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9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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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ko.wikipedia.org/wiki/%EC%84%B1%EC%99%95_(%EB%B0%B1%EC%A0%9C)

성왕 [聖王]
민족문화대백과 집필자 노중국|김선주

백제 제26대 왕. 명농(明濃). 무녕왕의 아들. 명왕(明王), 성명왕(聖明王)
생몰 : 미상 ~ 554년
재위 : 523년 ∼ 554년(성왕 32). 
가계
    부왕 : 무령왕(武寧王)
        장남 : 위덕왕 창(威德王 昌)
            손자 : 아좌태자
            손자 : 임성태자 의조(琳聖太子 義照, 577년 ~ 657년)[32]
        차남 : 혜왕 계(惠王 季)
            손자 : 법왕 선 (法王 宣)
        장녀 : 소비 부여씨(比召 扶餘氏) (진흥왕의 후궁)
        ?남 : 부여씨(扶餘氏)
            손자 : 목도왕(目圖王) 
 

524년1월(음) 백제 태자 明 즉위함.
524년(음)         양나라에서 왕에게 관작을 보내옴.
525년2월(음) 신라와 교빙함.
525년(음)         무령왕릉(武寧王陵)에 무령왕 안장함.
525년(음)         무령왕지석(武寧王誌石) 만듦.
526년10월(음) 웅진성(熊津城) 수리하고 사정책(沙井柵) 축조함
527년(음)         대통사(大通寺)·대도사(大島寺) 창건함.
529년3월(음) 백제왕이 하리국수 수적신압산(穗積臣押山) 다사진을 조공로로 사용하겠다고 이름
529년3월(음) 가라와 신라의 결혼동맹.
529년3월(음) 근강모야신을 안라에 파견하여 신라에 칙하여 남가라·탁기탐을 재건
529년10월(음) 고구려, 백제 북변을 공격.
534년3월(음) 양나라에 사신 보냄.
534년5월1일(음)  백제가 하부(下部) 수덕(修德) 적덕손(嫡德孫), 상부(上部) 도덕(都德) 기주기루(己州己婁)를 보내 
537년10월1일(음) 신라가 임나를 침공하자...
538년(음)         사비(泗沘) 천도함. 국호를 남부여(南扶餘)
538년(음)         일본에 불교 전수함.
540년8월(음) 고구려·백제·신라·임나가 공헌함.
540년9월(음) 고구려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함.
541년4월(음) 안라, 가라, 다라의 한기(旱岐) 등이 백제에 가서 임나재건을 논의함.
541년7월(음) 백제, 임나재건 논의.함
541년(음)         양나라에 사신 보내어 모시박사(毛詩博士)와 열반경의(涅槃經議), 공장화사(工匠畵師) 등을 청함.
543년9월(음) 백제 성명왕, 전부 나솔 진모귀문(眞牟貴文) 등을 보내 부남의 보물과 노 2구를 바침.
543년11월8일(음)  진수련(津守連)을 백제에 보냄
543년12월(음) 백제 성명왕이 천황의 조칙을 군신과 논의함.
544년1월(음) 백제가 임나집사와 일본부집사를 소집
544년2월(음) 백제가 시덕 마무(馬武)·시덕 고분옥(高分屋)·시덕 사나노차주(斯那奴次酒)를 임나에 보냄
544년2월(음) 백제 성명왕이 일본부의 경(卿)과 임나의 한기에게 사신을 파견
544년3월(음) 백제가 나솔 아탁득문, 허세나솔 기마, 물부나솔 기비를 보내 표를 올림.
544년10월(음) 백제 사신 나솔 득문, 나솔 기마 등이 돌아감.
544년11월(음) 백제가 일본부와 임나에게
545년3월(음) 선신파제편을 백제에 사신으로 파견.
545년3월(음) 백제, 중부 호덕 보제(菩提)를 임나에 사신
545년5월(음) 백제가 나솔 기릉, 나솔 용기다, 시덕 차주를 파견하여 표를 올림.
545년9월(음) 장륙불상 주조함.
546년1월3일(음) 백제 사신 중부 나솔 기련(己連) 등 일본에서 귀국
546년6월12일(음)  백제 중부 나솔 약엽례(掠葉禮) 등 일본에 파견
547년4월(음) 백제 전부 덕솔 진모선문, 나솔 기마를 보내 구원군 청함
548년1월3일(음) 백제 사신 전부 덕솔 진모선문(眞慕宣文) 귀환함
548년2월(음) 고구려가 예인과 함께 백제 독산성 공격
548년4월3일(음) 백제가 중부 한솔 약엽례(掠葉禮)
548년6월2일(음) 백제에 사신을 보내
548년7월12일(윤) 백제 사신 약엽례(掠葉禮) 귀환함.
548년10월(음) 370명을 백제에 보내 득이신(得爾辛) 축성
549년6월7일(음) 백제 사신 장덕 구귀(久貴), 고덕 마차문(馬次文)이 돌아갈 때
549년10월(음) 양나라에 사신 보냈으나 후경(候景)에게 피납됨.
550년2월10일(음) 백제에 조를 내림
550년4월1일(음) 아비다(阿比多)가 돌아가려 하자 성명왕이 고구려의 노 6인을 공헌하고 왕인에게 노 1구를 내림.
550년4월16일(음) 백제, 중부 나솔 피구흔(皮久斤)·하부 시덕 작간나(灼干那)를 보내 고구려의 포로 10구 헌상함.
551년9월(음) 신라가 10성을 빼앗아 갔음.
551년(음)         백제 성명왕이 백제와 신라·가야의 병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쳐 한성을 수복하고, 6군을 회복함.
552년5월8일(음) 백제·안라·가라가 중부 덕솔 목례금돈 등을 보내
552년10월(음) 백제 성명왕이 서부희씨(西部姬氏) 달솔 노리사치계(怒唎斯致契)를 보내 
552년(음)        이해,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버림
553년1월12일(음) 백제가 상부 덕솔 과야차주(科野次酒) 등을 보내 구원병을 청함.
553년1월15일(음) 백제 사신 중부 간솔 목례금돈 등이 돌아옴.
553년6월(음) 백제에 사신을 파견하여 양마 2필, 동선 2척, 활 50장, 화살 50구를 내림.
553년7월(음) 백제의 한강 하류지역을 점령
553년8월7일(음) 백제가 상부 나솔 과야신라(科野新羅) 등을 보내
553년10월(음) 백제의 왕녀를 맞아 소비(小妃)로 삼음.
553년10월(음) 백제, 왕자 여창(餘昌)이 군대를 징발
554년1월9일(음) 백제가 중부 목례 시덕 문차, 등을 축자(筑紫)에 보내
554년2월(음) 일본에 역박사(曆博士)·오경박사(五經博士)·의학박사(醫學博士)를 보냄. 
554년5월3일(음) 내신(內臣)이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에 감.
554년5월(음) 백제 왕자 여창이 신라에 들어가 구타모라(久陀牟羅)에 요새 축조.
554년7월(음)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구천(拘川)에 이름.
                        관산성(管山城)에서 신라의 복병에게 왕 죽음. 위덕왕 즉위함.
554년10월(음) 백제의 웅천성(熊川城) 공격함.
555년2월(음) 백제 왕자 여창이 왕자 혜(惠)를 보낸 성명왕의 사망

