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media.daum.net/culture/art/newsview?newsid=20070531174314458
동북사지(東北史地)
예식진의 묘지석
망국 유민의 비극..백제 고관 예식진 묘지석
연합뉴스 | 입력 2007.05.31 17:43
고구려 유민집단 위무임무 수행하다 객사한 듯
(베이징=연합뉴스) 이돈관 특파원 = 서기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한 후 당나라에 포로로 끌려간 후, 적이었던 당나라 조정의 최고위급 경비부대장으로 활동하다 객사한 백제인 예식진(예<示변에 爾>寔進)의 묘지석 발굴은 다시 한번 망국민의 비극을 되씹어 보게 하고 있다.
예식진의 묘지석은 백제 마지막왕인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夫餘隆), 백제 부흥운동을 이끌던 장군 흑치상지(黑齒常之), 그의 아들 흑치준(黑齒俊), 난원경(難元慶), 노정빈(盧庭賓)으로도 알려진 낙사계(諾思計)에 이어 백제 유민의 것으로서는 여섯 번째로 발굴된 백제 유민의 묘지석이다.
동북사지(東北史地)
예식진의 묘지석
백제 멸망 8년 후인 668년 역시 나당연합군의 공세로 멸망한 고구려 유민들의 묘지석으로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아들인 남생(南生)과 남산(南産), 남생의 아들 헌성(獻誠), 헌성의 손자 비(琵) 등의 것이 발굴된 바 있다.
뤄양(洛陽)대학 둥옌서우(董延壽) 교수와 뤄양고대예술관 자오전화(趙振華) 부연구원은 지린(吉林)성에서 발간되는 격월간 역사잡지 동북사지(東北史地) 2007년 3-4월호에 실린 '뤄양, 루산(魯山), 시안(西安)에서 출토된 당대(唐代) 백제인 묘지 탐색'이라는 논문을 통해 예식진의 묘지석을 처음 소개했다.
◇ 묘지명의 제원
푸른 색깔을 띤 응회암으로 만들어진 정사각형의 묘지석 두껑은 한 변의 길이가 57㎝, 두께가 15㎝ 크기로 그 위에 전서(篆書體)로 '대당고좌위위대장군예식진묘지지명(大唐故左威衛大長軍예<示변에 爾>寔進墓誌之銘)'이라는 16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푸른 색깔을 띤 응회암으로 만들어진 정사각형의 묘지석 두껑은 한 변의 길이가 57㎝, 두께가 15㎝ 크기로 그 위에 전서(篆書體)로 '대당고좌위위대장군예식진묘지지명(大唐故左威衛大長軍예<示변에 爾>寔進墓誌之銘)'이라는 16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역시 정사각형에 한 변의 길이 58.5㎝, 두께 13㎝인 묘지석에는 한 줄에 18자씩, 18줄에 걸쳐 모두 288자의 해서체(諧書體) 글씨가 새겨져 있고, 4개 측면에는 12간지를 상징하는 동물들이 음각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동북사지에 실린 예식진의 묘지석 두껑과 묘지석 탁본 사진은 이와 함께 게재된 부여융, 흑치상지, 흑치준, 난원경, 낙사계의 그것에 비해 훨씬 글씨가 선명해 사진만으로도 그 내용을 쉽게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다.
◇ 예식진은 누구
묘지 전문(全文) 내용과 두 저자의 분석 등을 종합해 보면, 백제 웅천(熊川. 현재의 공주) 사람인 예식진은 백제의 고위무관으로 있으면서 조정 안팎에서 이름을 떨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묘지 전문(全文) 내용과 두 저자의 분석 등을 종합해 보면, 백제 웅천(熊川. 현재의 공주) 사람인 예식진은 백제의 고위무관으로 있으면서 조정 안팎에서 이름을 떨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대를 이어 백제 조정의 장관급 고위관리인 좌평(佐平)을 지냈고, 그도 고위관직에 올랐으나 46세 때인 660년 백제가 멸망하면서 포로가 돼 당시 당나라 수도였던 장안(長安)으로 끌려 간다.
의자왕과 그의 아들 부여융을 비롯한 58명의 백제 왕족.고관.장수 등이 당나라에 포로로 끌려가 황제에게 항복의 예를 갖추었고 그들중 '예식(예<示변에 爾>植)'이라는 인물이 포함돼 있었다는 '구당서(舊唐書)', '책부원구(冊府元龜)' 등의 기록으로 보아 예식진이 바로 예식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묘지에 나타나는 그에 대한 평가로 보아 당나라 조정은 고위관직을 지낸 다른 백제 유민들이나 고구려 유민들의 예처럼 포로로 끌려온 그를 귀순시켜 조정 경비임무를 맡긴 후 그의 능력과 자질을 높이 평가, 최고위급 경비부대장으로 승진시켰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당나라로 끌려간지 12년 만인 672년, 예식진은 현재의 산둥(山東)성 옌타이(煙臺)시 산하 룽커우(龍口)시인 래주(來州) 황현(黃縣)에서 5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고 묘지에 기록돼 있으나 왜 그가 거주지인 시안이 아니라 황현에서 사망했는 지에는 언급이 없다.
이에 대해 두 저자는 4년 전(668년)의 고구려 멸망 후 "이 지역에 안치된 고구려 유민집단을 위무하기 위해 그들과 언어가 통하는 그를 임시차사로 파견한 것은 아닐까"라는 견해를 표시하고 사망 원인은 추측에 맡길 수 밖에 없다고 밝혔다.
당나라 조정은 예식진의 사망보고를 받은 후 조서를 내려 유해를 시안으로 운구토록해 관청에서 주관하는 장례절차를 치른 다음 당나라 고관대작들이 밀집해 있는 고양원(高陽原)에 장사함으로써 극진한 예우를 했다는 것이 두 저자의 평가다.
◇ 국내 전문가 평가
경북대 역사교육학과 이문기 교수는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이 자료가 아직 국내에 알려진 바 없는, 새로 출토된 당나라 백제유민 관련 묘지"라고 확인하고 "바로 이 점만으로도 그 가치가 있다"고 밝혔다.
경북대 역사교육학과 이문기 교수는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이 자료가 아직 국내에 알려진 바 없는, 새로 출토된 당나라 백제유민 관련 묘지"라고 확인하고 "바로 이 점만으로도 그 가치가 있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이어 "예식진의 묘지를 통해 백제시대 최고의 유력 귀족가문으로 좌평을 역임해 온 예씨가 존재했음을 알게 됐다"면서 "(지금까지 널리 알려진) 흑치상지의 선대는 대대로 좌평보다 한 단계 아래인 달솔(達率)을 역임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자료 빈곤으로 백제사 연구의 많은 부분이 공백으로 남아 있는 터에 예식진 묘지는 앞으로 연구에 따라 백제사의 해명과 백제 멸망 후 그 유민들의 동향 등 여러 문제를 밝힐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중국 문물당국이 분명한 출토 지점과 시기, 발굴자 등 고고학적 기초자료를 공개하는 동시에 학계가 실물을 확인하고 정밀한 묘지 내용을 판독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d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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