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levelId=hm_003_0040

옥저의 위치와 변천

東沃沮在高句麗 蓋馬大山之東, 濱大海而居. 其地形東北狹, 西南長, 可千里. 北與挹婁·夫餘, 南與濊貊接. 戶五千. 無大君王, 世世邑落, 各有長帥.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는데, 큰 바닷가에 접해 산다. 그 지형은 동북 방향은 좁고 서남 방향은 길어서 천 리 정도나 된다. 북쪽은 읍루(挹婁)·부여(夫餘), 남쪽은 예맥(濊貊)과 맞닿아 있다. 호수(戶數)는 5,000호(戶)이다. 대군왕(大君王)은 없으며 읍락(邑落)에 각각 대를 잇는 우두머리[長帥]가 있다.
 
『삼국지』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漢初, 燕亡人衛滿王朝鮮, 時沃沮皆屬焉. 漢武帝元封二年, 伐朝鮮, 殺滿孫右渠, 分其地爲四郡, 以沃沮城爲玄菟郡. 後爲夷貊所侵, 徙郡句麗西北. 今所謂玄菟故府是也. 沃沮還屬樂浪. 漢以土地廣遠, 在單單大領之東, 分置東部都尉, 治不耐城, 別主領東七縣, 時沃沮亦皆爲縣. 漢武六年, 省邊郡, 都尉由此罷. 其後皆以其縣中渠帥爲縣侯, 不耐·華麗·沃沮諸縣皆爲侯國. 夷狄更相攻伐, 唯不耐濊侯至今猶置功曹·主簿諸曹, 皆濊民作之. 沃沮諸邑落渠帥, 皆自稱三老, 則故縣國之制也. 國小, 迫于大國之間, 遂臣屬句麗.
『三國志』卷30, 「魏書」30 烏丸鮮卑東夷傳

한(漢)나라 초에 연(燕)나라에서 망명해 온 위만(衛滿)이 조선(朝鮮)의 왕이 되었는데, 이때 옥저(沃沮)의 [여러 읍락이] 모두 [조선에] 속하게 되었다. 한나라 무제(武帝) 원봉(元封) 2년(기원전 109)에 조선을 정벌하여 위만의 손자 우거(右渠)를 죽이고, 그 지역을 분할하여 사군(四郡)을 설치하였는데, [이에] 옥저를 현도군(玄菟郡)으로 삼았다. 후에 이(夷)·맥(貊)의 침략을 받아 현도군을 고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겼다. 지금의 이른바 현도고부(玄菟故府)라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옥저는 다시 낙랑(樂浪)에 속하게 되었다. 한나라는 그 지역이 넓고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단단대령(單單大領)의 동쪽에 있는 지역을 나누어 동부도위(東部都尉)를 설치하고 불내성(不耐城)에 치소(治所)를 두어 별도로 영동(領東) 7현(縣)을 통치하게 하였다. 이때에 옥저의 [읍락도] 모두 현이 되었다. 건무(建武) 6년(서기 30)에 변경의 군(郡)을 줄였는데, 동부도위도 이로 말미암아 폐지되었다. 그 후부터 현에 있던 [토착민의] 우두머리[渠帥]를 모두 각 현의 제후(縣侯]로 삼았으니, 불내(不耐)·화려(華麗)·옥저(沃沮) 등의 여러 현은 전부 후국(侯國)이 되었다. 이들 이적(夷狄)은 서로 침공하여 싸웠으나, 오직 불내예현(不耐濊縣)의 제후만이 오늘에 이르기까지[후국으로서의 면모를 유지하여], 공조(功曹)·주부(主簿) 등 여러 관서를 두었는데, 예(濊)의 백성(民)이 모두 [관직을] 차지하였다. 옥저의 여러 읍락 우두머리는 스스로를 삼로(三老)라고 일컬었는데, 그것은 옛 [한나라] 현이었을 때의 제도이다. 나라가 작고 큰 나라들 사이에서 핍박을 받다가 결국 고구려의 신하가 되었다.

『삼국지』권30, 「위서」30 오환선비동이전

해설

이 사료는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의 일부로,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 중반까지 옥저(沃沮)의 지리적 위치와 정치적 변화를 담고 있다.

『삼국지』 동이전에서 옥저는 동옥저(東沃沮)로 나온다. 사료에 기술된 것처럼 동옥저는 큰 바닷가, 즉 동해안을 중심으로 북쪽으로 읍루(挹婁)와 부여(夫餘), 남쪽으로 예맥(濊貊)과 접하면서 남북으로 길게 펼쳐져 있었다. 옥저는 남쪽의 함흥(咸興) 지역과 북쪽의 훈춘(琿春) 지역에 각각의 중심지가 있었다. 이에 각각 남옥저와 북옥저로 구분해 부르기도 하였다.

옥저는 기원전 2세기 고조선 위만(衛滿) 정권이 수립된 이후 그에 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108년 한(漢)나라의 현도군(玄菟郡)에 편입되었고, 이후 낙랑군(樂浪郡)으로 그 소속이 변경되었다. 하지만 옥저 지역은 고조선이나 한나라 군현(郡縣)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지는 않았다.

옥저가 고조선의 위만 정권에 속하게 된 시기의 사회상은, 후대의 일이기는 하지만 고구려에 신하로 예속된 후 옥저에 대한 고구려의 통치 방식을 통해 미루어 알 수 있다. 고구려는 옥저 지역 읍락 사회의 내부적인 질서를 그대로 유지시키며 이를 간접 지배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아 고조선의 위만 정권 시기에도 옥저 지역의 읍락 사회는 내부적인 질서가 나름대로 유지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사정은 한 군현이 설치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동부도위(東部都尉)가 이 지역을 관할하였다고 하지만, 옥저의 여러 읍락은 토착 세력의 지배층이 통치하였다. 이 사료에서 읍락의 우두머리, 즉 삼로(三老)가 그러한 지배층이다. 한나라는 군현 내지 동부도위의 치소(治所), 즉 지방의 행정 사무를 보는 관청을 중심으로 일부 지역에서만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대부분의 읍락 사회는 자치권(自治權)을 가졌다.

그러나 기원후 30년 동부도위가 폐지되면서 옥저 지역 대부분의 읍락은 한나라 군현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다만 불내예현(不耐濊縣)의 제후 정도가 형식적이나마 한나라의 군현과 정치적인 관계를 지속하였다. 사료에서 불내예현만이 여러 관서[諸曹]를 두었다는 내용이 이를 뒷받침한다.

옥저는 내부적으로 강력한 정치 권력이 성장하지 못하였다. 고구려나 부여와 다르게 대군왕(大君王), 즉 국왕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료에서는 옥저가 “나라가 작고 큰 나라들 사이에서 핍박을 받았다”라고 하였는데, 이로 보아 이웃 강한 나라들의 지배와 간섭이 옥저가 발전하는 데 큰 장애물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옥저는 결국 고구려에 신하로 예속되었는데, 이는 1세기 태조왕(太祖王, 재위 53~146) 대 이후 3세기 중반까지 고구려가 이 방면으로 지속적으로 영토를 확장한 결과였다. 이로부터 옥저는 고구려의 간접 지배를 받았으며, 점차 고구려의 지배력이 강화되면서 4세기 이후에는 고구려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하여 직접 옥저를 다스리게 되었다.


참고자료
이현혜, 「옥저의 사회와 문화」, 『한국사』4, 국사편찬위원회, 1997.

관련 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id/jo_004r_0010_0040_0010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id/jo_004r_0010_0040_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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