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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순신 주위에는 인재가 몰렸나"
<혼돈의 시대 리더십을 말하다>박종평의 이순신 리더십 이야기-①
홍준철 기자  |  mariocap@ilyoseoul.co.kr [1014호] 승인 2013.10.07  11:55:10

원균의 칠천량 패전 직후 삼도수군통제사 부임
“싸리나무 깔고 앉아” 누구와도 이야기한 장군


성공회대 신영복 석좌교수는 일해야 할 자리를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란 모름지기 자기보다 조금 모자라는 자리에 앉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의 능력이 100 이라면 70%정도의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 앉아야 적당합니다. 30%정도의 여백이야말로 창조적 공간이 되고 예술적 공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70%의 자리가 득위(得位)의 비결입니다.”

이는 그 어떤 사람이라도 100퍼센트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인간의 불완전성을 말한다. 또한 능력을 넘어선 과욕이 자신과 조직에 불러올 재앙을 우려하는 수신(修身)과 절제의 지혜의 중요성을 말한다. 30퍼센트의 여유를 활용해 자신과 조직의 발전을 위한 끊임없는 자기계발을 하고, 또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들의 지혜로 채우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30퍼센트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70퍼센트는커녕 100퍼센트의 능력이 요구되는 자리를 탐하는 것이 비일비재하다. 또한 리더들도 눈도장 찍힌 회수를 중심으로 무능한 인물을 부적당한 자리에 채운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인재(人材)가 인재(人災)가 되었다고 한탄하기를 반복한다. 

리더의 최고 조건은 인재 발견하는 안목
 
인재 배치는 일의 시작과 끝이다. 리더는 언제나 자신에 대한 30퍼센트의 여유를 남겨두고 30퍼센트를 가장 잘 채울 사람들을 찾아야 한다. 특히 그 과정에서 사람에 대한 안목은 필수적이다. 리더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능한 리더는 무수히 시행착오를 하면서도 자신의 눈 먼 것을 탓하기보다 자신이 ‘잘못 뽑은 사람’ 탓하기 바쁘다. 무능한 리더는 리더가 아니다. 

그런 리더를 리더로 부르는 것 자체가 어폐가 있고, 리더라는 말 자체에 대한 모독이다. 리더는 함께 이끌든 먼저 이끌든, 혹은 뒤에서 밀던 간에 조직을 살리는 생명의 방향에서 고민하고 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리더(Leader)’이다. 파국과 분열의 방향, 역진하는 사람은 리더(Leader)가 아니다. 쓸모없는 찌꺼기 같은 ‘리저(Leeser: Lees는 찌꺼기란 의미이다)’일 뿐이다.

이순신은 자신의 능력을 알았고 겸손했다. 또한 사람을 보는 눈을 키우려고 노력했기에 그의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넘쳐났다. 그에게 사람들이 몰려드는 모습을 보여주는 가장 단적인 사례는 1597년 7월 원균의 칠천량 패전 직후이다.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부임한 이순신은 패전 상황을 파악하고 수군을 재정비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8월 3일 운곡에서 길을 떠나 8월 18일 회령포에 도착하기까지 16일간 326.4킬로미터의 대장정을 했다. 출발할 때는 이순신의 일행은 송대립 등 군관 9명과 군사 6명에 불과했다. 사실상 빈털터리였다. 그러나 그가 가는 곳마다 다양한 신분과 능력을 갖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8월 6일 옥과현에서 이기남 부자와 정사준 형제, 옥과 현령, 조응복, 양동립이 이순신의 휘하에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순천과 보성을 지날 때에는 전체 수행원이 120여 명으로 늘었다.

이순신 휘하로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해답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일기에서 살펴보면 30퍼센트의 빈자리를 채우려는 마음가짐이 드러난다. 8월 7일 일기에는 “선조의 유지를 가져오는 선전관 원집을 길에서 만났다. 그리고는 길옆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班荊坐於路傍, 반형좌로방)”고 기록해 놓았다.

 백의종군길 수백명의 인재 곁으로 모여
 
<난중일기>의 원문에 나온 ‘반형좌(班荊坐)’는 본래 <춘추좌전>에 나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길옆에서 싸리나무를 꺾고 앉아서 이야기를 나눈다”는 뜻이다. 한글 번역으로 얼핏보면 지나가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 이야기했다는 뜻에 불과하다. 그러나 한문 원문의 ‘반형좌’는 당시에도 흔히 썼던 말이 아니다. 이순신이 인재를 찾고 모으려는 열망과 고뇌가 반영된 특별한 표현이다. 이순신의 따라 ‘반형좌’의 의미가 담긴 <춘추좌전>속으로 들어가 보자.

중국 춘추시대 초나라의 오삼과 채나라의 공손자조는 친구였다. 그 아들들인 오거와 성자도 아버지들을 따라 친구가 되었다. 오거는 초나라의 대부로 왕자(王子) 모(牟)의 딸과 결혼했는데 장인인 모가 죄를 지어 망명하자 사위인 오거의 처지가 난처하게 되었다. 연대책임을 걱정한 오거도 정나라로 망명했다. 

그러나 정나라는 초나라의 이웃나라였기에 안심할 수 없었던 오거는 다시 진나라로 망명을 떠났다. 때마침 진나라를 방문하려던 성자와 오거가 길에서 마주쳤다. 그 때 두 사람은 이순신이 인용한 말처럼 길옆에서 “싸리나무를 깔고 앉아”함께 이야기를 했다. 오거의 처지를 들은 성자는 오거가 다시 초나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겠다고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진나라를 방문한 뒤 초나라에 간 성자는 재상인 자목과 이야기를 하면서 “진나라의 경은 초나라보다 못하지만, 그 대부(大夫)들은 진나라가 더 유능해 장차 모두 경이 될 만한 재목이다. 그 대부들은 대부분 초나라에서 망명한 인재들”이라며 초나라의 인재 관리 정책의 실패를 지적했다. 그러면서 오거를 비롯한 망명한 인재들을 다시 불러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성자의 충고를 초나라에서 받아들여 오거는 다시 고향 초나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순신이 <춘추좌전>에서 인용한 ‘반형좌’의 실제 의미는 바로 인재를 중요시한 이순신, 특히 패전으로 인해 흩어진 인재들을 모으려는 이순신의 고민이 담긴 것이다. 또한 아무 거리낌없이 길가에 앉아 누구에게라도 경청하려는 이순신의 자세를 보여준다. 

어리석은 리더는 귀를 막고, 사람을 가리고, 결정적으로는 언제나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고용한다. 그러나 이순신처럼 역사상 위대한 리더들은 자기 부하들보다 뛰어나게 일을 잘한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을 알아보고, 그런 사람들을 불러들여 함께 지혜를 나누고, 적재적소에 활용한 사람들이다. 승리하려는 리더라면 ‘이순신의 반형좌’처럼 때와 장소, 겉껍질 같은 스펙에 연연해서는 안된다. 과감히 30퍼센트를 남겨두고, 다른 이들이 채울 수 있도록 반형좌해야 한다.

※ 이 칼럼은 <한국형리더십개발원>의 리더십 에세이에서도 만나실 수 있습니다. (www.kleader.org)

◆ 박종평 역사비평가 

<프로필>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국회의원 입법·정책 보좌관 
국민일보 ‘임진년 이순신’ 연재

<저서> 
흔들리는 마흔 
이순신을 만나다 
이순신 이기는 원칙
이순신, 꿈속을 걸어 나오다 외 다수

<논문>
인간 이순신의 꿈과 점에 관한 연구 
「난중일기」를 통해 본 이순신의 척자점에 관한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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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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