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2505&key=20080910.22018205036
답사단을 태운 버스는 허베이성(河北省) 서북쪽 발해만과 가까운 창리현에 닿는다. 갈 길이 먼데 해가 떨어진다. 19세기와 21세가 공존하는 읍내 풍경을 뒤로 하고 '갈석산'이라 적힌 도로 표지를 따라간다. 1시간 쯤 지방 소로를 내쳐 달려가니 갈양호(碣陽湖)라 이름된 호수가 나오고 온통 바위 천지인 허연 산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천부경
선도 연구자들은 우리 고유의 선도는 수천년 전 환인·환웅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한다. 당시에는 선도가 개인의 완성을 위한 수련법일 뿐만 아니라, 국가와 사회, 가정을 유지하는 사회적 규범으로 기능했다. 흔히 신선도라고 일컬어지는 선도의 경전이 '천부경(天符經·사진)'이라고 한다.
한민족의 뿌리 - 단군조선을 찾아서 <5> 갈석산의 선도(仙道)자취
`仙人의 땅` 갈석산에 단군조선이 어른어른
갈석산 인근 발해만에 왕궁 버금가는 유적들
진시황이 한번 찾았던 행궁터로 포장됐지만 고조선 도읍 일수도
中 역사서 곳곳에도 한나라 - 위만조선의 국경일 가능성 기록
불로장생 꿈 꿨던 진시황이 찾아 나섰던
갈석산의 그 신선이 단군은 아니었을까
국제신문중국 갈석산 = 박창희 기자 chpark@kookje.co.kr2008-09-09 20:57:03/ 본지 18면
중국 창리현에 있는 갈석산 전경. 진시황, 한무제, 조조 등 중국의 역대 제왕들이 올랐다고 하며, 고조선 선도문화의 자취를 더듬을 수 있는 곳이다. 사진 제공=권태균('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역사의아침 출간) 사진 작가)
진시황과 불로초
기원전 221년, 첫 통일 제국을 건설한 진시황은 불로장생을 꿈꾸었다. 진시황은 신하들에게 불로초를 찾으라고 요구했다. 진시황 28년(기원전 219년), 제(齊)나라의 방사(方士·신선의 술법을 닦는 사람)인 서복(徐福, 일명 서불·서시)이 뜻을 받들어 재계(齋戒)한 후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을 데리고 바다속의 삼신산을 찾아 나선다.
진시황 재위 32년(기원전 215년), 그가 갈석산(碣石山)으로 행차한다. 갈석산에 선인(仙人)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터다. 연나라 출신 노생(盧生)을 시켜 선문(羨門)과 고서(高誓)라는 신선을 찾아보도록 하고, 한종(韓終)과 후공(侯公) 석생(石生)에겐 신선이 먹는 장생 불사약을 구하도록 한다. 그러나 기대했던 불로초가 있다는 보고는 들어오지 않는다.(사마천 '사기(史記)' 진시황 본기 재구성)
진시황의 불로초 이야기는 지금에사 '헛된 꿈'의 대명사가 되었지만, 역사는 그 헛된 꿈마저도 기록한다. 사료가 빈약한 우리로선 이런 류의 이야기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야기의 키워드는 진시황, 불로초, 갈석산, 선인이다. 갈석산은 무엇을 감추고 있고 그 곳의 선인은 과연 누구였을까.
롼허를 지나
중국 쑤이중현 만가진에 있는 '갈석궁지(碣石宮址)'. 진시황 행궁지로 소개되고 있으나 한국 학계 일각에서는 위만조선의 유적이 아닐까도 추측한다. 박창희 기자
베이징-텐진을 잇는 고속도로는 중원을 가로질러 발해만 서북쪽을 향해 달린다. 여기에도 옥수수밭 천지다. 경작지의 인공 수로마다 녹조가 가득하다. 수백 ㎞를 가도 옥수수밭과 버드나무 가로수뿐이라고 조선족 가이드가 설명한다.
버스를 탄지 3시간. 큰 강 하나를 만난다. 롼허(河·난하)다. 강폭은 무지 넓은데 군데군데 토사가 쌓여 물흐름이 기신기신하다. 강이 피곤한 기색이다.
