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joongboo.com/news/articleView.html?idxno=394010 (중부)
http://www.namdo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28537 (남도)
수천m 자연절벽.성벽 둘러싸인 난공불락의 거대요새
역사의 숨결어린 요동- 고구려 유적 답사기행<45>
중부일보 2010.12.27 남도일보 2012.11.14 16:31
<평양으로 가는 관문 오골성 2>
난공불락의 거대 요새…고구려軍 10만여명 주둔
수 천m 자연 절벽·성벽 둘러싸여…유일한 통로 남문
2천355m 성벽 상태 양호· 봉화대 오르면 산성 한눈에
봉성시에서 심양~단동 간 국도를 따라 남동쪽으로 약 3km 가면 동쪽에 고성문구(古城門口)란 마을이 있다. 여기서 왼쪽으로 꺾어서 비포장 길을 따라 북쪽으로 좀 더 가면 오골성 남문에 이른다. 심양~단동 간 철도, 국도와 고속도로가 오골성 서남쪽을 지나며 산성의 북쪽과 동쪽은 옛날에 오골하로 불리던 애하(애河)와 가깝다.
오골성은 고구려시기 요동에서 평양으로 가는 평양도(平壤道)의 관문이자 군사요충지다. 《신당서·고려전(新唐書·高麗傳) 》에 “오골(성)을 차지하면 평양(성)도 함락된다”고 쓰여 있다. 당나라의 《고려기(高麗記)》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오골성은 나라(고구려)의 서북쪽에 위치해 있는데 동이(東夷) 사람들은 옥산(屋山)이라 부른다. 평양 서북쪽 700리에 있다. 동서로 까마득하게 높이 솟아 있는 두 줄기 산봉우리는 아래부터 꼭대기까지 몽땅 짙푸른 암석으로서 그 형상이 형문산협(荊門山峽·장강유역의 협곡)과 비슷하다. 산 위에는 다른 초목은 없고 소나무만 자라는데 마치 깃털을 뽑아 덮어 놓은 듯하다. 고(구)려인은 남북으로 그 협곡을 쌓아 막고 성으로 만들었다.” 우리들이 산성에 들어가 보니 과연 그러했다.
오골성은 봉황산과 고려산 양측의 현애절벽을 이용해 돌로 둘러쌓은 대형 산성이다. 둘레의 길이가 약 15km, 대체적으로 키짝 모양을 이루고 있다. 성 안은 지세가 비교적 평탄하고 훤히 트인 넓은 분지로, 북쪽이 상대적으로 높고 남쪽이 낮다. 험한 산발에 둘러싸인 이 산성은 인력으로 쌓은 성문과 석벽, 벼랑과 깎아지른 듯한 병풍바위로 이루어진 자연성벽, 그리고 기타 부속시설로 이루어져 있다. 고구려시기 여기에 10만여명의 군사들이 주둔하고 있었다고 한다.
산성의 정문은 남문인데 북문과 대칭되게 나있다. 그 중간에 북에서 남으로 뻗은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실개천과 그 옆에 거의 평행되게 나 있는 비탈길이 산성을 동서 양쪽으로 갈라놓고 있다. 둘러보니 이 산성의 평면모양이 흡사 한자 ‘中’자와 같았다. 이 ‘中’자의 세로 그은 획 ‘ㅣ’은 남북 두 성문을 연결시킨 개천가의 길이고, ‘口’자는 산성 성벽이다. ‘口’자의 왼쪽 세로 그은 줄은 서산, 즉 찬운봉 주봉이 있는 봉황산이고, 오른쪽의 세로 그은 줄은 옛날에 고려산이라 불렀던 동대정산(東大頂山)이다.
산성 남문은 남쪽 두 산봉우리 사이에 축조되어 있는데 문터 너비가 약 100m다. 양쪽은 인공으로 축조된 성벽인데, 서쪽 성벽은 오랜 세월을 거쳐 산물에 씻겨 내린 듯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아직 남아있는 것은 성문 터와 커다란 흙더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문터의 석벽이다. 성문 오른쪽으로는 돌로 쌓은 바깥벽면은 사라지고 흙 둔덕만 남아있는데 거기에는 군부대의 시설이 차지하고 있다. 남문 바깥쪽은 변문진(邊門鎭)의 고성문구 마을이고, 마을 앞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변문 기차역이 있다. 남문은 산성의 주요 출입구로 산성의 군사와 군마, 차량들이 드나드는 유일한 통로이다. 성문 동쪽으로 협문 하나와 수문이 있지만 철조망이 부설된 군부대 돌담장으로 둘러쳐 있어 볼 수가 없었다.
남문 안팎으로 산성 표지석 두 개가 서 있다. 앞에 것은 ‘전국중점문화재보호단위 봉황산산성’, 뒤에 것은 ‘성급문화재보호단위 봉황산산성’이란 글이 새겨져 있다. 이곳에서 실개천 가에 나 있는 비포장도로를 따라 성 안으로 들어가면 40여 세대가 사는 고성리(古城里) 마을이 나타난다. 고구려시기 한때는 여기에 장터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200여년 전 조선의 사자(使者) 연암이 동행들과 함께 이곳에 와 구경하고 본 정경을 이렇게 써 놓았다. “… 서남쪽은 광활하여 번번하게 터졌고 산은 맑고 물은 오리오리 갈라져 있으며 버들숲 그늘은 짙을 대로 짙은데 농가들의 듬성듬성한 울타리가 숲 사이로 간간이 보인다. 푸른 잔디로 덮인 동둑 여기저기는 소와 양떼가 흩어져 있고 멀리 보이는 다리 위에는 메고 들고 길가는 행인들의 그림 속 같은 모습들, 이런 풍경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자니 그동안의 피곤이 다 풀리는 것만 같았다.”
