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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 용담산성이 전하는 고구려의 지혜
[동북역사유적지를 찾아서] 절대 마르지 않는 수로, 절대 물이 고이지 않는 한로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1/05/08 [18:39]  최종편집: ⓒ 자주민보

▲ 고구려 산성이 있는 용담산과 그 앞으로 흐르는 길림 송화강 © 자주민보


▲ 길림 용담산산성 공원 입구 표식비     © 자주민보


▲ 고구려 광개토대왕 시절 축성한 용담산산성은 토성이지만 가파른 산세를 그대로 살려 만들어 매우 위력적인 산성이었다. 여기서 돌맹이만 아래로 던져도... 특히 토성이다보니 나무와 풀이 우거져 은폐와 엄폐에도 유리했을 것으로 보인다. 토성이지만 어떻게 잘 만들었는지 1600년이 지난 지금도 거의 원형그대로 남아있다.     © 자주민보


▲ 용담산산성 단면, 산성 안을 공원으로 조성하느라 도로를 내면서 드러난 단면인데 아래 부분은 돌로 쌓아 기초를 튼튼히 다졌으며 그 위에 흙을 층층히 꽁꽁 다져가며 산성을 쌓았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 자주민보


▲ 고구려 선조들이 토성이지만 성을 쌓을 때 얼마나 꼼꼼하게 다졌는지 잘린 단면 비바람에도 저렇게 층층이 형태를...     © 자주민보


▲ 도로를 뚫으면서 드러난 길림 용담산산성 단면, 고구려 선조들이 흙으로 층층이 다져가며 탄탄하게 쌓았음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 자주민보

중국 동북지역 곳곳에 서려있는 우리민족과 중국민중의 항일 전적지를 취재하면서 이제는 고대유적도 가능하면 돌아볼 생각이다. 그래서 김일성 주석의 항일 유적지인 길림육문중학교와 약왕묘를 찾아간 김에 길림 시내 인근에 있는 용담산성을 찾아가 보았다.

고구려의 성은 독특한 ‘치’ 등 효과적인 방어와 공격용 장치들이 많으며 매우 견고하다는 점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1600여 년 동안 끄떡없이 그 형태를 온전히 보존하고 있는 장군총 등을 보았을 때 고구려의 선조들은 돌을 깨고 다듬고 옮기고 축성하는 데 있어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음도 이미 증명되었다.

그런데 고구려 광개토대왕(호태왕) 시기 축성한 것으로 중국 고고학자들이 고증한 용담산성을 돌아보니, 고구려 선조들이 산세를 이용하여 적은 노력으로 매우 효과적인 산성을 쌓는 실용적인 사고방식까지 체득하고 있었으며, 높은 산 산성 안에 대형 음료수 저장용 우물과 음식물 보관창고 등을 건축하는 등 과학적 지식 또한 뛰어났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은 공원으로 개발되어 길림 시민들이 산책과 운동 장소로 널리 이용하고 있는 용담산성 현장에 올라보니, 입구에 세워져 있던 용담산산성 돌비석 설명문에 '산세를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지혜롭게 산성을 쌓았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바로 실감을 할 수 있었다.

산 정상은 자연스런 분지형태였는데 그 둘레 능선이 가파른 점을 이용하여 방어와 공격이 용이하게 흙으로 산성을 쌓았던 것이다. 흙으로만 쌓아도 워낙 가파른 절벽과 같은 지형을 이용하여 쌓았기 때문에 방어와 공격 효과는 매우 높아보였다. 

특히 산성 안 공원으로 들어가는 도로 부분에서 발견된 산성의 단면을 보면 아래 부분은 흙과 돌을 섞어 기초를 다지고 그 위에 흙으로 산성을 쌓았기 때문에 돌로 쌓은 산성 못지않게 견고해보였다. 특히 흙으로 지은 산성이라 나무와 식물들이 자연스럽게 자라나 무너지는 것을 막아주고 또 은폐와 엄폐까지 도와주니 흙으로 쌓은 산성이라고 해서 결코 만만히 볼 일이 아니었다.

