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85987

이씨와 김씨, 조선 왕비가 될 수 없었던 이유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 두 번째 이야기
12.01.18 11:54 l 최종 업데이트 12.01.18 11:54 l 김종성(qqqkim2000)

▲  <해를 품은 달>의 허연우(한가인 분). ⓒ MBC

가상의 인물들을 소재로 한 MBC 사극 <해를 품은 달>은 왕세자 이훤의 혼례를 중심으로 스토리가 전개되고 있다. 지난 12일 제4부에서는 비운의 소녀인 허연우가 세자빈 간택(선발)에서 예상을 깨고 최후의 1인이 되었다.

만약 오늘날 이런 선발대회가 열린다면, 아마 그 인기는 웬만한 스타 오디션을 능가할 것이다. '계모'와 '두 의자매'의 구박을 피해 어떻게든 '유리 구두'와 '성형수술비'를 장만하는 여성들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세자빈 선발에 대한 조선시대 분위기는 의외로 냉랭했다. 국혼(왕실 혼인)은 일단 피하고 봐야 한다는 것이 대세였다. 1837년 제24대 헌종(정조의 증손)의 국혼 때는 지원자가 전국적으로 12명이었고, 1882년 왕세자 이척(훗날의 순종)의 국혼 때는 25명이었다. 전국의 처녀들에게 지원을 강요했는데도, 지원자는 대개 30명을 넘지 않았다.

신데렐라는 요정의 도움으로 하녀·마부와 말·마차·구두·드레스를 구해서 왕자의 무도회에 가까스로 참석했다. 조선시대 여성도 국혼에 참가하려면 몸종·유모·미용사와 가마까지 준비해야 했다. 

이것은 까닥하다가는 집안 살림을 거덜 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잘못하다가는, 자식 혼수를 위해 모아둔 '정기예금'이나 '적금'까지 탕진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국혼을 기피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 같은 비용문제 때문이었다. 

많은 비용을 들이더라도 합격 가능성만 있다면 문제는 좀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합격자가 사전에 내정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돈 쓰고 들러리나 설 수밖에 없었다.   

어찌어찌해서 최종 합격자가 된다 해도, 이것은 자칫 재앙의 씨가 될 수도 있었다. 세자빈이나 왕비를 배출하고 의기양양해질 수 있으려면, 가문이 정치적으로 막강해야 했다. 정치적 풍파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가문만이 최종 합격의 기쁨을 공공연히 드러낼 수 있었다.  

웬만한 가문들은 까딱 잘못하다가는 정쟁에 휩쓸려 멸문지화를 당하기 십상이었다. 권력이 없는 집안이 혹시라도 합격자를 배출했다면, 이런 가문은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살아야 했다. 왕실과 사돈을 맺는다는 것은 이처럼 힘겹고 무서운 일이었다. 

▲  <해를 품은 달>의 세자 이훤(김수현 분). ⓒ MBC

왕비가 될 수 없는 2가지 성씨는?

이런 이유들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혼을 기피했지만, '원칙상'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는 2가지 성씨가 있었다. 어느 어느 성씨였을까?

그중 하나는 이씨였다. 왕실과 동성(同姓)이라는 이유로 이씨는 국혼에서 아예 배제되었다. 그래서 이씨들은 국혼이 다가와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국혼을 희망하고 그것을 감당할 만한 권세가 있는 일부 이씨 가문의 입장에서는 매우 애석한 일이었다. 

또 다른 성씨는 김씨였다. 이씨는 무조건 배제된 데 비해, 김씨는 '원칙상' 배제되었다. 김씨가 원칙상 배제된 것은, 음양오행 사상의 영향으로 '김씨는 이씨에게 해롭다'고 인식됐기 때문이다. 

사주를 볼 때, 우주만물을 구성하는 요소인 오행(五行) 속에 목·토·수·화·금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사주팔자에 목(木) 성분이 너무 강해서 성격이 지나치게 냉정하다거나, 화(火) 성분이 너무 강해서 성격이 과도하게 조급하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 목·토·수·화·금에는 상호 간에 이롭거나 해로운 관계가 존재한다. 이것을 오행의 상생관계 혹은 상극관계라 한다. 이중에서 상극관계만 살펴보면, 목은 토(土)에 해롭고 토는 수(水)에 해롭고 수는 화에 해롭고 화는 금에 해롭고 금(金)은 목에 해롭다. 

자연의 이치를 생각하면 오행의 상극관계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나무뿌리가 땅속을 파고드니 '목'은 '토'에 해롭고, 땅이 물의 흐름을 막거나 바꾸니 '토'는 '수'에 해롭고, 물이 불을 끄므로 '수'는 '화'에 해롭고, 불이 금속을 녹이니 '화'는 '금'에 해롭고, 금속이 나무를 자르니 '금'은 '목'에 해롭다고 보는 것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김씨는 '금'에 해당하고, 이씨는 '목'에 해당한다고 생각했다. 김이라는 글자는 '금'과 같고, 이(李)라는 글자에는 목(木)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김씨의 금속 성분이 이씨의 나무 성분을 해칠 수 있기 때문에 김씨 여성은 이씨 왕조에게 해롭다고 본 것이다. 