 

재위 523∼554. 이름은 명농(明濃). 무녕왕의 아들이다. ≪양서 梁書≫ 백제전에는 이름을 명(明)이라 했고, ≪일본서기≫에는 명왕(明王) 또는 성명왕(聖明王)으로 표기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영민하고 비범하며 결단력이 있어 나라 사람이 성왕으로 칭하였다.”라 했고 ≪일본서기≫에는 “천도·지리에 통달해 그 이름이 사방에 퍼졌다.”라고 찬양해 그의 인물 됨됨이가 비범했음을 알 수 있다.

동성왕·무령왕이 웅진 초기의 정치적 불안정을 수습하면서 추진해 온 왕권 강화 정책을 계승해 538년(성왕 16)에 사비(泗沘) 천도를 단행하였다. 성왕의 사비 천도는 고구려의 남침이라는 외부 세력의 강요에 의해 행해졌던 웅진 천도와는 달리 성왕의 의도적인 계획하에 단행된 것이다.

따라서 이 사비 천도는 왕권과 국력 강화 정책의 마지막 마무리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사비 천도에는 사비 지역의 토착 신진 세력이었던 사씨(沙氏, 沙宅氏)의 정치적 지지가 강하게 작용하였다.

사비 천도 후 국호를 일시 ‘남부여(南扶餘)’라 개칭해 부여족으로서의 전통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양조(梁朝)와 빈번하게 교류하면서 모시박사(毛詩博士)·공장(工匠)·화공 등을 초빙하고 열반등경의(涅槃等經義)를 수입해 백제 문화의 질적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크게 힘썼다.

