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65373

사병들이 판치는 나라, 공권력이 부끄럽다
[게릴라칼럼] 역사를 통해 본 사병... 요동정벌도 결국 사병때문에 무산
12.08.09 10:12 l 최종 업데이트 12.08.09 16:35 l 김종성(qqqkim2000)

▲  2일 오후 직장폐쇄된 경기도 안산 SJM공장에서 용역업체 '컨택터스' 직원들이 철조망이 겹겹이 쳐진 정문안쪽에서 방패를 들고 서 있다. ⓒ 권우성

[기사 수정 : 9일 오후 4시 35분]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제5조 2항에서는 "국군은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을 사명으로 하며, 그 정치적 중립성은 준수된다"고 규정했다. 이 조항이 갖는 의의 중 하나는, 국군을 대한민국의 최고 무력기구로 규정했다는 점이다. 

헌법 제29조 2항은 경찰공무원의 공무상 손해에 대한 보상을 규정함으로써, 보조적 무력기구인 경찰 조직을 헌법 조문에 간접적으로 등장시켰다. 이처럼 현행 헌법에 따르면, 대한민국에서 무력을 보유하고 행사해야 할 집단은 일차적으로는 국군이고 이차적으로는 경찰이다.

이 외에는 어떤 개인이나 단체도 무력을 보유·행사할 수 없다는 것이 대한민국의 법정신이다. 인기리에 방영됐던 SBS 드라마 <추적자>에서 억울한 백홍석(손현주 분)이 끝내 유죄를 선고받은 사실에서 나타나듯이, 아무리 절절한 사연이 있더라도 국군이나 경찰 외에는 무력을 보유·행사할 수 없는 것이 대한민국의 법정신이다. 실제로 문민화된 대한민국 현실에서는 경찰만이 공공의 질서와 안녕을 위해, 그리고 국민의 안전과 재산을 보호를 목적으로 무력 사용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법정신은 불공평하게 실현되고 있다. 백홍석 같은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허용되지 않는 무력의 보유·행사가 힘 있는 사람들에게 허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 부품업체인 만도와 SJM의 직장폐쇄 과정에서 사병이나 마찬가지인 용역업체가 동원된 사실에서 나타나듯이, 대한민국에는 경찰이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사병의 공간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사병이 비대화되면 국가 존립이 위태롭다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대한민국 사병의 역사는 건국 이후 64년간 계속되어 왔다. 우리는 건달 혹은 깡패라고 불리는 폭력조직들이 자체적으로 '병력'을 충원하고 유흥업소와 시장 등지에서 공공연히 '세금'을 징수해왔으며, 경찰권력이 이런 현상을 묵인해 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또 대기업들이 구사대나 용역업체를 동원해서 노동자들의 합법적 단체행동을 탄압하고 경찰은 이런 현상을 수수방관해왔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다. 대한민국 경찰은 헌법으로부터 위임받은 무력 보유 및 행사의 권한 중 상당부분을 민간 사병들에게 떼어준 셈이다. 

물론 어느 시대 어느 나라건 간에 군경이 무력을 100% 장악할 수는 없다. 사병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사병의 존재를 무한정 방치할 수도 없다. 사병이 지나치게 비대해질 경우에는 군경이 약화되고, 그렇게 되면 국가의 존립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병의 비대화가 국가 존립에 얼마나 위험한가는 지금으로부터 약 600년 전인 14세기 말과 15세기 초의 역사에서 확인된다. 고려 말과 조선 초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 나타난 사병의 비대화 현상은 고려 초기의 노비제도 개정으로부터 비롯되었다. 

▲  군인들의 감독 하에 선적작업을 하고 있는 고려시대 노비들. 인천시 강화군 하점면 강화역사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서기 1039년에 고려 제10대 주상(왕의 공식 명칭)인 정종은 '천것은 어머니의 혈통을 따르도록 한다'는 법령을 제정했다. 여자 노비의 몸에서 태어난 아이는 여자 노비의 주인이 소유하도록 한 것이다. 

유력한 가문들은 이 제도를 활용하여 노비 숫자를 경쟁적으로 늘려갔다. 자기 집 여자노비가 다른 집 남자 노비나 일반 양인(자유인)과 성관계를 하고 출산을 하도록 부추긴 것이다. 이 점은 조선 태종 14년 6월 24일자(1414년 7월 13일) <태종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여자노비 한 사람이 주인의 권장 하에 여러 남자를 가까이하는 현상이 비일비재했다. 

오늘날의 가문은 종족조직에 불과하지만, 고려시대 가문은 경제조직 및 정치조직의 성격도 겸비했다. 가문을 단위로 경제행위와 정치행위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려시대 가문은 오늘날의 기업이나 정당 지부의 성격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유력한 가문들이 노비 숫자를 늘리는 것은, 오늘날로 치면 기업이 종업원을 늘리는 것이나 정당이 당원을 늘리는 것과 유사했다. 다른 게 있다면, 오늘날의 기업이나 정당은 채용시험이나 당원 모집을 통해 세력을 확장하는 데 비해, 고려시대 가문은 여자 노비의 출산을 통해 그렇게 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이에 따라, 고려시대에는 대규모 노비를 보유한 가문들이 많이 생겨났다. 조선 건국 직후에 사헌부에서 태조 이성계에게 제출한 상소문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태조 1년 8월 20일자(1392년 9월 7일) <태조실록>에 수록된 내용이다. 

