명량수로에는 그런 여유를 부릴만한 장소가 없다.
게다가 회오리가 이는 곳을 설정하여 여기서 전투를 벌이는 장면이 장시간 보였다. 회오리는 울돌목의 어원풀이에서 착안한 것으로 보인다. 즉 울돌목은 ‘물이 울면서 돌아가는 곳이다’라는 뜻에서 이를 회오리가 이는 곳으로 인식한 것이다. 사실상 울돌목이라는 것은 명량수로 중 최협부는 조류 속도가 워낙 빨라서 물살이 암초와 부딪칠 때 물이 우는 소리를 낼 정도라는 뜻이다. 명량수로 가운데 대형 회오리가 이는 곳이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다. 영화에서는 이곳에 대형 회오리가 이는 지점을 설정하여 물살이 빙빙 도는 가운데에 일본군선들을 유인하여 백병전을 벌이는 형태로 전술을 구사한다. 그리고 일본군선들을 격퇴시킨 후 조선 수군의 대장선을 회오리에서 구출하기 위해서 어민들의 선박이 동원되어 끌어당기는 해프닝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지엽적인 것이지만 옥의 티도 닦고서 개봉했더라면...
영화 앞 부분에 회령포를 회룡포라고 하였다. 아울러 자막에 벽파진에 있던 날을 삼도수군통제사를 임명받은 지 12일째 되는 날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통제사 임명 교서를 받은 날이 8월 3일이니 실제는 보성에 있던 8월 15일이 되어야 한다. 벽파진에 진을 옮긴 시점은 8월 29일이다. 육전에 종사하라는 임금의 교서 말미에 보면 날짜가 만력30년(서기 1602년이 된다)으로 되어 있고 날짜도 명량해전이 끝난 9월 20일로 적혀 있다. 상당 시간 동안 그 문서를 보고 있으니 관람자들은 자연히 그 내용을 읽게 된다. 그러면 말미에 그 문서가 작성된 날짜가 보이고 그것이 현실과 맞지 않으면 성의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거북선의 한자 표기를 영화에서는 구선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미 보편적으로 귀선으로 통일해 사용하고 있다. 어법상 귀선이 맞다. 거제현령을 거제도현령으로 표기하고 있다. 당시 거제도는 단순히 섬 이름이다. 행정구역상 명칭은 거제현이다. 따라서 거제현령으로 표기해야 한다. 이런 것들은 영화의 허구성과는 다른 문제이다. 대국민학습차원에서 당시의 제도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부여하는 노력을 보여야 한다. 명량해전 참전 척수도 당대 이순신이 남긴 사료를 채택하지 않고 꼭 후대의 손질된 자료를 채택하는 지 모르겠다. 이순신이 명량해전 결과를 보고한 상황보고서가 당대의 1차 사료인 선조실록에 수록되어 있다. 즉 판옥선 13척과 초탐선 32척으로 적선 130여 척을 맞이하여 31척을 분멸시켰다고 한 내용을 인용하면 되지 왜 후대의 뻥튀기된 자료를 인용해서 왜곡하려는지 모르겠다.
결언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 역사적 오류가 있지만 영화 명량은 우리 사회에 큰 긍정적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비록 이 영화가 ‘초등학생 수준에 맞는 영화’, ‘외국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영화’라는 혹평을 받고 있지만, 우리 국민들의 이순신에 대한 관심을 제고시키는 데 매우 큰 기여를 한 것이다. 서두에서 국제정세와 내부적 요인 때문에 각광을 받는다고 언급했지만 이와 별도로 영화 자체적인 의미도 높게 평가할 수 있다. 그동안 이순신을 다룬 대형 영화가 수십년간 나오지 않았다. TV 드라마에만 의존하다보니 순간적인 폭발력을 가진 문화적 충격을 받지는 못했다. 이번 명량은 단기간에 수많은 국민들에게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오류는 많아도 시도 자체부터가 의미가 컸고 앞으로 관련 영화제작에 탄력을 받게 될 것이다. 앞으로 이순신의 다른 대첩에 대한 영화가 제작될 것이라는 추정도 나온다. 그럴 경우 이제는 좀 더 역사적 고증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교육적 차원의 고려를 해 가면서 제작해야만 좀 더 신뢰를 이끌고 국민의 사랑을 받게 될 것이다. 한 번 관람한 관객들은 수준이 높아져서 이제는 역사적 오류들을 금방 집어낼 것이다. 그런 오류들이 계속 나오게 된다면 관객들은 영화를 한갓 무협지를 극화했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영화제작자들은 이순신에 대한 공부를 먼저 한 후에 제작에 돌입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정확하고 멋진 이순신상을 제대로 그려낼 수 없다. 우리는 이순신의 실체를 제대로 배워야만 그분의 교훈을 올바르게 실천할 수 있다. 잠수에서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 정도 수준 밖에 안되니 여러분들의 이해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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