1600여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산성은 일부 구간이 빗물에 패이기는 했지만 대부분 구간은 거의 그대로의 형태를 온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 길림 용단산산성 안의 음료수용 대형 우물이었던 '수로(용담)'  깊이나 10미터나 된다면 사람은 물론 성안의 많은 말들까지 충분히 물을 먹일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자주민보


▲ 고구려 선조들이 축성한 천년의 유물 길림 용담산산성의 무너진'용담'을 바라보는 한 나그네의 가슴을 "딱따그르르" 때려 울린 용담의 딱따구리, 용담은 이제 새들의 안식처가 되었는가.     © 자주민보


▲ 길림 용담산산성 안의 대형음식물 저장고였던 '한로', 여기엔 절대 물이 고인 법이 없다고 한다. 이 한로의 돌은 1600여년 전 고구려 선조들이 쌓은 것이다. 지금도 견고한 그대로이다. 위의 수로는 최근 다시 쌓은 것인데 벌써 무너진 것을 보며 선조들의 돌쌓는 솜씨가 여간이 아니었던 것 같다.     © 자주민보


▲ 천년의 이끼를 입고 있는 길림 용담산산성 안의 '한로'     © 자주민보

하지만 정말 놀라운 사실은 설령 산성이 완전히 포위된다고 해도 지원군이 올 때까지 몇 달 정도는 얼마든지 버틸 수 있는 완벽한 시설물을 그 안에 갖추고 있는 요새로 만들어져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것이 음료수 저장용 대형 우물인 '수로(용담)'와 식량과 김치, 야채 등을 신선하게 보관할 수 있는 '한로'라는 축성물이다.

수로는 산성의 중심부 꽤 높은 봉우리로 둘러 쌓인 낮은 지대에 있었는데 17*22미터의 직사각형 형태의 대형 우물이었다. 깊이가 10미터이고 낮은 곳도 3미터이다. 사람들은 물론 말에게도 충분히 먹일 수 있는 수량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 수로는 돌로 쌓았는데 절대 마른 법이 없으며 바닥을 어떻게 시공했는지 물이 새나가는 법도 없다고 한다. 아마도 옛 고구려인들은 지하수의 흐름과 우물이 만들어지는 원리 그리고 고인 물이 썩지 않게 하는 과학적 원리를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음식물 저장고로 추정되고 있는 '한로'는 용담산성 남문 바로 아래 즉 수로에 비해 훨씬 높은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지름이 16.6미터에 깊이는 2-3미터였다. 수로와 한로는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흘러들어온 토사에 깊이는 얕아질 수도 있었다고 본다. 다만 분명한 점은 수로는 매우 깊이 팠고 한로는 그 보다는 높은 위치에 축성하면서 깊이도 훨씬 얕게 팠다는 점이다.

바로 물이 고이면 저장한 음식물이 썩게 마련이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지금도 이 한로는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데 물이 고이는 법이 없다고 한다. 고지대의 산에 그것도 지하로 2-3미터 파 내려가 건설했으니 그 안은 당연히 서늘하여 음식물이 잘 상하지 않고 오래 보관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물과 음식만 있으면 산성 안에서 병사들은 얼마든지 버틸 수 있다. 당시 고구려의 개마기병을 앞세운 증원군이 인근에서 달려오는데 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 높은 산에 쌓은 산성은 아니고, 비록 흙으로 쌓은 토성이며, 그 둘레도 2396미터밖에 되지 않지만 용담산성은 바로 이런 요새였기 때문에 송화강이 흐르는 곡창지대이자 고구려의 한 요충지였던 길림을 지키기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산성이었으리라 생각되었다.

다음은 현장에 설치되어 있는 용담산성과 수로, 그리고 한로에 대한 안내문을 리송덕(78) 연변박물관 전 혁명역사부 주임이 해석한 것이다. 

