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pUCHm1 (문서파일) 
"해동성국 발해 : 제2부 발해의 문화 - 김동우" 중 "3. 대외교류"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발해의 대외교류

해동성국 발해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소유한 황제의 나라였다. 정혜공주와 정효공주의 묘지명에는 문왕을 황상이라고 칭한 것이 보이는데, 바로 발해왕국의 위상이 어떠했는가를 가르쳐주는 발해인 스스로가 남긴 기록이다. 그리고 황제의 나라만이 가질 수 있는 연호를 제정하였다. 또한 복속한 여러 말갈 족속에 대해서는 ‘번국(蕃國)’이라 한 것도 황제의 나라로서 그 위상을 드러낸 것이었다. 즉 발해는 내부적으로 황제를 정점으로 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발해는 주변 여러 나라와 빈번한 외교를 벌였는데 신라와는 5차례, 일본과는 34차례, 당과는 100여 차례가 넘는 교섭이 있었다. 이밖에 건국 초기에 당으로부터 군사적 위협에 대비하고자 돌궐에 사신을 파견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기록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거란과도 외교활동을 벌였을 것이다. 이 중에 제일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당과의 외교활동이다. 713년 고왕 대조영이 당으로부터 “발해군왕홀한주도독渤海郡王忽汗州都督”으로 책봉을 받은 이후 당과 활발한 교섭을 벌였다. 이후 발해의 역대 왕들은 발해군왕 또는 발해국왕이라고 당으로부터 책봉을 받았다.

727년 무왕 대무예가 고인의를 대표로 하는 사신단을 일본에 파견함으로써 일본과의 외교가 시작되었다. 이후 발해는 일본에 모두 34차례의 사진을 파견하였으며, 일본도 발해에 사신을 13차례를 보냈었다. 당시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체제를 이룬 시기로서 내부적으로 일왕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서 발해를 일본과 동등한 국가로 보지 않고 ‘번국’으로 대우하였다. 발해로 보내는 국서에 발해왕이 조공하는 것을 가상히 여긴다고 한다든지, 발해 자신들을 천손이라고 칭하고, 외숙과 생질의 관계를 맺고자 하는 내용의 발해 국서를 고치게 하는 등을 통해 볼 때 일본이 발해와 원했던 외교형식은 어디까지나 조공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당나라는 한족漢族의 전통적인 중화사상에 따라 발해를 황제국으로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며, 일본은 발해를 ‘번국’으로 대우하였다. 그런데 발해는 황제의 나라라는 자부심을 당나라와 일본과 외교를 할 때는 잘 드러내지 않은 듯하다. 당나라와는 사소한 외교적 마찰을 피하고자 하였고, 일본과의 외교도 교역의 이익을 획득하거나, 일본을 발해의 후원세력으로 삼고자 했을 뿐이었다. 발해는 대외적으로는 현실적인 여러 가지 이유로 당과 일본에 조공하는 왕국(王國)이었지만, 내부적으로 황제의 위상을 갖추었던 나라였던 것이다. 

하지만 발해는 신라와는 활발한 외교활동을 펴지 않았다. 또한 신라인들도 발해를 자신들이 멸망시킨 고구려의 잔당이 세웠던 국가로 낮추어 보려고 하거나, 말갈족이 건국한 나라라고 하면서 적대감을 나타내기도 하여 발해와의 외교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고왕 대조영이 건국 초기에 신라에 사신을 보낸 것이 첫 번째 외교활동이었다. 790년과 812년에 신라가 북국인 발해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귀족항쟁기로 접어든 어려운 정세를 해결하고자 한 듯 여겨지며, 마지막으로는 거란의 위협을 받고 있던 발해가 신라에 원조를 요청한 것이다. 이렇듯 당시 동북아시아 각국의 정세 변화에 따라 양국 간에는 소극적인 외교활동만 있었다. 그러나 발해에서 신라로 통하는 ‘신라도’로서 신라 천정군(함남 덕원)으로부터 발해의 책성부(길림성 훈춘)까지 39개의 역이 있었으니, 기록에 남겨지지 않은 외교활동도 있었을 것이며 양국 간 경제적, 문화적 교류도 적지 아니하였으리라 여겨진다.

넓은 영토를 소유하였던 발해에는 주변 국가로 가는 일본도, 신라도, 조공도, 영주도, 거란도 등 5개의 주요한 대외 교통로가 있었다. 일본도는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 용천부에서 동경 용원부를 지나 바닷길을 통해 일본으로 가는 길이며, 신라도는 동경 용원부에서 신라로 가는 길이다. 조공도는 서경 압록부를 지나 해로로 발해만을 거쳐 산동반도에 이르는 길이며, 영주도는 육로로 당의 동북지방 거점인 영주로 가는 길이다. 거란도는 부여부를 지나 거란에 이르는 길이다. 이밖에 담비의 길이라고 하여 발해 수도에서 시베리아로 통하는 모피교역로가 있었다. 이와 같이 정비된 도로망을 통해 국가를 효율적으로 통치하였을 뿐만 아니라 활발한 교류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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