▲  왕비의 처소인 경복궁 교태전.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 소재 ⓒ 김종성

'김이라는 성은 목(木)이라는 성에 해롭다'

이런 관념이 실제 존재했다는 점은 선조 10년 5월 1일자(1577년 5월 18일) <선조수정실록>의 주석에서 나타난다. 광해군 때인 1616년에 편찬된 <선조실록>를 인조 쿠데타 이후인 1643년에 수정했다 하여 <선조수정실록>이라 부른다. <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할 때 아래와 같은 주석이 첨가되었다.  

"원래 궁중에서는 옛 임금들 때부터 '김이라는 성은 목(木)이라는 성에 해롭다'는 말이 있었다."

이처럼 김씨는 이씨 왕조에 해롭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김씨 처녀들은 국혼을 크게 두려워 할 이유가 없었다. 합격 가능성이 낮은지라, 국혼에 지원하라는 압력도 약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조선 전기에는 제2대 정종의 부인인 정안왕후 김씨를 제외하고는 김씨 왕후가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았다. 

정안왕후 김씨와 결혼할 때만 해도, 정종은 왕권과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었다. 동생 이방원이 쿠데타를 일으킨 뒤에 자신이 곧바로 왕이 될 수 없으니까 형인 정종에게 몇 년간 왕위를 맡겼을 뿐이었다. 

또 김씨가 1355년에 출생한 점을 볼 때, 김씨와 정종은 1392년 조선 건국 이전에 결혼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이들의 혼인이 이루어진 것 같다. 만약 정종이 왕이 될 가능성이 있는 상태에서 결혼했다면, 이들의 혼인은 처음부터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 전기만 해도 '김씨 배제 원칙'이 잘 지켜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임진왜란으로 조선왕조가 일대 충격을 받은 뒤부터 이 원칙은 금이 가고 말았다. 임진왜란 직후인 1602년에 인목왕후(인목대비) 김씨가 왕비가 된 것을 시작해서 조선 후기에만 9명의 김씨 왕비가 등장했다. 조선 전기의 정안왕후까지 합하면 김씨 왕비는 총 10명이다. 

실제로는 왕후가 된 적이 없는데도 나중에 왕후로 형식상 추존된 여인들을 빼고, 실제로는 왕후가 되었는데도 나중에 정치적 이유로 '왕후가 아니었던 여인'으로 격하된 여인들(예컨대, 장희빈)을 더할 경우, 조선시대의 실제 왕후는 총 36명이다. 참고로, 조선 전기의 임금은 14명, 후기의 임금은 13명이다. 

36명의 실제 왕후 중에서 김씨가 10명으로 1위, 윤씨가 6명으로 2위였다. 민씨와 한씨가 각각 3명으로 그 뒤를 이었다. 왕후가 될 수 없다는 김씨가 가장 많은 왕후를 배출한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조선 후기 지식인들은 이런 현상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임진왜란 직후에 선조가 오랜 금기를 깨고 김씨 왕후를 받아들이자, 당시 지식인들은 이러다가 왕조가 잘못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우려했다. 위에 소개한 <선조수정실록>의 이어지는 부분에서 그런 분위기가 나타난다. 

"원래 궁중에서는 옛 임금들 때부터 '김이라는 성은 목(木)이라는 성에 해롭다'는 말이 있었다. 그래서 여인을 뽑을 때는 항상 김씨를 제외했다. 주상(선조)께서 등극하신 후 3명의 후궁이 모두 김씨인 데다가 인목왕후까지 중전의 자리를 이으니, 식자들은 불길하지 않을까 하고 우려했다."


▲  인목왕후 김씨의 무덤이 있는 목릉.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에 있다. 인목왕후는 ‘김씨는 왕후가 될 수 없다’는 금기를 깨고 왕후가 된 여인이다. ⓒ 김종성

조선 전기만 해도 금기시되던 김씨 왕후가 조선 후기에 대거 배출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임진왜란의 충격을 거치면서 조선사회가 기존의 통념으로부터 상당부분 해방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기존 시스템이 흔들리면서 양반집단의 위상이 타격을 받고 서민층이 새로운 주역으로 성장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 전기와 조선 후기는 왕조만 같았을 뿐 성격은 전혀 달랐다. 이런 변화가 김씨 왕후에 대한 터부를 깨뜨리는 데 일조했다고 볼 수 있다.

'김씨 여인은 이씨 왕조에 해롭다'는 통념이 깨진 것은 좋은 일이나, 이것은 김씨 처녀들에게 새로운 고민을 안겨주었다. 국혼에서 김씨가 합격할 가능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전기의 김씨 처녀들은 "우리는 어차피 안 되잖아요"하면서 국혼을 기피할 수 있었지만, 후기의 김씨 처녀들은 그런 변명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국혼으로 인한 압박을 더 많이 받아야 했다. 

결국, 국혼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웠던 것은 이씨 처녀들뿐이었다. 수많은 처녀들이 되지도 않을 국혼 때문에 스트레스를 앓고 있을 때도, 이씨 처녀들은 그런 걱정 없이 '내 님은 누구일까? 어디 계실까? 무엇을 하는 님일까?' 하며 행복한 상상을 즐겼을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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