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22158

신라 재앙의 날, 박씨는 연락 두절 상태였다
[게릴라칼럼] 책임을 망각한 군주의 비참한 말로
14.08.14 10:06 l 최종 업데이트 14.08.14 10:06 l 김종성(qqqkim2000)

'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  고대 군대의 진격 모습. 서울시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내의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고려-후백제-신라가 공존하던 서기 927년 연말, 신라에는 갑작스런 대재앙이 닥쳤다. 경주 코앞인 고울부(지금의 경북 영천)에 진을 치고 있던 후백제 군대가 경주를 향해 총공격을 개시한 것이다. 이 군대를 지휘한 것은 후백제왕 견훤이었다. 

이때 후백제군 병력은 5천 명보다 훨씬 더 많은 규모였다. <고려사>의 일부인 태조 편(정식 명칭은 '태조 세가')에 따르면, 경주가 점령되고 나서 뒤늦게 신라를 도우러 온 고려 기병 5천 명이 후백제군에 의해 포위되었다. 5천 명의 기병대를 포위했을 정도면 후백제군이 5천 명보다 훨씬 더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대규모 군대가 신라 수도를 침공했으니, 신라 입장에서는 대재앙이 닥친 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더욱 더 큰 재앙은, 이처럼 긴박한 상황 속에서 제55대 신라왕 박위응(경애왕, 재위 924~927년)이 연락 두절 상태였다는 점이다. 외국군이 경주를 침공한 국가비상사태인데도 신라군 최고통수권자의 소재가 파악되지 않았던 것이다. 

참고로, 제8대 임금인 박아달라(아달라왕)가 서기 184년에 죽은 뒤로 신라에서는 오랫동안 박씨 왕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912년에 박위응의 아버지이자 제53대 임금인 박경휘(신덕왕)가 왕이 되었다. 728년 만에 박씨가 왕위를 되찾은 것이다. 이렇게 박씨 왕권이 회복된 뒤에 제54대 경명왕 박승영(박경휘의 아들)에 이어 왕이 된 인물이 박경휘의 또 다른 아들인 박위응이다.  

박위응 수색 작업 나선 견훤, 그를 찾은 곳은...

후백제왕이 직접 군대를 몰고 경주를 침공했으므로, 경주를 지키던 신라군 사령부에서는 박위응에게 긴급 상황을 보고했을 것이다. 하지만 신라군은 박위응의 지시를 받을 수 없었다. 왜냐? 연락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라왕이 연락 두절 상태였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이 점은 위의 <고려사> 태조 세가뿐만 아니라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애왕 편과 <삼국사기> 견훤 열전에 기록된 상황을 통해서 쉽게 입증된다. 

신라군의 반격을 물리치고 경주에 진입한 견훤은 박위응을 체포하고자 했다. 그런데 박위응은 대궐에 없었다. 그래서 견훤은 박위응을 수색할 것을 지시했다. 지시를 받은 후백제군은 경주 시내를 약탈하면서 박위응에 대한 수색 작업에 나섰다.


▲  A는 지금의 경주, B는 지금의 영천, C는 지금의 대구. ⓒ 김종성

이런 상황에서 후백제군 일부가 대궐 남쪽에 있는 포석정에 들이닥쳤다. 박위응은 그곳에 있었다. 이때서야 비로소 박위응은 후백제군의 침공 사실을 확인했다.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박위응은 포석정을 빠져나가 대궐 남쪽의 별궁으로 긴급히 피신했다. 이 점을 보면, 후백제군이 경주를 침공한 직후는 물론이고 경주를 장악한 직후에도 박위응이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후백제군이 공격을 개시한 때로부터 한참 뒤에야 박위응이 사태를 파악했다는 것은, 후백제군이 공격을 개시한 뒤에도 그가 신라군 사령부로부터 연락을 받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만약 제때 연락을 받았다면, 후백제군이 포석정에 들어올 때까지 그렇게 태평하게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라군 사령부가 그때까지도 연락을 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일부러 연락을 안 했을 리는 없다.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까 안 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전투가 개시된 직후는 물론이고 개시된 뒤에도 박위응은 연락 두절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니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에 신라군 사령부가 얼마나 초조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임금을 찾느라고 대소동을 벌였을 것이다. 만약 팩스라도 있었다면, 그들은 수신 확인도 되지 않는 팩스를 수도 없이 발송했을 것이다. 

