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52N5Ed (문서파일)
* "박물관역사문화교실 ⑧ 구지가(龜旨歌)가 말하는 가야사 - 이영식"에서 "4. 가야사의 전개" 에서 "3) 후기가야後期加耶 - 영역국가로의 발전 -  ④ 가야의 피라미드 - 지산동 고분군내용만 가져오고 제목은 좀 바꿨습니다.

가야의 피라미드

<대가야의 고령 지산동고분군>

대가야 왕릉 답사 대가야왕의 우물이 있는 고령초등학교를 나와 남서쪽으로 고령소방서 옆의 비스듬한 언덕길을 오르면 오른쪽으로 고령군민체육관이 보이고, 그 맞은편으로 예전의 가야공원과 대가야 유물전시관이 보입니다. 불상과 석등이 아무렇게나 서있는 가야공원의 아래쪽으로 고령향교가 있는 곳에 대가야의 왕궁 터로 전해지는 공간이 있습니다. 2000년 경북대학교박물관의 발굴조사에서는 심한 파괴로 이렇다 할 단서는 잡지 못했지만, 대가야의 왕궁 터라는 전승이 있어, 대가야국성지(大伽倻國城址)라고 새긴 자연석의 비가 있습니다. 다시 고령군민체육관 앞의 산길을 약간 오르면 주산성(主山城)의 성벽으로 이루어진 길과 발 아래로 수문이 있는 성벽을 지납니다. 여기부터 20여 분 정도 꽤 가파른 산길을 오르다 보면 갑자기 거대한 고분이 나타나고, 그 봉분을 넘으면 동쪽으로 발 아래로 고령 읍내가 펼쳐지며, 남쪽으로 물결치며 능선을 따라 내려가는 대규모의 고분들이 보입니다. 여기가 대가야의 왕릉묘역 고령 지산동고분군池山洞古墳群입니다.

지산동고분군 

높이가 6m에 지름이 25~27m나 되는 초대형의 44호분을 비롯한 약 70여 기의 대형고분과 그 사이사이에 자리한 수백 기의 작은 무덤들이 산 능선의 전체를 빼곡히 메우고 있습니다. 쌓아올린 봉토가 매우 높아 높을 고(高)에 무덤 총(塚), 그래서 고총(高塚)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러나 전기가야의 ‘대가야’였던 김해의 가락국에는 이런 초대형의 고분은 없습니다. 가야지역에서 고총은 대개 4세기 말경부터 만들어집니다. 반면에 가락국은 4세기 말∼5세기 초를 경계로 쇠약해지기 때문에, 가야의 왕릉으로서 고총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이미 잃고 있는 셈입니다. 가야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먼저 ‘대가야’로 발전했지만, 고총이 만들어지는 때가 되면 이미 실력을 잃게 됩니다.

“늦되는 사람이 크게 된다”고 했던가요? 김해에는 지산동고분군처럼 초대형의 
봉분들이 즐비한 대규모의 고분군은 없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4세기 초에 남부의 가야국들에게 선진문물을 공급하고 있었던 낙랑군과 대방군이 고구려에게 축출되면서, 그를 대신하는 한반도의 선진국으로서 고구려와 백제가 등장하게 됩니다. 따라서 5세기 초부터는 선진국인 고구려와 백제에 조금이라도 가깝게 위치한 북부의 가야세력이 발전하게 되는데, 그 선두에 섰던 것이 고령의 대가야였습니다. 5세기 중반이 되면서 대가야는 후기가야의 중심국으로 성장하게 되고, 6세기 단계가 되면 합천․거창․함양․산청․의령․진주․하동 등의 서부경남일대를 석권하는 강력한 왕국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고령의 대가야가 후기가야에서 중심국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지산동고분군입니다

가야의 피라미드 

일제가 파헤치기도 했던 지산동고분군은 1977년에 경북대와 계명대 박물관이 44호분과 45호분을 발굴조사하면서 대가야 왕릉의 면모로 확인되기 시작합니다. 44호분은 중앙에 3기의 대형 석실(石室)=돌방을 만들고, 그 둘레에 방사선형으로 32기의 소형 석실들을 배치했습니다. 모두 35기나 되는 석실들은 1~3단의 호석(護石)이 둘려지고, 그 위는 하나의 봉토로 덮였습니다. 35기의 매장시설들이 하나의 무덤으로 한 번에 만들어졌던 것을 보여 줍니다.

44호분은 대가야의 왕릉으로서 처음부터 그렇게 계획된 무덤이었습니다. 45호분도 
같은 모양의 무덤입니다. 중앙에는 2기의 대형 석실이 나란히 만들어졌고, 그 주위에는 11기의 소형 석실들이 배치되었습니다. 44호분의 중앙에 위치한 석실의 길이는 무려 9.4m나 됩니다. 이 석실=돌방은 위치와 규모, 그리고 호화로운 각종의 유물로 보아 주인공이 안장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44호분은 해발 300m 정도의 높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35기의 석실에는 엄청난 석재가 사용되었고, 그 석재들이 자연석은 아니었습니다. 산에서 채석하여 가공되고 이곳으로 운반되었습니다. 지름이 25∼27m에 높이가 6m에 달하는 봉토의 흙을 채취하고 운반하는 것도 만만치 않았을 겁니다.

더구나 35기의 석실에서는 엄청난 양의 토기와 철기류, 금은제품, 식품과 직물류 
등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생전에 쓰던 물건도 있겠지만, 44호분이 축조될 때 새로 제작하여 부장품으로 넣어졌던 것도 많았습니다. 이러한 부장품들 역시 300m 아래의 왕궁과 부속공방에서 제작되어 운반된 것들이었습니다. 하나의 무덤 안에 수많은 방들이 설치되었던 것도 그렇거니와, 고분의 축조에 투입되었던 엄청난 노동력과 비용을 생각한다면, 44호분은 가야의 피라미드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대가야 왕릉전시관 

이러한 지산동고분군의 내용과 대가야의 역사를 실감나게 살펴 볼 수 있는 곳이 대가야 왕릉전시관과 박물관입니다.  2000년 10월에 개관한 대가야왕릉전시관은  대규모의 순장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44호분을 발굴당시의 모습으로 재현한 곳입니다. 전시시설을 덮은 돔은 44호분의 봉토와 같은 모양과 규모로 만들어졌고,  최신의 전시방법과 내부시설은 최상급의 가야왕릉을 보여주기에  충분합니다.  전시관에서  박력을 느낄 수 있다면 좀 ‘오버’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일부러라도 고령까지 찾아가 살펴볼 가치는 충분합니다.  가벼운 산책 삼아 지산동고분군을 돌아 내려오면 합천으로 통하는 국도 변의 전시관에 다다르게 됩니다.  다리도 쉬면서 대가야의 영광에 한번쯤 젖어 보는 것도 그럴 듯하다고 생각됩니다.  중앙 석실에 누워있는 대가야 왕도 만나시고,  순장되었던 남녀 아이들은 누구였을까,  또 생사람의 순장자들은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도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아, 참! 44호분에서는 야광조개로 만든 국자도 출토되었습니다.  야광조개는 일본 오키나와 남쪽의 심해에서만 채취되는 조개랍니다.  경북 내륙 깊숙이 들어앉은 대가야가 어떻게 일본열도는 물론 남방까지 교류를 가졌을까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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