"왕씨 오백년간 종친과 귀족들이 노비를 많이 끌어들여, 천여 명에 이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한 가문에서 대규모 노비를 보유하는 현상은 조선 초기를 배경으로 한 <장화홍련전>에도 반영됐다. 이 소설에서는 장화·홍련 자매의 어머니가 시집 올 때 수천 명의 노비를 데려왔다고 했다.  

이렇게 1천 명 이상의 노비를 거느린 가문들은 사실상 오늘날의 대기업과 유사했다. 수많은 노비가 마당만 쓰는 게 아니라 주인의 농경지를 경작했기 때문이다. 

노비가 증가함에 따라 양인은 자연히 감소했다. 위의 태종 14년 6월 24일자 <태종실록>에서는 "(고려시대에는) 노비가 날로 증가하고 양인은 날로 감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양인 숫자가 감소하면, 국가에 세금을 내고 국가의 병사가 될 인적 자원이 감소하기 마련이다. 대신, 민간 가문은 그만큼의 인적 자원을 확보하게 된다. 

이성계의 등장도 사병 덕분이었다 


▲  노비 출신 사병이 많아지면 정부군 병력이 줄어든다. 사진은 경기도 수원시 화성행궁에서 연출된 조선시대 병사들의 무예훈련. ⓒ 김종성

민간 노비의 증대는 정부군의 영역을 침해했다. 노비들이 주인을 위해 칼과 몽둥이를 들고 사실상의 병사로 변신했기 때문이다. 이성계가 고려를 손쉽게 전복할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도 여기에 있다. 

이성계 자신이 사병을 거느리고 고려 정계에 진출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고려 말은 정부군이 약하고 사병이 판치는 세상이었다. 유력한 가문에 편입된 노비들이 '국군' 대신 가문의 군복을 입었기 때문이다. 

만약 정부군이 강했다면, 변방인 여진족 거주지 출신의 이성계 군단이 실권을 장악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정부군에 편입되어야 할 인적 자원들이 수많은 사병집단으로 분할되어 있었고, 그런 사병집단 중에서 이성계 군단이 가장 강했기 때문에 이성계가 새 왕조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사병의 비대화가 고려왕조의 멸망 요인 중 하나였던 것이다. 

사병의 비대화는 왕조를 멸망시키는 요인으로만 작용한 게 아니라 한민족의 숙원 중 하나를 무산시키는 요인으로도 작용했다. 요동수복 즉 만주수복의 염원을 산산조각으로 만드는 데도 사병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왜 그럴까? 

사병 문제는 조선왕조가 건국된 후에도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이성계와 그 주변 세력이 건국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이들에게 사병이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건국 직후 주도권을 잡은 정도전에게 크나큰 부담이었다. 요동정벌을 추진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사병을 해체하고 그들을 정부군으로 편입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도전은 사병 혁파를 추진했지만, 그 성과는 불완전했다. 왕자 및 공신들이 사병을 제대로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병 혁파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이방원 측이 무기를 숨기고 훗날을 기약한 사실에서도 그 점이 잘 반영된다. 

서울 광화문광장 오른편에 옛 한국일보 자리가 있다. 지금은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있다. 요동정벌이 추진되던 태조 7년 8월 26일(1398년 10월 6일) 밤중에, 정도전은 그곳 정자에서 측근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때 정도전을 급습하여 목숨을 빼앗은 것이 이방원의 수하들이었다. 이방원의 사병이 정도전을 죽이고 요동정벌운동을 무산시킨 셈이다. 


▲  정도전의 흔적이 남아 있는 서울시 종로구 삼봉길. 사진 오른쪽 위의 녹색 표지판에 '삼봉길'이라고 쓰여 있다. 왼쪽 건물은 종로구청. 정도전은 이곳에서 살다가 이 근처에서 암살당했다. ⓒ 김종성

이런 사례들에서 나타나듯이, 사병은 왕조를 멸망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뿐만 아니라 민족의 염원까지 무산시키는 요인으로도 작용할 수 있다. 민족의 염원을 성취하려면 민족의 의지를 집행하는 군대가 강건해야 하는데, 군대의 역량을 좀먹는 사병이 판을 치면 군대가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없는 것이다. 

제역할 못하는 대한민국 공권력  

사병이 얼마나 위험한가는, 이방원이 사병 혁파에 목숨을 건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정도전의 사병 혁파를 앞장서서 반대했던 이방원이 집권 후에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사병 혁파를 추진했다는 사실은, 이방원 자신도 사병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는 조선 초의 요동정벌 못지않은 중대한 염원들이 많다. 그중 하나는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고 노동자 서민의 생활을 보장하는 일이다. 

헌법 제5조 2항에 규정된 것처럼 국군이 국가의 안전보장과 국토방위의 신성한 의무를 수행하고 경찰이  민간의 '사병'을 제대로 견제할 때에만 이런 염원은 실현될 수 있다. 민간의 사병이 판을 치면, 국민의 인권과 서민의 생활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도 및 SJM 사태에서 확인됐듯이, 국군도 아니고 경찰도 아닌 사병 집단이 무력을 동원해 그런 염원을 짓밟고 있다. 경찰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사태에서 사병 집단을 동원한 사람들은 노동자 서민의 인권을 침해했을 뿐만 아니라 군경의 신성한 권리의무까지 침해했다. 군경이 독점적으로 사용해야 할 무력을 그들이 행사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공권력은 이런 현실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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