"잘 봐 두세요. 이 강은 우리 역사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고조선과 연(燕)나라, 위만조선과 진·한(秦·漢)의 국경이었을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있어요. 고조선의 서쪽 경계가 된다는 말이죠."(고고학자 복기대 박사)
롼허는 내몽고에서 발원해 남서쪽을 달려 베이다이허(北戴河·북대하)에서 다시 서쪽으로 흘러 수십㎞ 떨어진 창리현(昌黎縣·창려현)에서 발해만으로 유입된다. 총 길이 880㎞로 압록강(803㎞)보다 조금 길다. 요서와 요동을 가르는 고대의 요수(遼水)가 현재의 랴오허(遼河)가 아니라 롼허라는 주장도 있다.
얘길 듣고보니, 롼허를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의 분위기가 다소 다르다. 강 서쪽은 중원문화, 강 동쪽은 고조선 문화권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지 모른다. 하류로 내려올수록 강물이 형성해 놓은 충적층이 드넓게 펼쳐진다.
수수께끼의 신악(神岳)
답사단을 태운 버스는 허베이성(河北省) 서북쪽 발해만과 가까운 창리현에 닿는다. 갈 길이 먼데 해가 떨어진다. 19세기와 21세가 공존하는 읍내 풍경을 뒤로 하고 '갈석산'이라 적힌 도로 표지를 따라간다. 1시간 쯤 지방 소로를 내쳐 달려가니 갈양호(碣陽湖)라 이름된 호수가 나오고 온통 바위 천지인 허연 산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갈석산입니다. 옛날 신선들이 살았다고 하고, 진시황 한무제 조조 등 중국 역대 제왕 9명이 여길 올랐다고 전해집니다."(복기대 박사)
등산로 입구에 자리한 공안국 건물 벽면에 4구체 선전문구가 요란하다. '神岳碣石(신악갈석)/觀海勝地(관해승지)/九帝登臨(구제등림)/千古之謎(천고지미)/誰可解(수가해)…'.(신이 내린 갈석산은 바다를 바라보는 뛰어난 땅, 아홉 제왕이 오른 곳, 아득한 그 옛날 수수께끼를 누군들 풀 수 있으리…)
발목을 붙잡는 땅거미를 물리치고 산을 오른다. 산세가 가파르다. 오를수록 전망이 좋아진다. 쓸만한 바위면마다 명구가 휘날린다. 앞을 보니 '해탈령(解脫嶺)'이요 옆을 보니 '천문제일(天門第一)'이다. 탄성이 터지는 곳을 보니 '입승(入勝)'이다. '운보과천(雲步跨天)'이란 각자도 있다. 구름 같은 발걸음으로 하늘을 달린다…. 어둡살이 묘한 정취를 자아낸다. 신선이 곁에 와 있는 것 같다.
고조선의 선인들
갈석산은 고조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산이다. 중국 역사서인 '사기'와 '산해경(山海經)', 상서(尙書)의 '우공(禹貢)' 등에 관계 기사가 나온다. '우공'에는 '조이(鳥夷)라는 오랑캐가 짐승의 가죽을 기주 땅에 공물로 가져오는데, 그들이 사는 데는 갈석을 오른쪽으로 끼고 하(河)로 들어간 곳에 있다'는 구절이 있다. '하(河)'는 황하(黃河)를 지칭하고, '조이'(鳥夷)는 예맥족을 말한다.
후한 초기 반고(班固)가 쓴 '한서(漢書)'에는 '(한 무제가) 동쪽으로 갈석을 지나 현도와 낙랑을 군(郡)으로 삼았다'는 대목이 있다. 한 무제가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을 멸하고 설치했다는 한사군이 갈석 주변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는 한사군이 설치되기 전엔 갈석산이 한과 위만조선의 국경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갈석산과 관련된 역사를 기록한 중국의 사서들.
그렇다면 이런 역사적인 사건들이 있기 전, 진시황이 갈석산에 와서 만나려 했던 '선인'들은 고조선인들이 아니었을까. 함께 답사한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정경희(한국 선도 전공) 교수는 아주 흥미로운 해석을 한다.
