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0&key=20071026.22015201052

이영식교수의 이야기 가야사 여행 <38> 비운의 월광태자
신라-가야 혼인동맹 비극으로 끝나… '눈물의 씨앗' 3층석탑만 덩그러니
끝내 즉위 못하고 속세 떠나 불문귀의
망국의 한 달래며 월광사서 말년보내
국제신문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2007-10-25 20:11:55/ 본지 15면

경남 합천군 야로면의 월광사지 3층석탑.

월광태자의 탄생

해인사 국사단에 할아버지로 둔갑해 있는 가야산신 정견모주가 '원조 국모(國母)'로서의 위치와 성격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것이 대가야 종말기의 기술입니다. 신라 말의 최치원은 해인사에 머물면서 창건자 이정(利貞)과 순응(順應) 두 스님의 전기를 편찬하였고, 조선 전기의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고령현의 연혁을 밝히는데 이 전기들을 인용했습니다. 순응 스님의 전기를 인용하면서 '대가야국 월광태자(月光太子)는 정견모주의 10세손으로, 아버지는 이뇌왕(異腦王)이라 하는데, 이뇌왕은 신라에 청혼해 이찬 비지배(比枝輩)의 딸을 맞아 태자를 낳았다'고 전합니다. 

대가야 말기에 태어나는 월광태자의 계보가 여성의 정견모주에서 구해지고 있는 특별한 전승입니다. 부자상속의 전통이 성립하기 이전이었고, 해인사가 위치한 가야산이 전승의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만, 그 원인이 어떻든 간에 월광태자는 대가야와 신라와의 국제결혼에서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결혼동맹의 결렬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따르면 월광태자는 522년에서 529년 사이에 태어난 것 같습니다. '삼국사기'는 법흥왕 9년(522) 3월에 가야국왕이 사신을 보내 청혼하기에 이찬(伊) 비조부(比助夫)의 누이동생을 보냈다고 전하고, '일본서기'는 529년 3월에 신라가 왕녀를 소환하려 하자, 이미 부부를 이루었고, 자식도 낳았기 때문에 돌려보낼 수 없다는 대가야왕의 주장을 전하면서, 대가야와 신라가 전쟁관계에 돌입하는 상황을 전하고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이찬 비지배는 '삼국사기'의 이찬 비조부와 같은 인물로, 그의 딸 또는 누이동생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같은 역사적 사실을 전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결국 522년에 대가야와 신라는 왕실 간의 혼인을 통해 동맹관계를 맺었고, 여기에서 태어난 월광태자는 결혼동맹의 증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7년 동안 유지되던 결혼동맹이 529년에 신라의 배반으로 결렬되면서 월광태자의 비운은 시작되었습니다. 어머니 나라 신라와의 적대관계는 대가야 왕권 계승자였던 월광태자의 입장을 아주 곤란하게 하였을 것이고, 끝내 대가야 왕으로 즉위하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을 겁니다. 월광태자를 대가야의 마지막 왕 도설지와 같은 인물로 보려는 생각도 있지만, 신라 말의 마의태자와 같이, 태자라야 멸망에 어울리는 상징이 되고, 즉위하지 못했던 비운과 조국 멸망의 통한이 겹쳐지는 이야기로 전승되기에 안성맞춤이었을 겁니다.

월광사지

월광태자는 석가모니가 과거 세상에서 국왕의 아들로 태어났을 때의 이름이었습니다. 나병환자의 치료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려 가면서 골수를 빼주는 선행을 베풀었다 합니다. 숭고한 희생의 표상으로, 결혼동맹의 결렬로 즉위하지 못하고 희생되었던 월광태자의 이미지와 잘 맞아 떨어지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해인사나 월광사와 같은 사찰 창건의 연기 설화에 알맞은 소재였을 겁니다. 이렇게 월광태자는 그 이름부터 불교와 직결되어 있고, 해인사 관련의 전승에서 그 이름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해인사 서쪽 5리에 있었다는 거덕사(擧德寺)는 월광태자가 불문에 귀의한 곳이라 전하고, 가야산에서 가야천을 따라 남쪽으로 조금 내려 온 곳에는 월광태자가 세웠다는 월광사(月光寺)도 있습니다.

지금의 월광사에는 동서로 마주 하고 있는 통일신라 후기의 3층석탑 2기가 남아 있을 뿐이지만, 결혼동맹의 산물로서 동맹의 파탄으로 방황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던 월광태자의 비운을 그려보기에는 좋은 답사가 될 것입니다. 멸망기의 대가야 왕권은 백제에 가깝고 신라에 적대적인 정책을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라 여인을 어머니로 두었던 월광태자의 비운은 더욱 더 깊어 질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이제 대가야의 역사를 더듬는 고령지역의 여행도 종점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다음 주에는 대가야 속의 백제 고분을 찾아 멸망기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인제대 인문사회대 학장·역사고고학과 교수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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