마을에서 북으로 골짜기를 따라 조금 더 들어가면 비포장도로가 끊기고 오토바이나 자전거만 다닐 수 있는 오솔길이 나타난다. 우리는 승용차를 이곳에 세워두고 한참을 더 걸어 올라가니 북문이 나타났다. 가는 길에 역시 북문 쪽으로 가고 있는 한 사내를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장씨라는 50대의 이 사내는 대련 한 건축회사의 사람인데 현지 정부의 지정을 받아 일꾼들을 데리고 산성 북문 근처의 허물어진 성벽을 복구공사 중이라고 했다. 북문 터에 이르니 아닌 게 아니라 한창 복구공사 중에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지난해에 북문 터 동쪽 성벽 300여m를 복구한 뒤를 이어 이번에는 문터 서쪽 성벽 200여m를 복원하고 있다고 했다.
북문은 S형의 옹문으로 되어 있는데 아직까지 그 형태가 남아 있다. 북문에서 가파르게 기복을 이루며 동쪽으로 뻗어나간 산등성이에 돌로 쌓은 성벽이 산성의 동벽, 즉 고려산 벼랑과 자연스레 이어진 곳까지 올라갔다. 거기에 서서 뒤돌아보니 북문 터가 아래로 까마득히 내려다 보였고, 그 양쪽으로 높은 성벽이 장성처럼 구불구불 뻗어나갔으며, 문터 뒤 등성이 너머 왼쪽(남쪽)으로 산성의 서벽, 들쭉날쭉 깎아지른 듯한 회백색의 봉황산 바위병풍들이 높게 솟아 있는데 보기만 해도 삼엄하고 위압감을 준다. 이 광경을 바라보노라면 그 산성의 위엄하고 드높은 기세, 그리고 산성의 거대하고 웅장한 모습에 경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북문 서쪽 등성이 위에 봉화대가 있어 올라가 보았다. 봉화대는 약 7~8m의 정사각형으로 되어 있는데 큰 가공석을 밑에서부터 두어 치씩 안으로 들여쌓았다. 밑단부분 네댓 층이 원 모양대로 남아 있지만 위쪽은 허물어져 있었다. 이곳에서는 산성 안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성에는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길이가 7천525m나 되며 그중 보존상태가 좋은 성벽만 해도 2천355m다. 성벽 중 높은 곳은 약 7m, 두께가 2m나 된다. 성벽은 간간이 훼손되었는데 현재 남아 있는 것이 성문을 포함해 산문(山門), 흑구(黑溝), 묘구(廟溝), 필마구(匹馬溝), 동묘(東廟) 등 도합 86곳이며 무너진 성벽은 북문(北門), 대근채구(大芹菜溝), 봉황산 등 도합 53곳으로 훼손이 심하여 일부분은 성벽 기초 돌만 남아 있다. 이런 성벽의 길이는 모두 5천170m 된다.
산성은 산세를 따라 인공으로 정교하게 쌓은 성벽 외에 거석과 가파른 벼랑들로 이루어진 천연적인 석벽도 많다. 이러한 자연석벽 중 길이가 50m 이상인 곳이 34곳, 200m 이상인 곳이 12곳, 400m 이상인 곳이 9곳이며 그중 가장 긴 묘구산 입구의 자연석벽은 길이가 800m나 된다. 이 가운데서도 가장 험한 자연석벽은 산성 서북쪽의 찬운봉 벼랑으로 길이가 450m이며 바깥 표면이 깎아지른 듯해 사람이 기어오를 엄두도 내지 못한다. 이러한 자연석벽들은 그 사이사이에 축조된 거대한 인공석벽과 혼연일체가 되어 난공불락의 방어병풍을 이루고 있다.
산성 내에는 이밖에 또 장대와 초소, 기좌(旗座), 우물, 채석장, 도요지(陶窯祉) 등 그 당시의 시설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중 찬운봉 위의 초소 터는 산성의 감제고지인데 봉성시에서 이곳에 TV방송탑을 설치하면서 훼손되어 그 흔적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고, 봉황산 동북쪽 모서리 근처 절벽 위의 초소 터는 완정하게 보존되어 있다. 이곳에 올라서면 서쪽으로 오골성 안의 모습과 봉성시의 전반 모습을 굽어볼 수 있으며, 동쪽으로 압록강 연안의 산봉들도 아련하게 보인다.
산성 안에서는 고구려 시기의 도자기 조각과 연화문 와당이 발견되었고, 돌도끼와 거란문이 찍힌 기와조각과 요나라와 금나라 시기의 기와조각 등이 발견되기도 했다. 산성 바깥에서도 고구려무덤 떼를 발견하기도 했는데 이미 파괴되고 없다.
장광섭/중국문화전문기자 윤재윤/요령조선문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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