"갈석산이 초기 단군조선의 영역이었다고 보면, 이곳을 우리 고유의 선도(仙道) 거점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요. 이런 곳에 진시황이 왜 왔을까요. 고조선의 선인들을 만나러 오지 않았을까요. 우리 선도는 중국 선도(도교)와 달라요. 중국 선도가 양생술(養生術), 즉 늙지 않고 오래 사는 불로장생을 추구하는 신선술이라면, 우리 선도는 수련을 통해 자기 실체를 깨닫고 홍익인간의 높은 정신세계를 찾는 것이지요. 진시황의 행보를 이런 관점에서 연구할 필요도 있습니다."
고조선의 선도는 우리 문헌에도 나온다. '삼국유사'에는 '단군왕검이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고 아사달에서 산신이 되었다'고 했다. 단군을 산신(선인)과 연결시킨 것은 선도의 영향이라고 보는 설이 유력하다. 그러한 사상이 고구려의 조의선인, 백제의 무사도, 신라의 화랑도로 이어졌다고 한다.
하산 길은 어둡살이 점령해 있었다. 갈석산을 돌아나오며 정 교수가 아쉬움이 남은듯 얘기했다. "사람들이 잘 몰라요. 중국 도교와 우리 선도를 혼동하고, 중국 것만 대단한 것으로 알잖아요. 유구한 고조선 역사 속에서 우리가 정말로 찾아야 할 부분이 바로 선도일 거예요. 그게 우리 정신문화의 바탕이거든요."
진시황 행궁지의 비밀
갈석산이 있는 발해만 연안에는 진시황의 유적이 즐비하다. 만리장성이 끝나는 산해관 인근의 친황다오(秦皇島)시 해변에는 진시황이 신선을 찾는 전설을 모티브로 한 '진황구선입해처(秦皇求仙入海處)'가 있다. 진시왕이 왕림했다는 행궁지도 여러 군데다. 최근 발굴되고 있는 행궁지 유적은 우리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답사단은 일정상 접근이 쉬운 쑤이중현(綏中縣)의 만가진(萬家鎭)에 있는 '갈석궁지(碣石宮址)'를 찾았다. 유적지는 파도가 넘실거리는 발해만과 붙어 있었다. 발굴조사 결과, 남북 500m, 동서 260m의 장방형 건물지가 드러났는데, 중국학계는 이곳을 진시황 행궁지로 본다. 현장에는 지름 30㎝ 가량의 주춧돌과 타다가 만 나무기둥(모조품), 배수로 등을 노출시켜 야외 박물관처럼 꾸몄다. 유물은 진·한시대의 것이라고 하지만 연구·검증이 필요하다.
행궁지는 이밖에도 3~5개가 더 있다고 한다. 발굴이 진행되는 것도 있고, 관광지로 만든 곳도 있다. '사기'에는 진시황이 갈석산에 한번 온 것으로 돼 있는데, 그가 머물렀다는 행궁지는 왜 이렇게 많을까. 의문은 이뿐만이 아니다. 이들 행궁지는 왜 하나같이 왕궁에 버금가는 규모와 유물을 쏟아내는가. 또 어째서 한결같이 전한(前漢) 중기(기원전 100년) 무렵에 폐기되고 있는가.
학계의 깊이있는 연구 검토가 필요하겠지만, 한국의 일부 학자들은 이곳이 단순한 행궁지가 아니라 한 왕국의 수도, 즉 왕경(王京)일 수도 있다는 의견을 개진한다. 진·한시기에 해당하는 시대에 발해만 북부 연안에 왕경을 조성한 세력이 만약 위만조선이라면, 고조선의 마지막 도읍지라는 왕험성(王險城) 또는 왕검성(王儉城)은 바로 여기가 될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한 무제가 설치했다는 한사군 중 낙랑군의 거점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고 보니, '임둔(臨屯)'이란 글자를 새긴 봉니(封泥·문서를 봉하던 진흙 도장)가 출토된 금서시(錦西市) 태집둔(邰集屯)이 여기서 북쪽으로 100여㎞ 떨어진 지점이다. 갈석궁지가 파괴된 후 태집둔에 임둔군이 들어선 것은 아닐까. 이러한 일들이 모두 우연일 것인가.
진시황이 찾던 불로초는 '헛된 꿈'이 되었지만, 갈석산에서 고조선의 선도를 찾는 것은 '한민족의 꿈'이 되었다. 2200여 년의 시차가 아득한 꿈같지가 않다. 진시황이 찾던 그 '선인'을 누군가가 찾아내야 한다.