또한 성왕은 인도에서 산스크리트로 된 5부율(五部律)을 가지고 온 겸익(謙益)을 우대해 고승들을 모아 5부율을 번역시키고, 아울러 담욱(曇旭)·혜인(惠仁) 등이 지은 율소(律疏) 30권에 친히 비담신율서(毗曇新律序)를 써서 백제 신율을 성립시켰다. 성왕의 이러한 계율의 장려는 불교 교단의 정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달솔(達率) 노리사치계(怒唎思致契) 등을 일본에 파송해 석가불금동상 1구, 번개(幡蓋) 약간, 경론(經論) 약간 권을 보내 줌으로써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게 되었다. 이 밖에도 의박사·역박사 등의 전문가와 기술자를 교대로 파견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선진 문물의 전수자로서의 구실을 하였다. 이와 더불어 사비 천도를 전후해 웅진시대 이후 이루어졌던 내외 관제를 정비해 지배 체제의 정비와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중앙 관제로는 1품 좌평(佐平)에서 16품 극우(克虞)에 이르는 16관등제와 전내부(前內部) 등 내관 12부와 사군부(司軍部) 등 외관 10부로 된 22부제가 정비되었다. 또 왕도의 통치 조직으로는 수도를 상부·전부·중부·하부·후부의 5부로 구획하고 5부 밑에 5항(五巷)을 둔 5부5항제를 정비하였다.

지방 통치 조직으로는 종래의 담로제(檐魯制)를 개편해 전국을 동방·서방·남방·북방·중방의 5방(方)으로 나누고 그 밑에 7∼10개의 군을 두는 5방·군·성(현)제를 정비하였다. 이와 같이 중앙 관제와 지방의 통치 조직을 정비함으로써 성왕은 정치 운영에서 귀족회의체의 정치적 발언권을 약화시켜 왕권 중심의 정치 운영 체제를 확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성왕은 국제 관계에도 힘을 기울여 전대부터 유지되어 온 신라와의 동맹 관계를 그대로 지속함으로써 고구려의 남진 압력에 대항해 나갔다. 그리고 양(梁) 및 왜(倭)와의 외교 관계를 유지하면서 무역과 이에 따르는 문화 교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백제의 국제적 지위를 높였다.

한편, 성왕은 숙원의 과제라고 할 수 있는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 유역 탈환 작업에 나섰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551년에 백제군을 주축으로 해 신라군과 가야군으로 이루어진 연합군을 일으켰다.

이 연합군은 북진해 백제군이 먼저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 : 지금의 서울)을 공격, 격파함으로써 기선을 제압해 고구려군을 패주시켰다. 그 결과 백제는 한강 하류의 6군을 회복했고 신라는 한강 상류의 10군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의 진흥왕은 나제동맹 관계를 무시한 채 한강 하류 유역을 빼앗고자 당시 남북으로부터 군사적 위협에 처해 있던 고구려와 밀약을 맺고 553년에 군사를 돌이켜 백제를 공격해 옴으로써 백제는 한강 하류 유역을 신라에 빼앗기게 되었다.

신라의 공격으로 백제의 실지 회복이 수포로 돌아가자 성왕은 554년에 비전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라에 보복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여기에는 가야의 원군도 합세하였다. 백제의 이와 같은 군사 동원으로 양국간의 대결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때 양국의 싸움은 관산성(管山城)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이 싸움에서 초기에 우세를 보였던 백제는 성왕이 구천(狗川) 지역에서 신라 복병의 기습 공격을 받아 전사함으로써 대패하고 말았다. 이 전쟁에서 백제는 왕을 비롯해 4명의 좌평이 전사하고 3만 명에 달하는 군사들이 전사하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러한 패전의 결과로 국내 정치 정세도 심대한 영향을 받아 동성왕 이후 성왕 대까지 확립되었던 왕권 중심의 정치 체제가 귀족 중심의 정치 운영 체제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1세기 이상 신라와의 사이에 맺어졌던 나제동맹 관계는 이 싸움 이후 완전히 결렬되었다. 이리하여 양국은 최후까지 적대적으로 대결하는 원수의 관계가 되었으며, 이는 한반도에서 삼국의 역학 관계의 성격을 결정 짓게 되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일본서기(日本書紀)』
『한국사-고대편-』(이병도, 진단학회, 을유문화사, 1959)
「사비시대 백제지배세력의 변천」(노중국, 『한우근박사정년기념사학논총』, 1981)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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