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070216.22019201234

이영식교수의 이야기 가야사 여행 <4> 동전 한 닢이 말하는 해상왕국
황해도 일본서도 출토된 화천은 중계무역 증거
국제신문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2007-02-15 20:16:44/ 본지 19면

김해 회현동패총전시관.

회현동패총

2006년 10월 10일 김해시내 회현동에 패총단면전시관이 오픈되었습니다. 9m 깊이의 조개더미를 수직으로 잘라 넓은 정면과 좌우 짧은 단면의 3개 면을 노출시켜 가야인의 쓰레기장을 박력 있고 생동감 있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907년 일본인 이마니시가 발견한 지 꼭 100년 만의 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발견된 초기 철기시대의 대표유적입니다. 여러분들이 국사 시간에 열심히 외우셨던 바로 그 유적입니다. 회현리패총으로 기억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지금의 행정구역명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수로왕릉 남쪽의 봉황대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린 낮고 길쭉한 언덕으로, 가야인들이 먹고 버린 조개껍질들이 생활쓰레기와 함께 쌓여 생긴 유적입니다. 지금 쓰레기장이라면 환경문제의 하나로 골치 거리가 됩니다만, 회현동패총은 가야사를 되살릴 수 있는 보고입니다.

발굴조사

1920년 우메하라와 하마다, 1934년 카야모토와 같은 일본인들이 발굴하였고, 1992년부터 2005년까지 간헐적으로 부산대박물관과 경남고고학연구소 등이 발굴조사를 했습니다. 수많은 조개껍질과 가야토기의 파편들, 그리고 생활도구들이 출토되었고, 화천·세형동검·탄화미처럼 가락국(금관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되살릴 수 있는 것들도 확인되었습니다. 탄화미는 2000년 전 건국기의 가락국에서 성숙한 쌀농사가 행해졌음을 보여줍니다. 세형동검(細形銅劍)은 한민족 청동기문화의 대표 유물로 가야에 대한 고대일본의 지배나 간섭을 말하던 일본학계의 잘못된 주장을 일축할 수 있는 증거 자료가 됩니다.

동전 한 닢


낙랑 화천
 
화천(貨泉)은 서기 9년 신(新)을 세운 왕망(王莽)이 찍은 돈으로 엽전처럼 생겼습니다. 가운데에 네모난 구멍이 있고, 그 오른쪽에 화(貨), 왼쪽에 천(泉)이라 새겼습니다. 물론 왕망전으로도 불리는 화천은 한 잎의 동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전혀 새롭고 너무나도 중요한 가야왕국 발전의 비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화천은 평양과 황해도, 바다 건너 일본열도의 큐슈에서 오사카까지에도 점점이 출토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 찍은 화폐가 한반도 남단의 김해에서 출토되는 것도 신기한데, 서북한 지역과 일본열도에서 함께 출토되고 있다는 점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해상왕국


해남 화천
 
화천이 주조된 약 200년 후의 기록이지만 '삼국지' 왜인전은 황해도의 대방군에서 일본열도의 왜국들에 이르는 바닷길을 전하고 있습니다. 황해도에서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다 남해에 들어서서 동으로 방향을 바꿔 김해에 도착하고, 1000리(70㎞)의 바다를 건너 쓰시마, 다시 천리를 건너 이키, 다시 천리를 건너 큐슈 북부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바닷길은 기원전후에서 3세기 후반까지 고대 동아시아 세계를 연결하는 중요한 무역로였습니다. 김해의 가락국은 중국과 일본열도를 연결하는 중개무역항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현대의 동아시아에는 싱가포르 홍콩 상하이 나가사키 부산 등이 중개무역항으로서 유명합니다만, 고대에는 가락국이 거의 유일무이한 중개무역항이었습니다. 서북한지역과 일본열도, 그리고 회현동패총에서 출토되었던 화천은 이러한 바닷길을 통한 인간과 물자의 왕래를 증명해 주는 증거입니다. '삼국지'에 따르면 황해도에서 일본열도를 왕래하는 기간은 대개 2년 내지 2년 반이 걸렸습니다. 반면에 화천은 불과 10년 밖에 통용되지 않았습니다. 불과 10년 밖에 사용되지 않았던 화폐가 2년 내지 2년 반이나 걸렸던 바닷길에 점점이 출토되고 있다는 것은 이 바닷길을 통한 무역과 왕래가 얼마나 빈번했던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일본 화천
 
중국의 선진 문물과 일본열도의 원자재가 김해의 가락국에서 교환되었고, 가락국에 모여진 가야 여러 나라들의 물품이 중국과 일본에 수출되기도 하였습니다. 가락국과 함께 남해안에 위치한 전기 가야의 나라들이 일찌감치 고대왕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경제적 바탕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원전후에서 3세기경에 이르는 가락국을 해상왕국이라 부르는 데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교수·박물관장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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