■ 단군과 선도문화
- 하늘·땅·사람 조화로운 삶 추구
- 단군의 홍익인간 그 뿌리는 仙道
단군(檀君)은 누구일까.
민족시조, 건국시조, 군왕, 제사장, 선인(仙人), 신선(神仙) 등 다양한 정의가 가능하다. 이 모두를 포괄하는 존재가 단군일 수도 있다. 단군의 건국이념은 잘 알려진대로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 이치로서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러한 건국이념의 바탕이 우리 고유의 선도(仙道)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선도는 고조선 문화의 뿌리예요. 단군의 홍익인간 사상이 선도에서 나왔어요. 중국이 내세우는 요하문명론의 바탕이 동이문화였고, 그게 바로 단군조선의 모체 아닙니까. 단군조선을 찾으려면 선도를 이해해야 합니다."(장영주 국학원 교육원장)
천부경
선도 연구자들은 우리 고유의 선도는 수천년 전 환인·환웅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한다. 당시에는 선도가 개인의 완성을 위한 수련법일 뿐만 아니라, 국가와 사회, 가정을 유지하는 사회적 규범으로 기능했다. 흔히 신선도라고 일컬어지는 선도의 경전이 '천부경(天符經·사진)'이라고 한다.
구전 또는 고대 문자로 전해져온 '천부경'을 한문으로 번역, 체계를 세워 오늘날에 이르게 한 이가 신라말의 대학자 최치원이다. '삼국사기'에 실려 전하는 '난랑비(鸞郞碑) 서문'에 핵심이 나타나 있다. '國有玄妙之道 曰風流(국유현묘지도 왈풍류·나라에 현묘한 진리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고 한다)'. 이 글에서 최치원은 "풍류의 근원은 선사(仙史)에 이미 기록되어 있고, 유·불·선 3교의 핵심이 모두 이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했다. 장영주 원장은 "여기서 풍류는 먹고 노는 것이 아니라 바람처럼 자취없이 흐르는 것, 즉 선도를 말한다"고 설명했다.
'천부경'은 81자의 짧은 글 안에 우주의 생성·진화·완성의 원리, 대립과 경쟁을 극복할 수 있는 조화와 상생의 철학을 담고 있다. 하늘(天)과 땅(地) 사람(人)이 하나임을 알고 '조화로운 하나'를 추구하는 생활습관이 선도이고, 그러한 사상의 표현이 단군의 홍익인간 정신이라는 것이다.
장영주 원장은 이를 삼원사상으로 풀어낸다. "우리 민족은 '삼(3)'의 민족입니다. 큰 일을 할때는 환인·한웅·단군 삼성께 고했고, 생산을 원할 때는 삼신할미께 빌었어요. 삼 세 번, 초가 삼간, 수염이 석자, 뺨이 석대, 술이 석잔 등은 모두 오랜 세월 우리의 정서와 문화를 대변합니다. 그러면서 다 함께 잘 살고자 하는 홍익인간을 추구했어요."
우리 선도는 역사적 격랑속에서 우여곡절을 겪었다. 삼국시대 이후 선(仙 )·불(佛)이 뒤섞이면서 삼성(환인·환웅·단군)에 대한 믿음이 불교식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고려 말 조선 초 성리학이 도입되면서 선·불은 배척됐고, 조선 왕실의 억압책으로 선도가 무속신앙화하는 경향도 생겼다.
그러다 조선말 유교 이념이 약화되자 선도는 민족종교 형태로 부활한다. 대종교 등이 항일운동의 거점이 되자, 일제는 교묘한 식민사관으로 선도와 단군을 말살한다. 그후 삼성이나 단군은 '무속신' '우상' 정도로 취급되다, 1980년 초 선도 수련법과 단학이 대중속을 파고들면서 새로운 변화를 맞고 있다. 그러나 역사학자들 중에는 '천부경'이 실린 '한단고기'등 선가의 사서들이 후대에 지어 쓴 위서라며 사료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선도 연구자인 박성수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우리의 선도에서 홍익인간 정신이 나오고 그것이 광복 후 교육이념으로 받아들여졌으나 많은 이들이 그 중요한 의미를 잊고 있다"면서 "잊혀진 정신 문화를 되찾는 작업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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