▲ 길림 용담산산성 설명비 © 자주민보
 
♦ 용담산산성
 
용담산 산성은 우리나라 저명한 고구려 산성이다. 고구려 호태왕 시기에 세웠는데(기원 391년-413) 고구려흥성시기의 전형적인 건축이다. 산성은 산세의 기복을 이어서 평면은 불규칙적인 형태이고 성벽의 아래는 모두 돌과 황토를 섞어서 쌓았다. 둘레의 길이는 2396미터, 성내의 주요한 유적으로 수로(용담, 대형우물), 한로(야채, 식료 저장고) 등이 있다. 근년에 와서 또한 성내에서 한대 후의 요나라 금나라 시기 유물도 발견했다. 이로부터 보건데 이 성벽을 쌓기 전에도 여기를 개발하고 이용했던 것 같다. 고구려 후에도 계속 사용했다. 청나라 시기에 산성 안에 대규모 사원을 지었다. 이 사원을 용풍사라고 한다.
 
용담산 산성은 우리나라 고대 노동인민의 총명한 재능을 충분히 반영하였고 중화민족 대가정 중의 각 여러 민족기간에 서로 영향을 주고 융합한 빛나는 역사이다. 
 
성벽 밖 10미터 이내는 중점보호지역으로 정하고 그 아래는 보호하는 지대로 삼았다.


▲ 길림 용담산산성 안의 '수로(용담)' 설명비 © 자주민보
 
♦ 수로(용담)
 
용담이라고 부른다. 그 위치는 용담산 고성 안에 축조했는데 바닥은 물이 절대 세나가지 않게 되어 있어 물이 마르지 않는다. 그 길이가 동서길이 17미터이고 남북너비가 22미터로서 푸른 돌로 쌓은 장방형 물 저장고였다. 가장 깊은 곳은 10미터 얕은 곳은 3미터이다. 
 
고고학자들이 고증한데 의하면 가능하게 동북의 토착민족인 새백인의 한 갈래인 부여인이 가장 일찍이 용담산을 군사적 요새로 사용했고 기원적 410년에는 새백인의 다른 한 갈래인 고구려인들이 광개토왕의 영솔아래 부여인을 점령하고 용담산에 산성을 쌓았다. 기원전 668년에 당나라 장수 *인이 고구려와 부여인들을 점령하여 250년간 용담산 산성을 사용했다. 그 후 발해, 요나라, 금나라 네 여진족 등이 점령하여 사용하였다. 
 
이로부터 보건데 용담산 산성은 옛날에 군사요충지였으며 이 연못은 생활음용수를 공급하는데 사용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 길림 용담산성 수로와 관련한 복원 공사 안내문 © 자주민보
 
1995년 가을에 길림시 인민정부에서 투자하여 수로 안의 흙탕물을 거두어 내고 1996년 돌을 다시 쌓아 천년의 고적을 복원하여 후세사람들이 참관할 수 있게 하였다. 잘 보호하기 바란다.

길림시 원림 관리처
용담산 공원 세움
1996년 초여름


▲ 길림 용담산산성 안의 한로 설명비 © 자주민보
 
♦ 한로
 
한로는 용담산 산성 안에 고구려시대 기원전 37년부터 기원 667년에 사이에 건축한 유적의 하나이다. 한로는 화강암 돌로써 쌓았는데 원형 정방형이다. 직경은 16.6미터 깊이는 2-3미터 물을 저장했던 용담(수로)이나 물을 채우지 않았던 이 한로나 같은 축성법으로 만든 것으로 보아 같은 시기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한로는 용담과 달리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물이 고이는 법이 없다.
 
한로에서 ‘로’는 감옥을 말하는데 고고학자들이 발굴을 했지만 감옥 관련 유적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
그래 짐작컨대, 한로는 군사물자를 저장했던 움, 특히 야채나 김치를 저장했던 지하 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용담산산성에 함께 오른 리송덕 전 연벽박물관 혁명역사부 주임 © 자주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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