만약 신라군이 후백제군을 물리쳤다면, 이날 신라왕이 연락 두절 상태였다는 사실이 역사서에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신라 백성들도 자기네 왕이 장시간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을 모른 채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신라군이 후백제군을 막지 못하는 바람에 그런 사실이 온 천하에 다 드러난 것이다. 

백제군 들이닥친 날, 포석정 파티 즐긴 박위응

그럼, 신라왕 박위응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위에서 소개한 역사서들에 따르면, 그는 이 날 왕비·후궁·왕족들을 거느리고 포석정에서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이 파티는 후백제군이 포석정에 들이닥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왕이 파티를 벌인 행위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좋아하는 이성과 단둘이 파티를 벌였다고 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따라서 박위응이 포석정에서 연회를 벌인 것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하지만, 국가적 비상상황 속에서 일국의 왕이 장시간 동안 연락을 끊고 파티에 몰두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박위응이 평소에도 자기의 책임을 망각하고 살았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평소에는 그런 일이 없었으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박위응이 얼마나 무책임했는지는, 후백제군이 언제부터 고울부(경북 영천)에 진을 치고 있었는지를 확인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애왕 편에 따르면 후백제군이 경주 코앞인 고울부에 진을 친 시점은 경주를 침공하기 약 2개월 전부터이고, <삼국사기> 견훤 열전에 따르면 약 1개월 전부터이고, <고려사> 태조 세가에 따르면 1개월 미만 이전부터였다.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경주를 침공하기 이전에 이미 후백제군이 경주 코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경주 코앞에 진을 친 후백제군이 1개월 미만 혹은 2개월씩이나 시간을 끈 것은, 고려 왕건이 후백제군의 배후를 공격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후백제군이 고울부에 진을 치자, 박위응은 곧바로 고려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 때문에 후백제군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공격을 보류하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왕건의 고려군이 얼른 도착하지 않자 전격적으로 경주를 침공했던 것이다. 

이처럼 이미 상당 기간 동안 후백제군이 코앞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도, 박위응은 마음의 긴장을 풀고 있었다. 그는 그저 왕건만 믿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박위응은 연락마저 끊어 놓고 포석정에서 연회를 벌였다. 군의 최고통수권자가 이 모양이었으니, 신라군이 후백제군을 막아내지 못하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고려군이 뒤늦게 도착했지만, 이들도 상황을 역전시키지 못했다. 위에서 소개한 대로, 고려 기병 5천 명은 도리어 후백제군에 의해 포위되고 말았다. 신라군이 지키지 못한 경주를 고려군도 지킬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역사속으로 사라진 신라

▲  후백제군에 의해 체포된 경애왕 박위응. 서울시 용산구 용산동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적군이 코앞에 다가온 상황에서도 책임을 망각하고 즐거움을 추구한 박위응은 단단한 벌을 받았다. 결국 그를 찾아낸 견훤은 그에게 자결을 강요했다. 책임을 망각하고 즐거움에 빠진 인물이 이런 상황에서 당당하게 자결했을 리는 없다. 견훤의 호통 소리에 눌려 마지못해 자기 몸에 칼을 들이댔을 것이다. 

전문적으로 칼을 다루는 사람이 아닌 한, 흥분 상태에서 단 한 번에 자기 몸의 급소를 찾기는 힘들다. 어쩌면 박위응은 견훤의 눈치를 보면서 자기 몸을 여러 번 찔렀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의 자결은 아주 처참했을 가능성이 있다. 

무책임한 왕이 통치하는 신라는 그 날 이후 멸망의 소용돌이로 휩쓸려 들어갔다. 경주를 장악한 견훤은 김씨 왕족인 김부(훗날의 경순왕)를 왕위에 앉힌 뒤에 돌아갔다. 그로부터 8년 뒤인 935년, 김부는 신라 왕위를 포기하고 고려 왕건에게 항복했다. 이로써 신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신라를 외국에 넘긴 사람은 경순왕 김부이지만, 신라의 재앙을 본격화시킨 장본인은 경애왕 박위응이다. 견훤이 앉힌 허수아비인 경순왕에게 망국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외국군을 코앞에 두고도 파티에 열중한 박위응에게 망국의 책임을 묻는 게 마땅하다.  

박위응 같은 왕을 둔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이 사례는, 국가적 재앙의 순간에 통치자가 책임을 망각하고 개인적 용무에 빠지게 되면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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