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YWPUnk , http://blog.daum.net/kkt1594/16144045

[잃어버린 왕국을 찾아서 7] 조문국
신라 왕실세력 텃밭…고대 황금도시
경북 중앙에 자리잡은 천혜의 교통 요충지
금광 기반으로 富축적…독자적 문화 형성
의성=마창훈기자  2007-05-03 08:05:15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 조문국 경덕왕릉 앞에서 향토사학자 김재도씨(오른쪽)와 의성군 문화예술담당 김형도씨가 무덤의 유래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다. 경덕왕릉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던 곳에 조선 영조 때 의성현령 이우신이 복원했다. 

◇ 조문국

조문국(召文國)은 의성군 일원에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다가 신라에 복속된 소왕국이다. 조문국이 언제 생겨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삼국사기에는 신라 벌휴왕 2년(서기 185년)에 신라에 복속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조문국이 신라에 복속된 이후에도 상당기간 토착세력에 의한 지배체제가 계속됐을 것이라는 게 사학자들의 해석이다. 의성지역 향토사학자들은 한발 더 나아가 "조문국은 결코 정벌되지도 멸망당하지도 않고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웠다. 그것은 신라와 전혀 다른 형태의 토기양식에서 드러난다"고 말하고 있다. 

조문국이 신라역사 속에서도 의미를 지니는 것은 김씨 세력이 의성군 금성면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 신라왕조의 왕실세력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한자로 표기된 '召文國'을 조문국으로 읽는 게 맞는지, 소문국이 맞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의견이 엇갈린다. 의성지역 향토사학자들은 조문국이라고 하고, 일부 역사학자들은 소문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조문국 위치

조문국 중심지였던 금성면 일원.

의성군청에서 나지막한 야산으로 난 지방도를 따라 승용차로 15분 남짓 달려 도착한 의성군 금성면 금성산 고분군. 안내를 부탁한 향토사학자 김재도씨(71)가 기자를 반겼다. 금성산 고분군은 조문국의 대표적인 유적지다. 

고분군 중앙광장에 조성된 1천600여평의 작약밭이 한눈에 들어왔다. 삼국사기에 잠깐 언급되었을 뿐 실낱같은 기록들 속에서 신라의 최장 왕족이 된 김씨 세력의 성장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잃어버린 왕국' 조문국은 그렇게 외부인을 맞았다. 

고분군 안에 조문국 경덕왕릉이라 불리는 무덤이 있다. 능 주변은 마치 근위병처럼 소나무가 둘러싸고 있었다. 사학계가 경덕왕릉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지만 향토사학계는 조문국의 왕릉이라 한다. 

경덕왕은 조문국성이 적에게 포위당해 곡식이 모자랐지만, 봉우리(노적봉)에 짚을 덮어 곡식을 쌓아 놓은 것 같이 하고, 흰물을 아래로 흘려보내 쌀뜨물처럼 보이게 해 식량이 풍족한 것처럼 적을 속여 성을 지켰다는 전설을 남긴 왕이다.

김재도씨는 경덕왕릉 앞에서 "1725년(영조 원년)에 현령 이우신이 묘를 증축해 묘지기와 하마비를 세우고 300여년간 군민합동으로 왕릉제사를 지내다 일제강점기에 중단됐으나, 그 후 경덕왕릉보존회를 구성해 다시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황금도시

의성군은 지형적으로 경북의 중심지다. 동쪽으로는 청송군과 접하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상주시, 남쪽으로는 선산군·군위군, 북쪽으로는 안동시·예천군과 경계하고 있다. 이같은 지리적인 조건은 신라가 의성군 금성면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한 조문국을 탐낼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신라가 조문국을 탐낸 것은 단순히 지형적·군사적 목적만이 아니었다. 의성은 신라 황금문화의 원산지이자, 신라 왕족이 된 김씨 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제공한 지역이다. 일제 때 작성된 지질조사에서 신라의 황금문화를 뒷받침하는 금광이 경주 인근에서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의성을 중심으로 한 안동, 예천, 상주 등지에서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것을 증명하듯 신라는 의성에 소경(小京)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 소경은 국왕이 사는 왕경에 대응되는 작은 수도의 의미로, 그만큼 신라가 조문국, 즉 의성지역에 대해 많은 의미를 부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문국 중심도로였던 '거음로'의 현재 모습.  

고분군에서 멀지 않은 금성면 중심부 도로변에는 정자같은 게 하나 있다. 이 정자가 있는 도로가 조문국 왕의 가마와 왕족 그리고 대신들이 탄 수레 소리가 요란했다해서 붙여진 '거음로(車音路)'다. 조문국의 중심지로 추정된다. 거음로 옆에는 왕실의 우물이었던 어정(御井)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1960년 국립박물관은 금성군의 고분 중 가장 큰 무덤을 발굴해 많은 유물을 찾았다. 그후 1965년 경희대가 금성군 고분을 발굴하는 등 의성지역에 대한 발굴로 조문국시대 유물 등 의성의 유물들이 의성 밖으로 유출됐다. 의성군과 향토사학자들은 신라와 어깨를 견줬던 조문국의 역사와 자긍심을 되찾기 위해 전국 박물관으로 흩어진 유물을 돌려받기 위해 박물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사화랑' 사무라이의 어원?

의성군 춘산면 빙계계곡 빙혈에는 박찬 변호사가 검은 돌에 새긴 '조문국과 일본'이란 제목의 글이 있다. 그가 1926년 적도교웅(荻屠敎雄)이라는 일본인이 저술한 '미광'이란 책에서 나온 내용 중 믿을 만한 것을 정리해 새겼다고 한다. 

조문은 소문에서 나온 이름으로 여성의 음부인 '소문(小門)'과 같은 음이므로 여권 중심의 나라였다. 귀도(鬼道)와 주술을 잘 하는 불미구가 왕이 돼 천년동안 30대가 이어졌으며, 이때 조문국 왕자가 변한과 왜국(일본)으로 넘어가 왕이 되기도 했다. 봉양면 구산1리는 '사화랑' 혹은 '사불랭'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힘이 센 사람들이 많아 외부에서 침입하지 못하는 마을이란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일본의 '사무라이'라는 말이 여기서 전해졌다는 설도 있다. 

공동기획: 영남일보·영천시·경북고도읍연구회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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